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창무 2021. 6. 13.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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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12 강 / 2021.6.13. 이창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 / 요한복음 8:31-40
요절 / 요한복음 8:31,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프랑스의 소설가 알퐁스 도데가 지은 “스갱 씨의 염소”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스갱 씨의 집울타리 안에서 사는 것이 속박으로 느껴져 불평 속에서 살아가던 염소가 주인공입니다. 어느 날 염소는 드디어 줄을 끊고 울타리를 넘어 탈출에 성공합니다. 염소는 이리 저리 풀밭을 뒹굴며 하늘을 나는 기분을 느낍니다. 그러나 행복은 잠깐, 무서운 늑대가 나타납니다. 피 흘리며 죽어가던 염소가 점점 희미해지는 눈으로 주인의 집을 바라보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염소처럼 속박을 싫어하고 자유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에게 절대적인 자유는 없습니다. 자유를 얻으려면 포기해야 할 것이 반드시 있습니다. 인간이 참으로 자유롭게 되려면 그 자유가 생명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마치 물고기에 물은 속박이 아니라 생명의 터전인 것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우리의 생명의 터전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31)”

예수님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믿음은 다 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에 단계가 있습니다. 초보적인 믿음이 있고 온전한 믿음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은 아직 초보적인 단계의 믿음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온전한 믿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그 가르침의 핵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내 말에 거하면” 이라는 말 속에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 삶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는 일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에 거한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말씀 안에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나를 만드신 분이 주신 ‘인간 사용 설명서’라는 것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하다’의 시제가 현재라는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 안에 계속해서 머무른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제자”라고 부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을 신자가 부릅니다. 그런데 종종 신자와 제자를 분리시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자는 신자 중에서 특별한 부르심이 있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믿는다고 누구나 다 제자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믿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신자와 제자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다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고, 그래서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믿음이 온전한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임이 올해 60주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사람이 만으로 60살이 되는 해에 성대하게 회갑연을 열어 축하해 주는 전통이 있습니다. 얼마 전 있었던 세계선교 보고대회가 우리에게 그런 축하 잔치와 같았습니다. 축하도 해야 하겠지만, 지난 60년을 돌아보고 앞으로 60년을 내다보면서 우리의 핵심 가치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는 것이 참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그 핵심 가치를 오늘 본문 속 31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60년 전 한국 교회는 말씀 공부나 제자 훈련의 개념이 희박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처음부터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삶,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을 강조하고 실천해 왔습니다. 이제는 한국 교회 안에 말씀 공부와 제자 훈련에 대한 관심이 폭넓게 형성되었습니다. 우리 모임이 여기에 직간접인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무엇에 힘써야 할까요? 말씀 공부와 제자 훈련은 이만하면 되었고 다른 것을 찾아보아야 할까요?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지속적으로 끝까지 말씀에 거하므로 참 제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 안에 거하는 삶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일시적으로 열심히 하고 그만 둘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제자도에는 졸업도 없고 은퇴도 없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해. 할 만큼 했어.”가 없습니다. 우리가 앞으로도 변함 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끝까지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여 참 제자가 되면 그 다음 어떻게 될까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32)”

먼저 진리를 알게 됩니다. 여기서 진리가 무엇일까요? 36절에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를 보면 진리는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진리를 아는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렇게 진리인 예수님을 알면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뒤집어 보면 예수님을 알기 전 사람이 처한 상황이 어떠한 지 알 수 있습니다. 진리를 모르고 거짓에 속고 있습니다. 그 결과 스스로 힘으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인 노예 상태에 처해 있다는 말입니다.

누가 거짓으로 사람을 속이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그 정체를 분명하게 밝히고 계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44, 45)”

마귀가 거짓으로 사람을 속이고 있습니다. 어떤 말로 사람들을 속입니까? 마음의 욕심대로 행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속입니다. 하나님 없이 내 마음의 소원대로 사는 것이 자유롭게 되는 길이라고 속입니다. 예수님은 마귀가 처음부터 살인하고 거짓말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처음부터”는 창세기 3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 마귀는 사람에게 다가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는다 해도 절대로 죽지 않는다. 죽는 대신 너는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속삭였습니다. 물론 이는 다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 이후 모든 인류는 죽음이라는 저주와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살인하는 자, 마귀의 노림수였습니다.

지금도 마귀는 똑 같은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어떤 거짓말입니까? “하나님 없이 살아도 괜찮다. 아무 문제 없다. 왜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서 살아야 하는가? 세상에 너 자신보다 위대한 존재는 없다. 너 자신이 선악과 가치 판단의 기준이다. 다른 어떤 존재에도 얽매이지 말고 너만의 길을 가라. 네가 너 자신이 될 때 너는 신이 될 것이다.” 21세기는 자기 숭배를 권하는 사회입니다. 이런 생각이 학문과 예술, 방송, 사람들 사이의 대화 속에서 암암리에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많은 부모들이 자기 자녀에게 무조건 네 생각이 옳다. 너는 잘못하지 않았다고 두둔하는 현상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내 생각, 내 자존심, 내 감정, 내 느낌을 모든 것 위에 최우선에 두게 되었습니다. 어디에도 매이기 싫어 결혼하지 않거나 결혼해도 자녀를 낳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정말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게 되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를 잃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자기 것에 대한 집착에서 나온 불안 때문에 갖가지 인격 장애와 질환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또한 자기애가 너무 강하다 보니 다른 사람 입장에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아예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오로지 나만 생각하기 때문에 대인 관계에서, 공동체 생활에서 어울리지 못하고 계속 갈등을 일으킵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는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고, 엄마가 딸을 죽이고, 아내가 남편을 죽이는 이런 끔찍한 사건들이 연이어 있었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범인들 중에 제대로 반성하고 뉘우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이 시대 자기 우상화라는 거짓 진리가 낳은 괴물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을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이라는 말과 시작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참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아무 것에도 매이는 것이 없어야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내 말에 매이게 될 때 자유롭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매임이 자유가 될 수 있을까요? 한용운 시인의 ‘복종’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남들이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을 할 수가 없습니다 /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 시가 노래하고 있듯이 우리는 가장 고귀한 것에 복종함으로써 그 외 다른 모든 것에는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매이게 될 때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에 매이면 재산의 많고 적음에 매이지 않습니다. 성공과 실패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지위의 높고 낮음에 목을 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매이면 더 이상 이 땅에 속한 것에 얽매이지 않고 하늘을 훨훨 나는 새처럼 자유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자유를 누렸던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 바 있습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2,13)” 우리가 말씀을 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시적으로 자유롭게 되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온갖 더러운 정욕과 탐심에 이끌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거짓에 속아 이리 저리 휘둘리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손에 사로 잡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도 마귀의 종으로 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 철저하게 매인 사람이 가장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항복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매임으로 거짓 자유에 질식되지 않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어떤 조건 속에서도 참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33)”

유대인들은 “우리가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자유롭게 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서 즉시 반발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남의 종이었던 적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의 노예, 바벨론의 포로, 페르시아와 헬라 제국의 피지배 민족이었던 적이 있었고, 지금도 로마의 식민지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영혼의 자유를 잃어버린 적은 없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들은 “자유”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34)”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 됩니다. 왜 죄를 범하면 죄의 종이 되는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죄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죄를 종종 채무에 비유하곤 합니다. 우리가 빚을 너무 많이 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어느 순간 우리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지경, 파산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죄를 범한 인간의 상태가 이와 같습니다. 심각하고 무거운 죄를 그것도 반복해서 지었기 때문에 더 이상 죄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죄를 범하는 것을 도저히 멈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죄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수 없다면 이제라도 죄 짓는 것을 멈추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죄짓기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죄가 습관이 되었고 제 2의 천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만 두려 해도 내 스스로 힘으로는 도저히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죄의 노예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종은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35a).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신 목적은 죄의 종인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십니까? 

첫째는 우리 대신하여 죄의 대가를 지불하심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죄의 대가는 저주와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저주 받으시고 죽임 당하셨습니다. 마치 일만 달란트나 되는 어마어마한 죄의 빚을 대신 갚아 주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저주와 무거운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우리에게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죄를 이길 능력이 무엇일까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 안에 거할 때 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말씀 안에 거하면 거룩한 열망이 생겨납니다. 그 열망이 우리 속에서 솟아나는 모든 죄의 소욕을 압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말씀 안에 거하고 있다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그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다 죄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향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자유가 거저 주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노예 해방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일제의 식민 지배를 종식시키기 위해서 우리 조상들 중 많은 독립 투사가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죄로부터 자유 역시 거저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큰 희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시공간에 매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마침내 손발이 묶인 채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셨습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신 가장 위대한 해방자이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37)”

유대인들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맞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닙니다. 첫째 이유는 말씀에 대한 그들에 태도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 볼 때 실수와 허물이 작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특징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단순하게 영접했다는 점입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의 말씀을 영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있을 곳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입니까? 말씀이 들어가지 않자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39)”

그들을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부를 수 없는 둘째 이유는 그들이 행동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처럼 행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일들을 행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돋보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용감하게 롯을 구출해 낸 일일까요?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일일까요? 이런 일도 다 훌륭하지만 성경은 아브라함의 행동 중 순종을 최고로 여깁니다. 아브라함은 “네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말씀에 순종하면서 믿음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하면서 믿음의 최종 관문을 통과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지금 이 자리에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순종은 커녕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이러고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자부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어떤 자부심이 있습니까? 우리도 혈통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뿐 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 예수님의 제자, 성도, 천국 시민이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며 캠퍼스 목자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이런 자부심과 명분을 지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지만 자부심만 남고 실질적인 내용이 사라진다면, 오늘 말씀에 나오는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신 말씀 중에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구나.”라고 하신 말씀이 마음을 저리게 합니다. 예수님의 서글픈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오는 듯 합니다. 예수님의 탄식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습니다. 시인과 촌장이 부른 “가시나무”라는 노래 중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정말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은 것 같습니다. 내 생각, 내 욕망, 내 계획, 내 기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편히 거할 곳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 속에 너무 많은 나를 비우는 작업을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내 속에 들어와 거하실 자리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다시 죄에게 끌려 다니는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생명의 터전입니다. 우리가 내 안을 비워 주님의 말씀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단순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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