설교/요한복음

내가 곧 길이요

이창무 2021. 7. 25.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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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19 강 / 이창무
  

내가 곧 길이요

말씀 / 요한복음 14:1-14
요절 /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2001년도에 발매된 god의 “길”이라는 노래의 첫 소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 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사람들은 언제 두렵고 불안해하며 염려합니까? 이 가사처럼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때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 그곳에 어떻게 갈 수 있는지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불안과 근심에서 벗어나 참 평안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왜 근심했을까요? 예수님이 제자들이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가시겠다고 계속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엄마에 떨어질 때 분리 불안을 느끼는 아이들처럼 제자들은 불안해 했습니다. 근심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다고 말씀하시고 베드로가 나를 세 번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수제자인 베드로가 무너진다면 다른 제자들은 더 이상 볼 것도 없었습니다. 제자들 사이에 분위기가 뒤숭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근심은 열두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항상 안고 있는 문제입니다. 누구나 언제든 실직, 파산, 질병, 가까운 사람의 죽음, 공동체의 붕괴 등등 전혀 준비하지 못했던 갑작스러운 일들을 겪게 될지도 모릅니다. 안 일어나면 좋겠지만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나보다 더 강한 사람도 이런 일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이 내게 일어나면 어떻게 하나 염려하고 근심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런 걱정 근심 때문에 위로 받을 곳을 찾게 됩니다. 세상에 술집이 왜 이렇게 많을까요? 술에 취해 근심을 잠시라도 잊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위로는 진정한 위로가 아닙니다. 일시적인 싸구려 위로일 뿐입니다.

그러면 근심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믿으니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자칫하면 남의 일이라고 뻔한 교훈을 쉽게 말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은 예수님도 믿음으로 근심을 극복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앞서 유다의 배신에 대해 말씀하실 때 심령이 괴로웠다고 하셨습니다(13:21). 또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며 기도하실 때도 지금 내 마음이 괴롭다고 고백하셨습니다(12:27). 바로 여기서 괴롭다는 표현이 오늘 근심과 정확하게 원어로 같은 단어(ταράσσω)입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시면서 우리가 겪을 수 있는 그런 근심과 고통을 친히 경험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말씀은 근심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시는 분의 위로가 아닙니다. 한때 근심에 휩싸여 괴로워 하셨으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근심을 극복하신 분께서 우리에게 주는 위로입니다.

그런데 과연 “믿으라”는 말 한 마디로 근심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요? 너무 막연하지 않나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근심을 멈추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근거와 이유를 세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기 때문에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2,3)”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내 아버지 집은 하늘 나라를 가리킵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머리둘 곳 없으신 예수님을 따라 다니느라 덩달아 머리 둘 곳 없는 삶을 살아 왔습니다. 영접해 주는 집에 있으면 들어가고, 없으면 노숙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달픈 나그네의 삶은 영구적인 것 아닙니다. 이제 얼마 후면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려가셔서 그곳에 제자들을 위한 영원한 거처를 예비해 놓으실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충분히 크고 넓어서 거할 곳이 많습니다. 그래서 부동산을 놓고 서로 경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2년마다 한 번씩 재계약할 필요도 없고 쫓겨날 위험도 없고 집이 낡아지거나 비가 새 수리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늘에 이런 처소가 준비되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러 다시 오실 것입니다. 제자들을 영접하여 예수님이 계신 곳에 그들도 있게 하실 것입니다. 올해는 이곳에서 하기 때문에 필요 없지만 여름수양회에는 늘 선발대가 있었습니다. 여름수양회의 시작은 수양관 답사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 수양관을 답사해 보고 베스트의 장소를 선정합니다. 최종 선정하기에 앞서 밥을 꼭 먹어 봐야 합니다. 밥이 정말 중요합니다. 선정된 후에도 한번 쯤 더 가서 현장 점검을 합니다. 그리고 수양회 당일이 되면 선발대가 아침 일찍 출발합니다. 필요한 물품을 나르고 장비를 설치하고 전체 타이틀을 붙이고 강의장의 환경을 준비합니다. 선발대의 이런 수고 덕분에 본진은 편안하게 수양회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본진인 땅에 있는 우리가 거할 하늘의 처소를 만들기 위해 하늘과 땅 사이를 수차례 왔다 갔다 하는 선발대이십니다. 처음 오실 때는 하늘 나라의 모든 영광을 다 버리시고 겸손하게 낮아져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다시 하늘로 가실 때는 십자가 죽음이라는 고통의 관문을 통과해서 가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다시오셔서 우리를 천국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이게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부 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창조주이시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선발대가 되어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고 직접 우리를 맞이하시고 인도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섬겨야 할 예수님이 도리어 이렇게 우리를 위해 섬겨 주십니다. 이런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서울에서 집 값이 올라도 너무 올랐습니다. 34평 아파트를 한 채 장만하려면 한 가구가 67.33 년 동안 저축해야 가능하다고 합니다. 부동산 문제가 정말 심각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부동산 문제가 있습니다. 죽음 이후 거할 곳이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인간에게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 때를 모를 뿐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예약된 일입니다. 하지만 죽음이 끝임을 인지하는 순간, 두려움과 근심이 찾아옵니다. 죽음은 살아서 행한 모든 일을 무의미로 바꾸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심을 떨쳐 내기 위해 “100세 시대” “제 2의 인생” “인생은 70부터” 같은 구호를 외칩니다. 그러나 구호는 구호일 뿐입니다. 결국 누구든 인생의 종착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때  이 땅에 소유하고 있던 모든 것들은 다 놓고 가야 합니다. 죽음 이후 내가 거할 곳을 마련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근원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이런 인생들에게 누가 궁극적인 위로를 줄 수 있을까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 1 번의 문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자신에게 주어진 종교개혁의 과제에 눌려 근심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합니다. 루터가 답답한 마음에 밤중에 기도하다가 문득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교회가 내 교회입니까? 하나님 교회입니까? 하나님 교회이지요. 이 종교개혁의 일이 내 일입니까? 하나님의 일입니까? 하나님의 일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저는 이만 잠자러 가겠습니다.” 루터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참으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누구의 것입니까? 내 것입니까? 예수님의 것입니까? 살아 있을 때도 예수님의 것이고 죽어서도 예수님의 것입니다. 당연히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말길 때 우리가 근심을 멈출 수 있습니다.

둘째, 길 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목적지와 그 목적지까지 가는 길에 대해 너희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내용에 대해 지금까지 예수님이 반복해서 말씀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5)”

도마는 목적지도 모르고 목적지에 가는 길도 모르고 다 모른다고 답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다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다만 도마에게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솔직함와 질문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6절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목적지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논란이 많은 구절입니다. 20세기 전반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은 인류는 이제는 더 이상 싸우지 싶지 않았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고 그냥 너도 옳고 나도 옳은 것으로 하자는 흐름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상의 시대 정신이 된 포스트 모더니즘입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다원주의, 상대주의를 특징으로 합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종교 다원주의자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흔히 등산을 비유로 듭니다. 산 정상에 오르는 등산로는 여러 갈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든 결국 정상에서 다 만나게 되듯이 기독교나 불교나 유교나 유대교나 다 각자의 길을 가다 보면 결국 한 군데서 다 만나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맞는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까? 여러 등산로가 있고 산 정상에서 만난다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고등 종교는 서로 비슷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목적지가 산 정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산 정상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어떻게 해야 하늘에 올라갈 수 있습니까? 오직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 예수님 외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유일한 사다리이시며 통로가 되십니다. 여러 종교가 고상한 윤리을 제공해 주고 삶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던져 줄 수는 있지만 딱 거기까지입니다. 결코 구원을 줄 수 없고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지 주지는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복음만이 이 땅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어린 장금이가 정상궁에게 한 이 대사가 참 유명합니다.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 하였는데 왜 홍시냐고 물으시면 …” 왜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냐 묻는다면 우리도 이렇게 밖에는 할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서 유일하다 하였는데 왜 유일하냐고 묻는다면 …” 이것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요 경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7)”

예수님과 오래 시간 함께 있었던 제자들은 길 되신 예수님을 통해 충분히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지 않았을까요? 과연 그럴까요?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8)”

빌립은 이제까지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처럼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

요즘 줌으로 원격 수업을 할 때 딴짓을 하는 학생이 무척 많다고 합니다. 끝날 시간에 선생님이 질문을 해 보면 한 시간 내내 떠든 내용을 하나도 모르는 학생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럴 때 선생님의 심정이 빌립을 보시는 예수님의 심정과 비슷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동안 예수님을 통해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은 스스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넣어 주신 말씀이며, 예수님이 하신 일들은 스스로 하신 일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하신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는지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에 잘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이렇게 빈약한데 어떻게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근심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이 왜 근심에 빠질 수 밖에 없었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가 너무나 부실했던 것이 근본 원인입니다. 예수님과 그렇게 가까이서 오랜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태에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남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신앙 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서 누구다 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의 경험이 풍성한 것은 아닙니다. 신앙 생활을 하더라도 영혼 없는 신앙 생활을 하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왜 영혼이 없을까요? 영혼을 끌어 모아 이 땅의 처소를 마련하는데 몽땅 다 쏟아 붓기 때문일까요? 영혼까지 갈아 넣어 성공과 출세에 매달리기 때문일까요? 어떤 이유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되면 점점 더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근심하고 불안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구하기도 합니다. 봐야만 믿을 수 있다는 빌립 같은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결코 근심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증거가 보이면 근심이 누그러졌다가 안 보이면 금방 다시 근심에 휩싸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근심을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수시로 길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 속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누적되면 될수록 하나님께서 내 곁에 함께 계시다는 것을 점점 더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확신이 있는 사람은 웬만한 일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나를 붙들고 있음을 알기에 염려를 이길 수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가 길 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근심 대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기도할 수 있는 때문에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12)”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돌아가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앞으로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이 행하셨던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을 제자들이 행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삼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과 팔레스타인 지역이라는 좁은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보다 더 긴 시간을, 더 넓은 지역에 나가서 사역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선교적 관점에서 제자들은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13)”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의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을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를 위해서 제자들은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육신으로 함께 있을 수 없는 대신 그들에게 기도라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이 기도의 특권을 잘 활용하면 제자들은 얼마든지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전세계는 무선 통신망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전세계 어느 곳이나 비대면으로 접근이 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올해 비대면 온라인 선교사 수양회에는 전세계에서 1,800여명이 참여를 했습니다. 예전에 대면 수양회 때는 400명 정도가 최대 인원이었는데 더 큰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주신 비대면 온라인 통신 수단이 있습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어느 곳에서 있든지 24 시간 어느 때이든지 예수님께 연결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즉 예수님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런 강력한 무기가 어디 있습니까? 이런 무기를 가지고도 염려하고 근심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번 여름수양회 폐회 예배 말씀인 빌립보서 4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감옥에 갇혀 판결을 기다리던 바울은 누구보다도 근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도와 간구로 근심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 중에 바울보다 더 심각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도로 근심을 이기고 기도로 큰 일을 이룰 수 있음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알고 그곳까지 어떤 길을 통해 갈 수 있는지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마음에 있던 모든 근심을 내려 놓을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 근심에게 작별을 고하고 믿음과 손을 맞잡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함으로 큰 일을 이루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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