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내 안에 거하라

이창무 2021. 9. 5.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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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20 강 / 이창무

내 안에 거하라

말씀 / 요한복음 15:1-8
요절 /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퀴즈를 한번 내보겠습니다. ‘GOOD’이라는 글자에서 ‘GOD’를 빼면 무엇이 남을까요? 답은 ‘O’만 남는다 입니다. 즉 하나님이 빠지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O’에 ‘GOD’이 들어가면 무엇이 될까요? ‘GOOD’이 됩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제로(Zero)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나쁜 열매만 남은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좋은 열매, 선한 열매를 맺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오늘 말씀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서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침 지금이 포도농장에서 포도를 한창 수확하는 시기라고 합니다. 캠벨포도, 머루포도, 거봉포도, 청포도, 샤인머스캣 등등 다양한 품종의 포도들이 시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번 가을 우리가 달고 맛있는 포도 열매를 먹으면서 예수님 안에서 열매 맺는 삶에 대해 묵상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1)”

요한복음에는 ‘나는 무엇이다’라는 예수님의 선포가 일곱 번 나옵니다. 그 중에 마지막 일곱 번째가 바로 ‘나는 참포도나무이다’라는 선포입니다. 포도나무 하면 무엇이 연상되십니까? 어떤 분은 가을을 떠올리기도 하고 어떤 분은 포도나무 열매로 담그는 포도주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포도나무는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였습니다. 시편 80편 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심으신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에게서 열매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들이 자라서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하나님이 기대하신 열매를 전혀 맺지 못하고 들포도만 맺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포도나무로서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새 이스라엘, 참 이스라엘로 오셨습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만회하시고,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는 나무입니다.

“농심”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라면 매출 1위 신라면이 떠오르십니까? 그런데 농심이란 본래 농부의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농부들의 한결 같은 마음이 무엇일까요? 좋은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농부는 봄부터 씨를 뿌립니다. 뜨거운 여름 태양 아래서 잡초를 뽑고 거름을 줍니다. 새벽부터 부지런히 일어나서 작물에 물을 공급해 줍니다. 가을에 열매가 맺히는 그 날까지 오래 참고 기다립니다. 이런 농부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으신 최고의 피조물인 사람에게서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열매를 원하셨으면 실패한 인간을 대신해 아들을 사람이 되게 하셔서 참포도나무로 이 땅 가운데 보내셨겠습니까? 이 정도로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열매 맺는 것에 큰 열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지금도 부지런히 우리 가운데 말씀의 씨를 뿌리시고, 성령의 생수를 공급해 주시고, 죄악된 본성로부터 자라난 잡초를 부지런히 제거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 삶에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그것은 결코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닙니다. 우리 자체 안에 무슨 엄청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농부이신 하나님이 아무 쓸모 없는 가지였던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우리를 접붙여 주시고, 그 안에서 열매 맺도록 열심을 내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지입니다. 가지가 어떠한가에 따라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맺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 중에는 두 가지 종류의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가지에 따라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도 다릅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2)”

첫째는 예수님께 붙어 있기는 하지만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입니다. 이런 가지는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과 연합을 이루지 못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 곁에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가 없는 사람입니다.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떠한 좋은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다 하더라도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는 결국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경고하신 바 있습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이렇게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를 제거하십니다. 이는 곧 그 사람에게 임할 심판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예수님 안에서 열매 맺는 가지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연합하고 친교를 맺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열 두 제자 중 가룟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이 이런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바로 열매 맺는 가지입니다. 이들이 맺게 될 열매가 무엇일까요? 열매라고 하면 우리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렇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곧 성품과 인격의 변화입니다. 또한 착함과 진실과 의로움으로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 열매입니다. 더 나아가 복음 전파를 통해 구원을 받게 된 사람들이 열매입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이런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이 더 많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또한 열매 없는 사람이 되지 않고, 좋은 열매 맺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을까요?

첫째, 말씀으로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3)”

여기서 깨끗하게 한다는 말은 포도나무 줄기에서 잔가지들을 쳐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자어로 전정 작업이라고도 합니다. 포도 농사에서 가지치기가 정말 중요하다고 합니다. 잔가지를 쳐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도 열매가 맺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농부의 기대와는 거리가 먼 자잘하고 열매, 단맛이 없고 시큼한 열매만 맺히게 됩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잔가지를 반드시 쳐내야만 합니다. 막상 쳐내자 하니 아깝기도 하고 아픔이 있더라도 잘라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엇으로 깨끗하게 하실까요? 인생의 시련을 통해서 깨끗하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큰 은혜를 경험한 후 신앙이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보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열매 맺기 위해서는 말씀의 가위로 우리 마음 속에서 자라고 있던 잔가지를 잘라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아프지만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 안에 인격의 변화, 성품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매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있습니다. 왜 말씀을 듣고 배웁니까? “말씀에서 위로를 받고 싶어서” 일까요? “말씀에서 지혜를 얻고 싶어서” 일까요? 다 좋습니다. 훌륭한 동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볼 때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하는 중요한 동기는 “깨끗해지기 위해서” 입니다. 내 마음 속에 생긴 잔가지들을 베어내고 잘라내기 위해서입니다. 지당한 말씀인데, 이 말이 점점 더 낯설게 느껴지는지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울러 이 말은 오랜 세월 동안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 줍니다. 듣기는 하지만 열매 맺지 못하는 이유는 말씀을 즐기려 할 뿐 말씀으로 내 마음을 베어내지 않으려 했기 때문 아닐까요? 말씀으로 깨끗해지기 보다는 계속 잔가지만 뻗어 나갔기 때문 아닐까요?

코로나 이후 비대면 온라인 예배가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제 유튜브로 말씀을 듣는 것이 낯설지 않습니다. 유튜브 영상은 무조건 짧고 재미 있고 속도감이 있어야 조회수가 많다고 합니다. 말씀이 이런 유튜브의 콘텐츠와 동일 선상에서 비교되고 여러 선택지 중에 하나로 취급 받을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이것이 말씀 앞에서 회개와 순종이라는 반응을 현저하게 약화시키지 않을까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림이 있어야 회개와 순종의 반응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회개와 순종이 있어야 인격의 변화, 성품의 변화가 뒤따르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온라인으로 말씀을 듣고 배운다 할지라도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나아가는 자세를 잃지 않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잔가지들을 베어내어 풍성하게 열매 맺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4)”

예수님이 포도나무시라면 제자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입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뿌리로부터 흡수한 수분과 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가지가 계속 살아 있을 수 있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만약 가지가 “내가 왜 꼭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느냐? 나는 자유인이다. 더 이상 나무에 얽매이기 싫다.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 이렇게 외치며 나무로부터 독립 선언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처음 얼마 동안은 멀쩡해 보일 것입니다. “거 봐라. 내가 뭐라고 했느냐”면서 가지는 의기양양할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후 수분이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가지는 서서히 마르기 시작합니다. 결국 바짝 말라 죽은 가지가 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가지를 주워서 바비큐 파티에 불쏘시개감으로 쓰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열매 맺기 위해서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과 연합하고 친교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연합과 친교라는 단어가 가진 뉘앙스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의 느낌을 충분히 전달해 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연합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저는 국제 연합 UN이 떠오릅니다. UN은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가 가입이 되어 있고 수많은 산하 기구들을 거느리고 있는 거대한 국제 기구입니다. 겉으로 보면 참 막강한 힘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흔히 하곤 합니다. “UN에서는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 왜냐하면 국가 간의 결속이 느슨하기 때문에 UN의 결정에 큰 강제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UN에 붙어 있지 않는다고 해서 곧장 나라가 망하지는 않습니다. 친교는 또 어떻습니까? 친교하면 사교 클럽이나 동아리가 떠오릅니다. 이런 곳에서 활동을 하면 여러 유익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살고 죽는 문제는 아닙니다. 흔히 생각하는 연합과 친교는 옵션이지 필수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연합과 친교는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열매를 맺느냐 맺지 못하느냐 문제와 함께 우리가 영적으로 살고 죽는 것이 달린 문제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5)”

정말 예수님을 떠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까? 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들도 무언가를 열심히 하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은 좋은 열매 맺는 일에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하늘에 속한 일,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일을 할 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무를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살 수 있는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길 이외에 열매 맺을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을 누리기 위해 예수님 앞에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나에게 나오는 것들이 다 죄의 열매들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 없이 살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나오고 예배 드리고 있다고 해서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의 전적인 무능력을 깨닫고 예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지난 8월 23일 아프가니스탄 카불 공항에서 우리 나라 공군이 한국에 협력해 온 현지인 390명을 한국으로 실어오는 일명 미라클 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했습니다. 얼마 뒤 카불 공항을 노린 IS의 자살 폭탄 테러와 로켓포 공격이 있었습니다. 하루 이틀만 늦었더라도 안전을 담보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C-130J 공군 수송기 안에 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아프간인들에게는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하는 갈림길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오늘 말씀 중에 6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우리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홍수 가운데 떠오른 노아의 방주이십니다. 카불 공항에 내린 C-130J 공군 수송기입니다.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그분 안에 거하기만 하면 우리는 열매 맺는 풍성한 삶을 살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나님 나라로 인도함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사는 길, 열매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셋째, 말씀을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도할 때 열매 맺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기도 제목을 이룰 수 있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자연스럽게 우리 마음의 열망이 하나님의 관심사와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응답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나 100% 응답 받을 수 있는 기도 제목이 무엇인지 답이 나옵니다.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해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 예수님과 연합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 예수님과 친밀하고 인격적인 교제를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다 응답해 주십니다. 이외에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 맺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하면 농부이신 하나님은 기꺼이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만약 열매 맺는 일이 전적으로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시는 일이라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친히 가르쳐 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또 이렇게 기도를 명령하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말씀에 반응하고 대답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말씀의 뜻이 선명해집니다. 기도를 통해 그 말씀을 적용하고 실천할 힘을 얻게 됩니다. 말씀과 기도는 우리가 열매 맺는 사람이 되는 일에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이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과 기도로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될까요?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8)”

말씀 안에 거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이런 사람은 열매를 맺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저절로 열매를 풍성히 맺게 됩니다. 상큼한 포도향기처럼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게 됩니다. 포도주처럼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됩니다. 그 결과로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제자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성품과 인격에 감동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표현하신 바 있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그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은 열매를 통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열매 맺기 전까지는 제자가 아니었다가 열매 맺은 후에야 제자가 된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열매를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임이 입증된다는 뜻입니다. 지난 금요일 금요기도회에서 제가 “진실의 순간”이라는 제목으로 5분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다 드러나는 진실의 순간이 있습니다. 아무리 회피해도 언젠가 진실의 순간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열매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에게 진실의 순간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좋은 열매가 맺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지금까지 내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가?” 총체적으로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는 그날까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내 안에 빛의 열매와 착한 행실이 있는가? 내 안에 예수님의 사랑이 열매로 나타나고 있는가?”

만약 얼굴이 창백하고 피골이 상접한 사람이 건강 식품을 팔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아무도 그 약의 효능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열매를 통해서 예수님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예수님을 전하면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만이 나타낼 수 있는 열매가 있어야 그가 전하는 예수님을 사람들이 귀담아 듣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열매를 많이 맺어 예수님의 참 제자로 인정 받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말씀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예수님 안에 거하며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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