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세상의 빛

이창무 2021. 6. 21.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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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13 강 / 이창무

세상의 빛

말씀 / 요한복음 9:1-7
요절 / 요한복음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역사상 가장 많은 판매고를 기록한 가스펠 앨범이 무엇일까요? 바로 아레사 프랭클린이라는 가수가 부른 “Amazing Grace” 앨범입니다. 존 뉴턴이 작사한 이 노래의 가사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Was blind, but now I see(한 때는 눈이 멀었지만 이젠 볼 수 있게 되었네)” 이 고백이 만약 존 뉴턴만의 고백이었을까요? 그렇다면 이 노래가 그렇게 널리 불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한 때 눈이 멀었지만 이제는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고백의 원조에 해당하는 요한복음 9장 말씀을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1)”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였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말들을 서로 주고 받으며 걷고 있었습니다. “와! 이 빨간 장미꽃 좀 봐. 세상에 이렇게 예쁠 수가 있나?” “하늘을 좀 봐.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한 폭의 그림 같지 않아?” 이때 예수님께서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셨습니다. 거기에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빛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장미꽃이 얼마나 빨간 지, 하늘이 얼마나 푸른 지 알 수 없었습니다. 엄마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자기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습니다. 그의 삶 전부는 온통 컴컴한 어둠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런 맹인에게 무슨 희망이나 미래가 있었겠습니까? 그는 마치 고통을 받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 앞에서 조금 전까지 희희낙락했던 제자들의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맹인이 처한 암담한 현실을 목격한 제자들은 심각한 철학적 신학적 고민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2)”

당시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에게 질병이나 장애가 생긴 것은 모두 죄 때문이다’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맹인의 경우는 자기 죄 때문이라고 말하기 곤란했습니다. 왜냐하면 날 때부터 맹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어머니 태 속에 있을 때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가르치는 랍비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태아가 죄를 지어봐야 무슨 죄를 얼마나 지을 수 있겠습니까? 기껏해야 입덧을 유발시켜서 엄마를 힘들게 한 죄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부모의 죄 때문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 맹인 입장에서는 너무나 억울한 일입니다. 왜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에 대한 징벌을 다 뒤집어써야 합니까? 왜 나만 이런 죄 많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야 했는지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흑암 속에 있는 맹인을 본 제자들은 혼돈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죄가 고난과 연결된다고 생각한 것은 단지 유대인들만의 사고방식은 아니기에, 우리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무슨 고난이 닥치든지, 좋지 않은 일이 특별한 이유 없이 일어나게 될 때 우리의 사고가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그런 방식입니다. ‘뭘 잘못했길래?’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분은 무슨 안 좋은 일만 생기면 자기 죄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분은 결혼 전에 낙태를 한 적이 있는데 하나님이 이를 벌하시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고가 성경적일까요? 성경은 고난이 죄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찾아온 것이라는 대전제에 긍정적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는 어떤 질병도 장애도 죽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질병과 장애와 죽음이 함께 들어왔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암에 걸리기도 하고 세월호 같은 비극적인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몸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병 들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와 같다고 합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삶의 불행과 고통은 죄가 얼마나 치명적이고 무섭고 파괴적인가, 우리가 죄 때문에 낙원을 잃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하지만 이 일반적인 원리를 각 개인의 삶에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

예수님은 먼저 이 사람의 죄도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라고 부정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불행이 죄의 결과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인간을 질병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징계하시는 사례들을 종종 보여줍니다. 웃시야 왕은 인생 말년에 몹시 교만해져서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분향을 직접 하려는 월권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웃시야를 치셔서 나병에 걸리게 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침상 채 들려 온 중풍병자 역시 예수님께서 그에게 먼저 죄사함을 선포하신 것을 볼 때 죄가 원인이 되어 중풍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면 ‘모든 질병이나 인간적인 불행이 다 누군가의 특정한 죄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욥의 사례가 있습니다. 욥은 기왓장으로 온 몸을 득득 긁어 댈 정도 지독한 피부병으로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이때 욥의 세 친구들이 와서 네가 죄가 있어서 이런 병에 걸렸으니 빨리 네 죄를 이실직고하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 친구들에게 너희가 틀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욥에게 고난의 이유를 설명해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끝내 이 사람이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이유를 제자들에게 속 시원하게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원인과 이유를 알고 싶어 합니다. 확실한 답을 모르면 너무 답답합니다. 도무지 풀리지 않는 의문 때문에 머리 속이 혼란해지기도 합니다. 과거의 사건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하다 한 걸음도 미래로 향해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의 원인과 이유를 전부 파악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꼭 답을 알아야만 제대로 살 수 있을까요? 세상에는 우리가 아무리 묻고 또 물어도 그 답을 알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왜 죄 없는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가?’입니다. 이는 욥이 던진 질문입니다. 또한 우리도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욥에게 ‘네가 어떻게 창조주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하려 하느냐?’ 역으로 질문하셨습니다. 우리는 창조주가 하시는 일을 다 헤아릴 수 없는 한계를 지닌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다 이해하고 납득할 수 없을지라도 계속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것입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라는 저명한 기독교 윤리학자가 있습니다. 그가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랑하던 아내가 조현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는 날마다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야 했습니다. 연구를 하면서 동시에 아내를 간호하고 아들을 거의 혼자서 키우다시피 했습니다. 24년 동안 아내의 온갖 폭언과 기행을 참아 주었지만 결국 아내는 집을 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아내는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풀러 신학교의 한 강연에서 이런 자신의 삶을 담담히 말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저는 기독교 신자입니다. 사람들은 제가 이런 질문에 답변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전 이런 질문에 뭐라 답변해야 좋을지 전혀 모릅니다. 제가 기독교 신학자로 살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우리가 이런 질문에 답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 정도가 될 것입니다...... 정답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기독교를 설명으로 폄하시킬 뿐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답이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답이 없이 사는 방법을 배우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정말 훌륭한 일이 될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답을 모른 채 계속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너무 쉽게 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저의 주장이 최소한 제가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제 인생이 왜 무진장 흥미로운지를 설명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답을 주시는 대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통해서 뭔가를 하시려고 하신다는 것, 즉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방향을 전환하여 먼저 목적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은 이 사람이 날 때부터 소경으로 난 것이 결코 우연히 일어난 일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단 한 가지도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난 일은 없다’라는 말을 들으실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어떤 사람은 우리가 하나님의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라는 말이냐며 반발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선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에 생긴 오해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난 일이 없다’는 것은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 줍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일을 겪거나 불행한 사건을 만나게 되면 이게 다 누군가의 죄 때문이거나 또는 재수가 없어서 생긴 일이라고 단정하곤 합니다. 나는 왜 이런 운명의 굴레에 사로 잡혀 벗어날 수 없는가를 슬퍼하며 탄식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모습, 어떤 환경 속에서 태어났든 아무 목적도 없이 그냥 내던져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고귀한 목적을 부여받고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약 어떤 일이 누군가의 죄 때문에 일어난 것이 명백하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죄를 회개하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 선한 일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앞서 언급했던 중풍병자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 사람의 죄 때문에 일어난 병이었다 하더라도, 그 병을 통해서 그는 예수님에게 죄를 용서할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데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병이 나아야만 선한 일을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그가 육체의 가시라고 부른 질병을 치유해 달라고 세 번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병을 고쳐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고질적인 질병을 통해서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주님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현재의 고난이 누구의 죄 때문이어도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어도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이 사라진다 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된다 해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누구 때문에?”가 아닙니다.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가?”입니다. 우리가 이런 관점에서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고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일들 속에 휘말려 흑암과 혼돈에 빠질 일은 없게 될 것입니다. 그 어떤 일도 우리 마음에서 평안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두신 선하신 뜻과 계획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시간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관점을 새롭게 해 주십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4)”

요한복음에서 밤이라는 단어는 자주 영적인 의미로 쓰입니다. 여기서 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지나 승천하심으로써 육신으로는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을 때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면서 의도적으로 단수 대명사와 복수 대명사를 동시에 사용하고 계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나와 우리를 묘하게 섞어서 쓰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제자들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하나로 묶어줄 뿐 아니라, 제자들이 감당해야만 하는 일이 피할 수 없는 일임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 예수님은 이점을 더욱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님의 경우에는, 승천하시기 전에, 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께서 맡기신 모든 일들을 다 이루셔야 합니다. 그 시간은 무한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주님과 더불어 함께 지낼 때 그들이 해야 할 일들이 분명합니다. 그 시간은 곧 끝날 것입니다. 이것이 조금 더 확대 적용해 본다면, 밤은 죽음 이후를 의미하여 낮은 사람이 밤이 오기 전까지 살아있는 때를 의미합니다. 시간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인생의 시간을 똑같이 주지 않으십니다. 아주 짧은 시간만 주어진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에 비해 긴 시간이 주어진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그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83.3세라는 평균 연령은 그저 평균일 뿐 나에게 인생의 밤이 당장 내일 올 수도 50년 후에 올 수도 있습니다.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언제인가 밤은 온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밤이 언제 오겠나?” 하면서 전혀 그 날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늘 낮이 계속될 것처럼, 영원을 살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인생에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무한정 주어진 것이 아니라 끝나는 시점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십니다. 그리고 그 때를 준비하고 있느냐 물으십니다. 그 준비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에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그리 넉넉하게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다음에 하겠습니다. 언젠가는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 다음이나 언젠가는 우리 손에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측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습니다. 다음 기회가 오기 전에 인생의 밤이 먼저 찾아온다면 어떻게 합니까? 얼마나 후회스럽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이 우리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바로 “지금부터”가 하나님의 일을 시작할 때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5)”

예수님은 세상에 자신의 빛을 비추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지금은 누가 빛을 비추어야 하겠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 세상에 예수님의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6월 한 달 동안 인생 소감 페스티벌을 통해 선교사님들의 인생 소감을 나누고 있습니다. 한 선교사님이 전도가 법으로 금지되자 매일 시내 곳곳을 다니며 명함 크기의 전도지를 붙이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며 큰 감동으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며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리라는 결심으로 척박한 환경에서 씨를 뿌리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분들을 통해 어두운 세상 구석구석에 세상의 빛 예수님이 증거되고 있습니다. 먼 곳에 나가지 못한다 해도 우리가 있는 지금 이곳에서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일대일 성경 공부로, 또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로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6-7)”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 자신이 세상의 빛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신 과정이 정말 독특합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말씀 한 마디로 기껏해야 안수해 주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방법은 유별납니다. 과정이 복잡하고 어찌 보면 참 비위생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행동에서 연상되는 장면이 있지 않습니까? 바로 창세기 2장,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진흙을 반죽하여 사람의 모습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지금 예수님 역시 진흙을 반죽하시고, 그것으로 새로운 두 눈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상징하는 실로암 못 가에 가서 눈을 씻도록 하십니다. 처음 인간 창조의 과정을 그대로 재현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죄로 인해 망가진 세상을 재창조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때 맹인은 물론 예수님의 명령에 담긴 이 심오한 뜻을 다 알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맹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곧이곧대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 순종이 그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실로암 못에 비춰진 자기 얼굴을 보았습니다. 하늘은 얼마나 푸르고, 장미꽃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흑암과 혼돈 속에 잠겼던 이 세상에 “빛이 있으라”라는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광명이 찾아왔듯이, 태초부터 계셨던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에게도 광명이 찾아온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그가 왜 맹인이 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새 창조를 이루시는 메시아를 만났음을 압니다. 또한 세상에 빛이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위대한 삶을 살았음을 압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선한 일, 하나님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오라 명령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영적인 눈을 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영광을 세상에 비추는 빛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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