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정죄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이창무 2021. 6. 7.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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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11 강

정죄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말씀 / 요한복음 7:53-8:11

요절 / 요한복음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우리가 잘 아는 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은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의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출옥하자마자 그는 한 신부에게서 은 촛대를 훔쳤습니다. 그런데 신부는 그의 죄를 용서하고 은 그릇까지 선물로 안겨주었습니다. 이후 장발장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삶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하고 희생하는 삶을 삽니다. 만약 신부의 용서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장발장은 일생 동안 감옥을 들락거리는 비참한 좀도둑의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반면 또 다른 주요 인물인 “자베르” 경감은 죄를 지으면 감옥에 가야 하며, 그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믿는 원칙주의자입니다. 그의 사전에는 용서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가두기 위해 끝까지 장발장의 뒤를 추적합니다. 결국 자베르는 생의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소설의 장발장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베르 경감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다면 장발장의 죄를 용서하고 그로 하여금 새로운 인생을 살게 만든 신부는 누구를 가리키고 있을까요?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7:53-8:1)”

해가 저물자 모두 다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숙소로 가지 않으시고 감람 산으로 가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예수님은 다시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다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늘 있었던 평범한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너무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여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시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럴 때 공개적인 행보를 한다는 것은 원수들의 입에 스스로 머리를 들이미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리도 담대하실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은 밤 사이 계셨던 감람 산이라는 장소에 숨겨져 있습니다. 감람 산에는 우리가 잘 아는 겟세마네 동산이 있습니다. 이곳은 예수님이 습관적으로 찾아가 기도하시던 처소였습니다. 예수님은 밤 동안 간절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확인하시고, 하나님의 때를 물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들으셨습니다. 마침내 기도를 통해 아직은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해칠 수 없다는 확신을 얻으셨습니다. 간절하고 진실한 기도는 예수님의 마음을 지켜 주고, 언제나 새 힘과 용기를 주는 원천이었습니다.

성전 앞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무르익어 갈 즈음에 돌발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고 왔습니다(3). 가운데 세우고는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4-5)”

신명기 22장에 따르면 간음한 남녀는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나라는 2015년 2월 26일 헌법 재판소에 의해 형법 상의 간통죄에 대한 위헌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간음을 저질렀다고 해서 형사적인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하물며 사형이라니요? 간음에 대한 율법은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둘이 서로 좋아서 한 일이 어떻게 범죄가 될 수 있느냐고 되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지독한 개인주의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그들은 둘이 좋아서 저지른 그 일이 다른 사람과 공동체에 얼마나 큰 파장을 낳는지는 생각해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간음은 배우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배신감을 남깁니다. 이로 인해 가정이 깨어지게 되면 결국 자녀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됩니다. 성적인 범죄에 의해 가정이 허물어 지면 사회도 그 기초부터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은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가정을 온전히 보호하기 위해서 간음을 엄벌에 처하도록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본문 속 종교지도자들이 과연 율법에 담긴 뜻을 받들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요? 요한은 이들의 질문 속에 담긴 진짜 의도를 이렇게 알려 줍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님을 시험함이러라(6a)”

왜 이 질문이 예수님께 시험이 되었을까요? 만약 예수님께서 “돌로 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세의 율법을 어겨도 된다고 선동하신 셈이 됩니다. 율법 파괴자로 종교 재판에 회부될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만약 “돌로 치라” 말씀하시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은 항상 약자 편에 서서 긍휼과 자비를 설파하시던 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로마의 사법권을 침해하도록 백성들을 선동한 죄목으로 고발을 당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참,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습니다. 진퇴양난, 사면초가의 상황입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성 윤리에 관해서 비슷한 질문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동성애 논란입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묻습니다. “동성애가 죄입니까? 아닙니까?” “분명히 죄입니다”라고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곧바로 젠더 감수성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종교라는 기독교가 이런 식으로 사람을 차별하면 되겠느냐?”는 뭇매를 맞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 문제 아닙니다. 괜찮습니다.”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인정하고 칭찬해 줄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세상에 아부하려고 한다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기독교 내부에서 갈등만 증폭될 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은혜가 없다고 하고, 저렇게 말하면 진리가 없다고 하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참 난감합니다. 그렇다면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대응하셨을까 살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6a)”

예수님은 대답 대신 손가락을 연필 삼아 땅에다 무언가를 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무엇을 쓰셨는지에 관해서는 역사상 수많은 가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왜 쓰셨는지는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군중들의 격앙된 분위기를 차분하게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였을 것입니다. 아울러 여인에게 집중되고 있던 관심은 자신에게 돌리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이를 시간을 끌려는 꼼수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더욱 거세게 추궁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7)”

예수님은 분명히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절대 죄를 그냥 눈감아 주자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인의 죄는 돌로 쳐 죽임을 당해도 마땅한 죄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붙어 있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말씀이 형을 집행하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해야 한다는 의미일까요? 그렇다면 경찰관들부터 다 해고해야 합니다. 검사들도 모두 사표를 써야 하고 판사들부터 모두 다 법복을 벗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사회의 사법 체계는 근간부터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공적인 법집행에 대해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뜻으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심판의 돌을 들기에 앞서 먼저 자기 성찰을 하도록 요구하신 것입니다. “나는 죄가 없을까? 나는 저 여인보다 더 의인인가? 나는 이 여인을 돌로 칠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예수님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잠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습니다. 그 시간 동안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오고 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저질렀던 간음죄가 생각났습니다. 여인과의 차이점은 들켰느냐 들키지 않았느냐 차이 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 속으로 이미 수십 번도 넘게 간음을 저지른 것이 생각났습니다. 여인과의 차이점은 행동으로 옮겨느냐 그렇지 않느냐 차이 밖에 없었습니다. 간음의 죄가 아니더라도 거짓말, 도둑질 등의 죄들을 저질렀던 지난 과거가 주마등처럼 쭉 흘러갔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돌을 들었던 그들의 손에서 힘이 풀렸습니다. 여기저기서 툭툭 돌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9)”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버렸습니다. 왜 어른부터 먼저 나갔을까요? 지은 죄가 더 많아서 일까요? 아니면 양심이 더 예민해서 일까요? 아무튼 그들 중에 양심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을 비추어 볼 때 죄 없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아무도 남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킨 것입니다. 어떤 변화일까요? 이 말씀을 듣고 나서야 사람들은 여인의 죄 안에 자신의 죄가 있음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내 안에도 여인의 죄가 이미 들어와 있었다는 것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여인은 남이고 타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인 속에 내가 있고, 내 안에도 저 여인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직 내 차례가 아닐 뿐, 여인이 있는 저 자리는 언젠가는 내가 가야 할 자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여인이 지금 느끼고 온갖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가 고스란히 전달이 되었습니다. 군중 속에 숨어 약자를 단도질하고 있는 비겁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사람들은 너와 나 사이에 흑과 백, 선과 악을 무 자르듯이 나눌 수 없다는 사실, 우리 모두는 다 똑 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보았을 때 우리는 어떤 태도와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이때 대부분 사람들은 그 한 사람을 비난함으로써 “나는 너와 다르다. 나는 너보다 더 낫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도덕적 우월감 또는 신앙적 우월감을 더 강화시킬 수 있는 기회로 삼으려고 합니다. 특히 많은 사람과 함께 할 때 이런 비난과 비판의 강도는 더 강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대일로 만나서는 감히 말 한 마디 못하다 가도 여럿이 몰려 들어 같이 물어 뜯을 때가 많습니다. 어차피 책임이 1/n로 분산이 되기 때문에 별로 부담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례를 숱하게 많이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날에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누군가 사람들을 선동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대중은 이에 부응하여 너도 나도 앞다투어 비난의 화살을 마구 쏟아 붓습니다. “길 가다가 내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라. 너는 사형이 답이다.” 네이버 댓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말들입니다. 성난 대중에 의해서 한 사람이 완전히 매장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사실 관계는 무시되기 일쑤입니다. 그 한 사람이 다 털리고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돌팔매질은 멈춥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먹이감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인 일들입니까? 내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한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더 의로워질 수 있습니까? 의롭게 살고 의롭게 행동해야 의로워지는 것이지 남을 비판한다고 해서 내가 의로워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비난하면 그 사람의 행동이 달라지고 바뀔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개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으면 사람은 방어하기에 급급해 집니다. 죄를 인정하기보다는 “너나 잘 하세요” 하면서 반격을 가합니다. 때로는 “어차피 버린 몸이니 이제부터는 마음대로 살겠다” 면서 더 막 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얻는 것은 나는 너보다 너 나은 사람이라는 얄팍한 우월감, 이것 하나 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나를 의롭게 하지도 못하고 남을 의롭게 만들 수도 없는 비난과 정죄를 왜 계속하려 합니까? 이건 너무 미련한 짓입니다. 타인의 허물이 내 눈에 띄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발견하라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먼저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는 계기로 삼아야 하지 곧바로 남의 눈 속의 티끌을 빼자고 덤벼들 일이 아닙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잘나고 의로운 사람들이 모인 곳이 결코 아닙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우리가 이곳에 서로 지적하고 비판하고 정죄하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만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모였습니다. 우리가 내 자신이 늘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지체들에 대해서는 관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10a)”

땅에 무언가를 쓰시던 예수님이 한참 후에 고개를 들어 보니 기세등등하던 이들이 모두 떠나고 없었습니다. 여인을 보니 여전히 두려워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물으셨습니다(10b). 여인은 고개를 들고 주위를 돌아본 후 대답했습니다. “주여 없나이다(11a)” 그제서야 여인은 한 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인을 정죄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신 유일한 분, 죄 없으신 예수님이 그녀 앞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긴장 가운데 숨 죽인 여인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1b)”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너무 빨리 은혜 받으려고 하면 곤란합니다. 이 말씀을 한 번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어떤 재판관이 범죄 정황이 너무나 뚜렷하고 법에도 엄중 처벌하도록 명시된 죄인에게 이렇게 선고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당장 석방시켜 주겠다.” 사람들은 이 판결의 정당성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정의는 어떻게 실현할 것이냐고 당장 따져 물을 것입니다. 똑같은 질문을 예수님을 던질 수 있습니다.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만 하시면 끝인가요? 율법에 명시된 죄에 대한 심판과 형벌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왜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이 여인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몇 달 후 유월절이 돌아오면 예수님은 여인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재판석에 앉아 아래를 내려 보며 판결을 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율법의 저주를 한 몸에 다 받으시는 그 고난과 희생 가운데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인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정죄함으로부터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자유를 누리려면 한 가지가 더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을 볼 때 여인의 간음은 충동적인 실수가 아니라 습관적인 죄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정죄로부터 벗어나되 반복적으로 죄를 범하던 삶에서도 떠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거룩함의 열매를 맺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이런 방향 설정이 너무 무리한 것입니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말할 수 없는 큰 용서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용서를 알고 감사하는 사람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어떤 연약한 사람도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오늘 말씀에서 보면 예수님은 율법의 역할과 정당성을 단 한 번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율법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만약 율법이 없다면 죄가 죄인 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율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죄 문제 자체를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율법 아래 있으면 일평생 죄책감과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또한 아무리 율법이 엄격하고 철저하다 해도 사람이 죄 범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지 못합니다. 법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법이 있어도 지킬 수 없는 인간의 죄성이 문제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법 체계는 오래 시간 동안 크게 발전해 왔지만, 여전히 죄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법이 만능이 될 수 없습니다. 마치 자베르 경감이 꼼꼼히 법을 집행할수록 장발장의 인생은 점점 더 나락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해법은 딱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오로지 복음 뿐입니다. 죄 문제는 정죄가 아니라 십자가 대속을 통한 용서함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의 복음 뿐입니다. 장발장도 신부의 용서와 관용을 통해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지 않았습니까? 처벌과 감시가 강력한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일에 있어서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기도가 호흡이고 말씀이 양식이라면 용서는 우리 몸의 피와 같습니다. 용서의 피가 흐르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용서의 피가 흐르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며 거룩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인내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으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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