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창무 2021. 7. 18.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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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18 강 / 이창무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말씀 / 요한복음 13:1-17
요절 / 요한복음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오늘날 교회에서 종종 세족식을 행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 세족식의 기원이 되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속에는 세 종류이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째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입니다. 둘째는 처음에는 사랑했지만 결국 배신을 선택하는 가룟 유다입니다. 셋째는 현재 사랑하기는 하지만 많은 오해를 하고 있는 베드로입니다. 이 중에 베드로의 모습이 우리의 현재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을 듭니다. 그런데 후에 베드로는 갸룟 유다처럼 배신하지 않고 결국 끝까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지금은 많이 부족하지만 예수님의 씻어 주시는 사랑을 알고 끝까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

유월절 전에 예수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가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예수님은 마음이 몹시 괴로우셨습니다. 이런 심란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비록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에 속할 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전적으로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사랑하사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부지런히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무리들은 예수님에게 자기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무리들을 이처럼 사랑하셨던 예수님이 자기 사람들을 향해서는 얼마나 더 깊고 풍성한 사랑을 주셨을까요? 오늘부터 시작되는 요한복음 후반부 말씀은 그 특별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끝까지”라는 말을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죽음의 순간까지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또는 하나도 남김이 없이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서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코 앞에 두고 예수님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모두 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에 쏟아 붓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과 대조되는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2)”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마귀가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유다는 그 생각을 거절하지 않고 영접해 버렸습니다. 이것은 유다가 현재 예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유다는 처음에는 나를 성공의 사다리 저 위 쪽에 단숨에 올려 줄 분으로 알고 사랑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예수님은 내가 기대했던 그런 분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실망은 곧 배신감으로, 배신감은 곧 미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유다의 사랑은 내 소원을 실현시켜 줄 수 있다는 조건 하에서만 지속될 수 있는 조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조건이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사랑이 가룟 유다와 같은 조건적인 사랑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은 결코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라고 제자들에게 실망할만 한 일이 없었겠습니까? 수도 없이 많습니다. 제자들은 늘 영적으로 둔해도 너무 둔해서 예수님이 탄식하신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이 정도는 애교입니다. 당장 삼년 반을 동고동락했던 제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기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리며 기도하실 때 수제자라 하는 세 사람이 잠에 떨어질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 밤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할 것도 아십니다. 그러나 이런 제자들의 실패가 결코 예수님의 사랑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요? 처음에는 사랑했지만 결국에는 배신하는 사람이 될 지 누가 알겠습니까? 배신까지는 아니더라도 베드로처럼 자신의 안전과 유익을 위해 예수님을 부인하게 될 지도 모를 일입니다. 나의 연약함, 나의 부족함을 볼 때 신앙 생활, 목자 생활에서 실패하면 어쩌나 고민이 됩니다. 예수님이 이런 나의 모습에 실망하여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어 얼굴을 돌려 버리시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너무 고민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흔들리고 실패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은 언제나 그것을 넉넉하게 덮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도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긴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어제까지는 사랑했어. 그렇지만 오늘부터는 아니야” “난 여기까지만 사랑할 수 있어. 더 이상은 못 해” 부부 사이에서도,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도 이런 말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마지막 남은 땀 한 방울, 피 한 방울까지 남기지 않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숨을 거두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아니 죽음 이후 영원까지 나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자기 사람으로 삼으신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자기 사람들의 그 어떤 죄악과 실패도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이길 수 없습니다. 어떤 언어도 예수님의 이 무한한 사랑을 충분하게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 역시 이렇게 그냥 단순하게 표현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우리가 어떤 상황, 어떤 순간에도 이 사랑을 신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자기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은 사랑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습니까?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4,5)”

예수님은 저녁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갑자기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으시더니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을 발을 씻겨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허리에 둘렀던 수건으로 발에서 물기를 제거해 주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대부분 샌들을 신고 다녔습니다. 길은 당연히 비포장 도로였고 건조한 날씨 때문에 먼지가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발이 쉽게 더러워져 보통 발을 씻고 식사를 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인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와 선생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이전에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이례적이고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을까요?

첫째,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씻어 깨끗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족식의 첫번째 의미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속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다가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3)” 도무지 예수님께서 왜 이런 행동을 하시는 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입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입성할 때 무리들의 열렬한 환영을 목격한 이후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왕좌에 오르실 날이 멀지 않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예수님이 왕이 될 연습을 하셔야 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봐라. 이리 오너라. 무엄하도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이런 말투를 익혀야 할 때입니다. 왕처럼 위엄 있게 걷는 법을 배워야 할 때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웃통을 벗고 발을 씻겨 주시다니요? 종들이나 하는 일을 직접 하시다니요?

이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7)” 

베드로가 깨닫게 될 “이 후”가 언제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네가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깨닫게 되어야만 오늘 세족식의 의미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세족식의 일차적인 의미는 십자가 사건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의미를 모르는 베드로는 반발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8a)”

베드로가 왜 이렇게 크게 반발하는 것일까요? 혹시 그의 발에 심한 무좀이 있었던 것 아닐까요? 어떤 사람은 베드로가 수제자였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은 이런 안 좋은 선례를 남기시면 예수님이 안 계실 때는 자기가 발을 씻겨 주어야 할 것 같아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아니면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고 사랑하는 예수님이 이런 천한 일을 하시는 것 자체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서 반발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충격적인 대답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b)”

베드로와 예수님이 서로 상관이 없게 된다면 서로 남남이 된다는 말 아닙니까? 더 이상 예수님의 자기 사람들 속에 들어갈 수 없게 된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너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로 들립니다. 베드로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이렇게 반응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9)”

방금 전까지는 발도 안 된다고 하더니 이제는 손과 머리까지 씻어 달라고 합니다. 역시 베드로는 참 단순한 사람입니다. 실수는 많은데 미워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 요청에 어떻게 답을 주셨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10a)”

여기서 목욕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은유일까요? 이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로 죄 씻음을 받습니다. 그 후 정결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이 거듭남은 일생에 단 한 번뿐입니다. 한 번 거듭난 사람은 다시 거듭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을 나타내는 세례는 오직 한 번만 받게 합니다. 그런데 거듭난 사람은 이미 깨끗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씻을 필요가 없을까요?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구원파”로 불리는 이단입니다. 그러나 이미 목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발은 씻어야 합니다. 거듭난 사람이 할지라도 죄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예수님 앞에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기억한 사도 요한은 후에 이미 믿어 구원 받은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권면한 바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한꺼번에 다 도말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일평생에 짓는 모든 죄악이 한꺼번에 다 씻음을 받았습니다. 온 몸이 깨끗합니다. 그런데 왜 발을 씻어야 합니까? 왜 계속적인 죄의 고백이 필요합니까? 이것은 죄의 용서와 관계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회복에 관한 것입니다. 죄를 계속해서 지으면서도 하나님께 그 죄를 고백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씻어주심이 없이 스스로 어느 정도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예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나는 씻겨져야 할 죄가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씻어주심 없이는 저는 깨끗해 질 수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 제 발을 씻겨 주시옵소서!” 라고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10b,11)”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아직 목욕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씻음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배신할 가룟 유다였습니다. 나의 수치와 더러움, 죄악과 증오와 음란함을 내어 놓고 예수님의 피로 씻음 받은 적이 있습니까? 교회에 오래 다녔지만, 아직 예수님의 피로 씻음 받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발을 씻은 지 너무 오래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멀어진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번 여름 수양회가 우리들에게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씻음 받는 은혜를 누리는 수양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학사 주제 1 강 빌립보서 2장 말씀과 학생 주제 2 강 누가복음 23장 말씀이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외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설사 비대면으로 수양회가 진행된다 하더라도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십자가 복음의 능력이 랜선을 타고 우리 심령에 힘있게 역사하리라 믿습니다. 이번에 인생 소감과 소감을 발표하는 모든 분들에게도 우리 죄를 씻어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발을 씻길 수 있도록 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으셨습니다(12). 방금 전까지는 종의 모습이셨는데 지금은 어떤 모습이십니까?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13)”

제자들은 예수님을 부를 때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께 잘 어울리는 호칭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전적으로 긍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종들처럼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을까요?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4,15)”

예수님은 주님이시고 선생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당연히 종들입니다. 주님이 낮아져서 종들의 발을 씻겨 주셨으니 종들이 서로의 발을 씻겨 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은 의심할 것도 궁시렁거릴 것도 없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이때 만약 “나는 도저히 남의 발을 씻겨 줄 수는 없다. 그건 내 자존심이 허락해 줄 수 없는 일이다” 하면서 형제의 발을 씻겨 주기를 거절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주님이신 예수님보다 더 높은 사람이다.”라고 선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16)”

굳이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다는 것도 자명한 이치입니다. 큰 자가 행하는 데 작은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낸 자가 목숨 바쳐 행한 일을 보냄을 받은 자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일은 바로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의 죄를 씻어 주는 것일까요?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에서 죄인을 대신해 죽으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감사하게도 34절에서 예수님은 이 말의 의미를 직접 설명해 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겸손하게 낮아져서 종이 되어 섬겨 주셨듯이 사랑으로 겸손히 낮아지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한 센터에서 어느 수양회 때 다 같이 세족식을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자 어떤 목자님이 손을 번쩍 들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목자님, 저는 맨정신으로는 세족식 못할 것 같아요.” 맞는 말입니다. 맨정신으로 할 수 없습니다. 의무감으로 한다면 할 수도 없고 하더라도 수치심과 굴욕감만 쌓이기 쉽습니다. 내가 예수님께 얼마나 씻음을 받았는가? 얼마나 큰 섬김과 사랑을 받았는가를 아는 만큼 우리는 서로의 발을 씻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님께 평생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섬김의 빚,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예수님은 그 빚을 예수님 자신에게 갚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 빚을 내 곁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 갚으라 명하십니다. 그들을 대할 때 예수님을 대하듯 하라는 뜻입니다. 주인을 대하듯, 상전을 대하듯, 선생을 대하듯 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7)”

세상의 지혜는 높은 자, 섬김을 받는자, 다스리는 자의 행복을 가르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이론이 아니라 학교에서, 군대에서, 회사에서,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경험으로 터득해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의 행복, 종의 행복, 섬기는 자, 발 닦아주는 자의 행복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 역시 이론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 앞서 가신 길입니다. 이 둘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세상이 가르쳐 준 행복을 따라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보증하신 행복론에 따라 사시겠습니까? 세상의 행복 원리를 따르면 기분이 좋아지기는 하겠지만 잠깐일 뿐입니다. 곧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종의 자리에서 섬기는 자로, 발 닦아 주는 자로 사는 사람에게 천국의 기쁨과 행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을 누리고, 우리 안암 1부가 천국의 기쁨이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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