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목자와 양

이창무 2021. 6. 2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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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14 강 / 이창무                                                                          

목자와 양

말씀 / 요한복음 10:1-6
요절 / 요한복음 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아빠와 엄마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기가 소리를 냈을 때 즉시 깨어 달려 가는 사람이 엄마이고, 계속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잘 자는 사람이 아빠입니다. 이처럼 어떤 소리에 얼마나 민감한가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해 줍니다. 오늘 말씀에서 소리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음성에 반응하는가에 따라 생명이냐 사망이냐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고 있습니까?” “어떤 소리가 가장 크게 들리십니까?”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빌미를 잡아 거세게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살벌한 분위기 가운데서 맹인은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 편에 섰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맹인을 출교시켜 버렸습니다. 이런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목자의 양의 비유를 통해 “참된 목자는 누구인가?”에 대해 가르쳐 주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목자와 양의 비유가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 중에 개나 고양이를 키워 본 분은 간혹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직접 양을 키워 본 분은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양 치는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먼저 그림을 그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목자들은 낮에 자기 양 떼를 데리고 목초지를 찾아 다니며 물과 꼴을 먹입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 즈음이 되면, 마을의 공동 우리가 있는 곳으로 양 떼를 몰고 옵니다. 여기에 자기 양 떼를 넣어 두고 목자는 집으로 퇴근을 합니다. 그러면 밤 사이 문지기가 여러 목자들이 맡겨 놓고 간 양 떼들을 지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으면 목자들이 출근을 합니다. 문지기는 목자를 일일이 확인한 후에 우리 안으로 들여보내 줍니다. 수많은 양들이 섞여 있는 공동 우리를 향해 목자는 “얘들아! 내가 왔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면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는 양들이 자기 목자에게로 우르르 몰려 듭니다. 목자는 혹시 밤 사이에 아픈 양은 없었는지, 어디 다친 양은 없는지 살펴봅니다. “에구, 우리 막둥이 요즘 많이 컸네.” “우리 예쁜이는 자고 나니 더 예뻐졌네” 이렇게 양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그리고 자기 양 떼들 앞에 서서 외칩니다. “얘들아! 밥 먹으러 가자!” 양떼들은 “너무 좋아요” 라고 말하듯이 일제히 “매에” 소리를 내며 목자의 뒤를 종종 걸음으로 따라갑니다. 드넓게 펼쳐 진 푸른 풀밭 위로 뛰어노는 하얀 양떼들, 이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목자의 모습, 얼마나 아름답고 정겨운 풍경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 속에는 이 평화를 위협하는 인물이 또 등장합니다. 바로 절도와 강도입니다. 그들은 양들의 정당한 주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들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탐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주로 어둠을 틈타 깊은 밤에 출몰합니다. 문이 아니라 담을 넘어서 몰래 우리에 들어갑니다. 양들에게 “얘들아! 내가 왔다” 속삭이며 목자인 척합니다. 귀가 밝은 양들은 목자의 음성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채고 도망을 칩니다. 하지만 둔해서 도망치지 못한 양들은 결국 절도와 강도의 먹이감이 되고 맙니다.

이 비유에서 양의 목자는 누구를 가리킬까요? 당연히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절도와 강도는 누구일까요? 9장에도 등장했던 바리새인들을 가리킵니다. 양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예수님께 속하게 된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이 비유에 나타난 예수님은 어떤 목자이십니까?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께 임명 받은 목자이십니다. 목자인지 아니면 절도요 강도인지는 문지기가 검증을 해 줍니다. 그러면 인생들의 목자는 그 정당성을 누가 확인해줄 수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친히 세우시고 임명하신 목자가 참된 목자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목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이렇게 책망하신 바 있습니다.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겔34:2,3)” 

‘양을 먹여야 할 목자들이 어떻게 자기 배를 채우겠다고 양들을 잡아먹을 수 있느냐?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버젓이 행할 수 있느냐?’ 하나님은 이렇게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겔34:23)”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참된 목자를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먹이시겠다고 언약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이 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임명 받은 목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언제나 정정당당하셨습니다. 꾸미는 것도 숨기는 것도 없으셨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숨기는 것이 많았습니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음모를 꾸미는 것이 그들의 장기였습니다. 양들 앞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그 뒤의 모습이 달라도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근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이 세우시고 인정하시는 참 목자가 아니라 거짓 목자이자 절도요 강도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누가 절도이며 강도일까요? 먼저 여러 이단들이 떠오릅니다. 그 중에 신O지가 대표적입니다. 그들은 정정당당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자신의 정체를 철저하게 숨깁니다. 정통 교회에 속한 전도사나 선교사로 자처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완전히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 싶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서 정체를 드러냅니다. 그들은 처음에 쓸개라도 빼 줄 것처럼 잘 대해 줍니다. 여기에 녹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최대한 탈탈 털어가 버립니다. 

하지만 이런 이단만이 절도와 강도가 아닙니다. 안타깝지만 정통 교회에 속한 절도와 강도도 있습니다. 청소년을 “가스라이팅”하다가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저지른 전도사도 있고, 거액의 교회 공금을 횡령한 목사도 있습니다. 양을 돌보는 일보다 정치에 더 열심인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자기 욕망에만 충실한 두 얼굴을 가진 목자들입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를 양이 아니라 목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목자 노릇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양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서 목자가 되려 했기에, 신자가 되기 전에 목자가 되려 했기에 목자가 아니라 강도가 된 것입니다. 결국 맹인으로 맹인을 인도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목자라고 불린다고 해서 참 목자는 아닙니다. 참 목자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목자인 예수님을 닮아가고 배우려고 할 뿐입니다. 부족한 줄 뻔히 알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 목자인 예수님을 드러내고 전하라 부르셨기에 이 일에 헌신할 뿐입니다. 

강도 같은 목자들을 피해 교회를 떠나 말씀에 굶주린 양들, 생명수에 목마른 양들이 도처에 방황하고 있습니다. 교회에는 나가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사람이 100만이 넘는다는 통계가 과장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 또한 길 잃은 예수님의 양들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이 사람들에 대해서도 문제 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도울 지 함께 연구하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참 목자 예수님께 돌아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양의 이름을 부르시는 목자이십니다. 대관령 양떼 목장에 두어 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모든 양들이 똑같이 생겨서 다 복제양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양들에게 이름을 붙이기도 어렵고 또 그 이름을 기억해 부르는 것도 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양들의 귀에 번호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 목자는 양들을 QR 코드로 식별하거나 번호로 부르지 않습니다. 각각 양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름을 부르려면 목자는 먼저 그 양의 특징을 구석구석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양의 생김새와 특성에 맞게 듬직이, 점박이, 복실이, 뺀질이 등등의 이름을 붙여줄 수 있습니다. 또한 지속적으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양의 이름을 기억하고 부를 수 있습니다. 목자가 이렇게 이름을 불러줄 때 목자와 양이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됩니다.

우리에게 우리 이름을 아시고 한 사람 한 사람 불러 주시는 목자가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복음서에 나온 인물 중에 예수님이 이름을 불러 주신 사람으로서 가장 감격한 사람은 삭개오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뽕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그를 올려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내려 오라.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불러 주시는 그 순간 삭개오는 숨이 막히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을 것입니다. 무리 사이를 헤집고 찾아와 주신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어찌 아셨는지 이름까지 불러 주셨습니다. 그야말로 전율을 일으키는 기적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요즘 교수님들은 출석을 주로 조교에게 시키기 때문에 학생들의 이름을 잘 모릅니다. 어쩌다 교수님이 학생의 이름을 불러주면 그저 성은이 망극할 따름입니다. 회사에 다니다 보면 내 자신이 한 구석의 조그만 톱니바퀴 같은 존재가라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톱니가 부러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버리고 새 것으로 갈아 끼우면 그만입니다. 나와 너의 인격적 관계는 점점 실종되고 나와 그것이라는 비인격적 관계가 대세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 각 사람을 아시고 이름을 불러 주시는 분이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강점은 무엇이고 약점은 무엇인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에게 우리는 결코 ‘그것’이 아닙니다. 다른 그 무엇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온 세상에서 유일하고도 특별한 바로 ‘너’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1:9)” 나를 먼저 찾아오시고, 나의 이름을 불러 주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셋째, 예수님은 앞에서 인도하는 목자이십니다. 양은 풀을 먹고 물을 마셔야 살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풀밭과 시냇물이 있는 곳까지 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곳까지 가는 길은 평탄하지만은 않습니다. 험하고 위험한 길이기도 합니다. 사나운 짐승이 많은 위험 지대를 통과해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어두컴컴한 골짜기를 지나가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양은 시력이 나빠 한 치 앞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자칫하다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질 수도 있고 코 앞에 짐승이 입을 벌리고 있는 곳을 향해 직진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목자가 있습니다. 목자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가 어디 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양들 앞에서 그들을 인도해 줍니다. 양들에게 가장 좋은 길, 가장 안전한 길로 안내해 줍니다. 목자가 인도하기 때문에 양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 길도 얼마나 험하고 거친 길입니까? 얼마 전 미국에서 홈리스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인터뷰한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의외로 얼마 전까지 아주 정상적인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한 사람은 컬럼비아 대를 졸업하고 펀드 매니저로 일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얼마 전까지 고등학교에서 생물학을 가르치던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몇 가지 안 좋은 일들이 겹치고 자신의 오판이 겹치면서 결국 현재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한 때의 실수를 후회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방법이 없다며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양과 같은 우리에게는 앞길을 인도해 줄 목자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가 되십니다. 목자 예수님의 인도함을 따르면 우리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안전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의의 길, 생명의 길로 이끄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성이 올바르게 맺히기 위해서는 양의 책임 있는 반응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양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첫째, 예수님의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비밀번호”라는 동시가 있습니다. “우리 집 비밀번호 □□□□□□□ / 누르는 소리로 알아요 / □□□ □□□□는 엄마 / □□ □□ □□□는 아빠 / □□□□ □□□는 누나 / 할머니는 □□ □ □ □ □ □ / 제일 천천히 눌러도 제일 빨리 나를 부르던 이제 기억으로만 남은 소리 보고 싶 은 할 머 니” 이처럼 손자는 현관문 번호키 누르는 소리만 듣고도 할머니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목자가 양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자 양들은 금방 자기 목자를 알아 차립니다. 목자가 잘 생겼나 못 생겼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명품 옷을 입었는가 허름한 옷을 입었는가 역시 중요하지 않습니다. 양들에게 목자를 분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목자의 음성입니다. 목자의 음성은 양들에게 목자 그 자체입니다. 

양들이 어떻게 목자의 음성을 알아챌 수 있을까요? 바로 경험과 관계를 통해서입니다. 목자와 함께 한 시간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게 해 주는 것입니다. 양들은 어쩌다 하루 밤을 같이 보내게 된 문지기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래 시간 나와 함께 해 왔던 목자, 자신을 쉴 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었던 목자의 음성만을 따라갑니다. 목자의 음성을 따라갔을 때 한 번도 위험하지 않았고 한 번도 배고프지 않고 한 번도 독초를 먹지 않았던 경험이 그 목소리를 들으면 반갑고 기쁘게 뛰는 양이 되게 한 것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보면 어린 왕자와 여우가 등장합니다. 같이 놀자는 어린 왕자의 말에 여우는 자신은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같이 놀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왕자가 길들여 짐이 무엇인지 묻자 여우는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라고 알려 줍니다. 그리고 관계가 형성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말해 줍니다. “다른 발소리를 들으면 난 얼른 굴속으로 들어가겠지. 그렇지만 네 발소리를 들으면 마치 음악 소리를 들은 듯이 굴 밖으로 뛰쳐나올 거야” 어린 왕자는 그런 친구가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여우는 대답합니다. “아주 참을성이 많아야 해.”

우리도 목자 예수님과 오래오래 관계성이 깊어지면 발소리만 듣고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소리가 참 목자 예수님의 음성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학력이나 신앙 연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얼마나 예수님과 함께 한 시간이 오래 되었는지, 얼마나 예수님을 따르며 많은 일들을 함께 경험해 보았는지, 얼마나 예수님과 가까이하며 친구로 지내왔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이 얼마나 믿을 만한 분이시고, 예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인지를 깨달을 때 그분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한단 말일세 믿는 맘으로 주께 가오니 나를 영접하소서”

둘째, 예수님의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순종합니다. 목자가 아무리 양들을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려 해도 양들이 따라와 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목자가 양을 신뢰하지 못하면 앞장서서 갈 수 없습니다. 불안해서 자꾸 뒤를 돌아보거나 때로는 염소처럼 목에 줄을 매달아 질질 끌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양들이 따라올 것을 믿기 때문에 앞서서 갈 수 있습니다. 이때 양들 역시 목자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줄 것을 믿고 그의 뒤를 따라 갑니다. 양은 자기 생명을 목자에게 맡겼기 때문에 기꺼이 따라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목자와 양의 관계는 서로 견고한 신뢰로 맺어진 관계이며 생명으로 결탁된 관계입니다.

우리의 목자 예수님은 우리를 무엇을 통해서 인도하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으로 깨닫게 하심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주일 메시지를 듣다가, 일용할 양식 말씀을 묵상하다가, 한 편의 소감을 쓰다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나를 너무나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내게 꼭 필요한 말씀을 주시고 지금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방향을 주십니다. 이때 예수님의 양은 어떻게 합니까? 목자 예수님의 음성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물론 잠시 고민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대로 살다가 손해만 보는 것 아닐까?” “이러다가 남들에게 뒤쳐지는 것 아닐까?” 그러나 결국 자기 고집과 자기 생각을 내려 놓습니다. 내 욕망이 부르는 곳이 아니라 주님이 부르시는 곳을 선택합니다. 그 길이 꽃길만은 아니겠지만 더 깊고 넓고 높은 사랑을 경험하는 여정이 될 것입니다. 그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 가운데 예수님이 약속하신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양은 거짓 목자로부터 도망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곧 타인의 음성은 듣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듣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도망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생명과 관련된 일이기에 단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여러 면에서 너그러워야 하지만 진리와 진리가 아닌 것 사이에서는 냉정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부족한 목자와 유능한 목자의 문제일 때는 다르지만, 참 목자와 거짓 목자의 문제일 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도망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 각종 이단과 불건강한 가르침과 인본적인 거짓 사상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아닌 타인의 음성을 잘 분별하고 분명하게 돌아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양은 목자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목자가 없으면 양은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꼴과 물을 얻지 못하고 굶주리고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사나운 짐승에게 잡혀 먹기 십상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양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길만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우리가 목자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내 삶을 맡기고, 그분을 의지하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를 향해 날마다 우리의 발걸음을 옮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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