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이창무 2021. 9. 12.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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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21 강 / 이창무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말씀 / 요한복음 16:5-15
요절 / 요한복음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고대 그리스의 희곡 작가 소포클레스가 쓴 ‘오이디푸스 왕’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테베의 길목을 지키고 있던 스핑크스는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답을 맞추지 못한 이들을 그 자리에서 잡아 먹었습니다. 그 수수께끼는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밤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였습니다. 아무도 풀지 못했던 이 수수께끼를 오이디푸스는 단숨에 풀어버립니다. 답은 ‘사람’이었습니다. 이후 오이디푸스는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칭송을 받으며 테베의 왕위에 오릅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해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맙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에는 누가 정답을 줄 수 있을까요? ‘진리의 성령의 오시면’ 바로 오늘 말씀의 제목 속에 답이 있습니다. 진리의 성령님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5장 18절부터 16장 4절까지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받으셨던 것처럼 제자들도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게 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께는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삼 년 반 자신과 함께 했던 제자들이 이제 스승이 떠날 시간이 다 되었고 수업 진도를 거의 다 나갔는데도, 예수님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5,6)”

예수님은 제자들 중 아무도 내가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다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13:36)?’라고 물은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데 지금은 너희가 따라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외에도 계속해서 얼마 후 죽임을 당하시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묻는 자가 없다는 뜻은 모르는데 왜 질문하지 않느냐는 의미가 아니라, 왜 이 중요한 일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하는 제자가 아무도 없느냐는 뜻입니다. 이유는 그들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예수님이 죽으시고 자신들 곁을 떠나게 되실 것을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명백한 사실로 확정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리시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라는 우리의 꿈은 다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 아닌가? 예수님이 죽으신 후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머리 속이 혼란한 제자들은 이 충격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질문하지 않고 거론조차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근심스러운 마음에 평안과 위로를 주시고자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7)”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가시는 것이 자신의 삶에 막대한 손해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망할 일만 남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현 사태의 진상을 명백하게 밝혀 주십니다. 팩트는 예수님이 떠나가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유익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떠나 가셔야만 보혜사이신 성령님이 제자들 가운데로 오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과 계속 함께 있는 것보다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과 함께 있는 것이 왜 더 큰 유익이 될까요? 질문 하나를 던져 보겠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계속 육신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면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단언하건대 제자들은 정치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기대를 끝내 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속적인 영광에 대한 집착을 끊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치 유치원생이 미적분이나 확률 같은 수학의 세계를 상상하기 어려워하는 만큼, 예수님이 죄와 사망의 노예로 사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고 세상 만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를 제자들이 온전히 이해하기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이 있고 그후에 보혜사 성령이 오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앞으로는 성령님이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지는 곳마다, 시대와 지역을 넘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것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998년 베스트셀러 중에 구본형 작가가 쓴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개인과 조직의 혁명적인 변화를 통해 위기를 극복할 것을 역설한 이 책은 IMF 사태와 맞불려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현재 우리 나라는 세계 10대 경제대국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그 원동력 중 하나로 IMF 사태를 꼽습니다. 그 일로 우리나라가 엄청난 위기를 맞았지만 경제 구조를 뿌리부터 다 뜯어고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성장의 기반을 만들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익숙한 것을 편하게 여깁니다. 심지어 변하지 않으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거나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눈 앞에 보여도 끝까지 익숙한 것에 집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본문의 제자들처럼 그 위기 상황에 대해 질문하지 않고 언급하기조차 꺼려 하면서 직면하기를 회피하곤 합니다. 하지만 위기는 변화를 향해 열린 기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이 팔레스타인이라는 좁은 땅 안에서 우리 민족의 번영과 안녕에만 집착하던 제자들로 하여금 성령님과 함께 천하 만국에 다니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사도들로 변화시켰던 것이 이를 입증합니다.

지난 주일 이예찬 형제님이 전역 소감을 발표했습니다. ‘해병대’라니 얼마나 모든 것이 낯설고 생소한 곳이겠습니까? 제대로 적응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스럽고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그곳에서도 이분과 함께 하셨습니다. 말씀으로 감동을 주시고 믿음을 새롭게 해 주셨습니다. 이예찬 형제님이 몸도 튼튼해지고 영혼까지 튼튼한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성장한 모습을 보니 너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저도 이분의 소감을 통해서 많이 배웠습니다. 제가 익숙하고 편안한 환경에 젖어 살면서 너무 안일해 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앞날에 예상되는 위기를 두려워하면서 근심에 싸여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바꾸시는 하나님이 펼치실 새 시대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것이 어떤 위기이든 간에 한계에 갇혀 있던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을 믿습니다. 잃어버리는 것을 과장하고 주님이 주실 것을 기대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기존의 나에게 집착하지 맙시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맙시다. 위기를 담담히 받아들입시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새 지평이 열리고 우리가 새롭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곁에 함께 하시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이 길을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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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십니까?

첫째, 성령님은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8)”

여기서 세상은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세상입니다. 세상이 그들을 출교시키고, 심지어 죽이려 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님이 그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본래 변호사를 가리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는 변호인 역할을 하십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검사의 역할, 즉 책망하고 고소하는 역할을 하십니다.  ‘책망하다’라는 말은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 잡는다’는 의미입니다. 보혜사는 세상의 어떤 그릇된 점들에 대해 책망하실까요?

첫째로, 성령은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9)”

세상은 죄에 대하여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까? 유죄냐 무죄냐를 따지는 법적인 죄의 개념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도덕과 윤리의 잣대로 죄를 규정합니다. 문제는 이런 죄의 개념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 한다는 점입니다. 이제는 간통죄를 저질러도 도덕적 비난을 받을지언정 법적으로는 죄가 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상대방을 불쾌하게 한 발언이나 몸짓은 명예훼손이나 성희롱으로 법적인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실상 이제 서로 기분만 나쁘게 하지 않으면, 상호 간에 합의만 하면 거의 무슨 일이든 가능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성령님은 이런 세상을 책망하여 무엇이 죄의 핵심이고 근원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은 인간의 이성과 양심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의 책망을 들을 때에라야 불신이 죄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죄를 깨닫고 인정하는 사람만이 회개할 수 있고 회개해야 죄사함을 받아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책망을 듣는 일은 괴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책망은 구원의 여정에 있어서 첫 출발점이기에 반드시 들어야만 합니다.

둘째로, 성령은 의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10)”

죄에 대해 책망하신다는 말씀은 이해가 어렵지 않습니다. 반면 의에 대해 책망하신다는 말씀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의에 대해 책망하신다는 것은 세상이 가진 그릇된 의에 대해 바로잡아 주시고 참된 의가 무엇인지 깨우쳐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정의가 살아 있습니까? 세상은 얼마나 의로운 곳입니까? 누구나 다 말로는 정의를 외치고 있지만 현실은 왜곡된 정의가 판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어릴 적부터 들어왔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아직도 자주 듣고 있습니다. 힘이 있고 돈 많은 사람은 큰 죄를 저질러도 쉽게 풀려나는 반면, 힘이 없고 가난한 사람은 작은 죄에도 무거운 처벌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일이 예수님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이 정의였습니다. 빌라도에게는 알량한 자기의 권력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이 정의였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그들의 정의를 인정하셨을까요? 만약 인정하셨다면 예수님은 지옥으로 가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죄가 없고 의로우시다는 것이 입증된 사건입니다.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알고 보면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너희는 지옥에 갈 것이기 때문에 천국에 있는 나를 영원히 볼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세상의 정의가 오히려 불의요, 예수님의 정의야말로 참된 정의임을 드러내십니다.

셋째로, 성령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11)”

이 말씀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세상은 예수님을 재판하여 사형에 처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그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이 집행된 사건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승리를 확인하고 환호했던 바로 그 십자가의 자리가 자기들의 우두머리인 세상 임금 사탄이 심판을 받는 자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정사와 권세를 무력화시키셨습니다(골2:15).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죽음을 이기심으로 마귀의 세력을 멸하셨습니다(요일3:8). 성령님께서 가고 오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죽인 세상의 심판이 도리어 그들에게 심판을 가져다 줄 가장 참담한 죄라는 사실을 드러내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이렇게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책망하실 때 세상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죄와 불의를 깨닫고 그것이 가져오게 될 심판에 대해 두려워 하는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님이 강림하시던 날 밤에 바로 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도 베드로는 그 자리에 있던 유대인을 향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이때 그들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2:37)”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결국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들에게 구원과 영생이라는 복이 임하게 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통해 들려 주시는 성령의 책망하시는 음성을 듣고도 자신의 죄와 불의를 인정하기 거부합니다. 그냥 기분이 상했다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책망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 앞에서 어떠한 변명이나 핑계를 늘어놓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이 두 가지 반응을 다 직면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우리를 쓰셔서 세상을 책망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하고 선포하는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또한 그 복음을 드러내는 삶을 통해서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사람들이 성령의 책망을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놀라고 기뻐합니다. 완악하고 교만했던 사람이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십자가 앞에서 눈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서 성령의 역사가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나의 서툴고 부족한 말씀 선포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함께 하셨음을 인하여 감사하고 감격하게 됩니다. 여기에 용기를 얻어 더욱 힘을 내어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성령의 책망을 거부하는 사람들로부터는 미움을 받게 됩니다. 내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비난과 손가락질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굴복할 수 없습니다. 굴복한다면 공격은 사라지겠지만, 세상을 책망하시는 성령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어긋난 길을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침묵한다면, 그 누가 세상의 허위를 폭로하고, 그들이 가진 거짓 희망을 부수고, 진리를 증언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고 염려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증인 된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책망하시는 사역과 함께 하는 교회, 진리의 빛을 비추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성령님은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12)”

당장 예수님이 죽으시면 모든 것이 끝장난다고 생각하는 제자들, 그래서 묻기도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더는 언급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남은 진도는 누가 이끌어 주십니까? 제자들이 아직 깨닫지 못한 숱한 말씀들을 누가 가르쳐 주십니까?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3)”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 중에 아직까지 제자들이 그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부분들을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복음서에 나오는 연약하고 어리석은 제자에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담대하고 능력 있는 사도들로 훌쩍 자라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과 관계없이 별개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새로운 계시를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어지는 14, 15절이 그 설명입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14, 15)”

진리의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자기 영광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한 신학자는 성령님을 가리켜 수줍음이 많으신 분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것을 말씀하시고, 이 예수님의 것을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알리십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조금의 착오도 없이 완벽하게 조화로운 통일되고 일관성 있는 말씀을 주십니다. 이것이 사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입니다. 사도들이 기억에 착오를 일으켜서 예수님이 하시도 않은 말씀을 성경에 삽입하지 않았을까요? 슬쩍 자기 말을 예수님의 말씀인 양 성경에 끼워 넣지 않았을까요? 이런 의심을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영감을 주시어 오류가 없이 기록되도록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진리의 성령께서는 지금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어 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진리를 깨닫고 그 말씀에 감동 받게 하시고 그 말씀에 따라 살도록 도와주시고 계십니다.

성령 사역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대부분 방언, 예언, 신유 등의 신비한 체험을 연상합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성령께서 일하시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성령님이 주된 사역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성령님의 일하심도 진리의 말씀과 분리되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전에 어떤 분이 우리 모임은 말씀 사역에 치중하느라 성령 사역이 없다는 하시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말 큰 오해입니다. 말씀 사역이 곧 성령 사역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 일이야말로 성령님이 하시는 일에 가장 확실하게 동참하는 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만큼 성령 운동에 열심인 곳이 드문 것 같습니다. 자부심을 가지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헛된 자부심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겸손하게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매주 성경 공부할 때마다 성령께서 마음에 감동을 주시어 말씀을 깊이 깨닫고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먹을 때마다 성령께서 하루하루 승리할 영의 양식을 공급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마다 성령의 책망하시는 음성을 듣고 회개하게 도와주시고, 더 나아가 진리의 말씀을 전달하는 성령의 도구로 쓰임 받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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