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

이창무 2021. 9. 27. 19:27
반응형

2021년 요한복음 제 23 강 / 이창무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

말씀 / 요한복음 18:1-27
요절 / 요한복음 18: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천만영화 ‘택시운전사’ 속에서 최고의 1분으로 꼽히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트렁크 검문 신(Scene)입니다. 광주의 참상을 세상에 알리려고 샛길로 달아나던 독일 기자 피터와 서울 택시기사 만섭은 군인들의 검문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현장에 있던 박 중사는 트렁크에 숨겨진 서울택시 번호판을 발견하지만 모르는 척하며 보내줍니다. 만약 그냥 보내준 것을 상관들이 알게 되면 박중사가 큰 봉변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작가가 지어낸 허구처럼 보이지만, 놀랍게도 실화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18장부터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대적들의 발걸음도 빨라집니다.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던져 제자들을 보호하고자 하십니다. 이 와중에 허둥지둥 좌충우돌하는 베드로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나를 알게 되고 그래서 우리의 정체성을 재정립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17장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마치신 후였습니다(1).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에 있는 한 동산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이 동산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 근처에 올 때마다 종종 수양회를 가지던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을 팔아 넘긴 가룟 유다도 이곳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2). 역시나 유다는 이곳으로 예수님을 잡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왔습니다(3). 여기서 군대는 적게는 이백 명에서 많게는 육백 명 정도 되는 로마의 보병 중대를 가리킵니다. 이것으로 부족했는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까지 함께 왔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등과 횃불과 무기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병력의 규모나 무장을 보면 거의 전쟁 수준입니다. 겨우 예수님 한 사람을 체포하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 상황을 보면 그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많은 이적을 행하셨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과 무리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똘똘 뭉쳐 저항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를 제압하려면 압도적인 병력과 무기에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물리적인 힘으로 굴종을 강요하는 것, 이것이 세상이 문제를 해결하는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그러면 이들에 대해 예수님은 어떤 식으로 대응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모든 상황을 예견하고 계셨습니다(4). 유다도 아는 곳으로 오신 것을 볼 때, 예견하셨을 뿐 아니라 사실상 자초하신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당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먼저 나서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하자,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그들이 찾는 예수라고 밝히셨습니다(5). 이때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실 때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습니다(6).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자세한 정황을 알 길은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권능 앞에서, 스스로 계신 분이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세상의 권력이 굴복하는 현상이 순간적으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상황을 이용해서 얼마든지 빠져나갈 기회를 만드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방금 전 대화를 똑같이 반복하셨습니다(7). 그리고 한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8)”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예수님은 자신을 체포하는 대신에 제자들은 풀어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9)”

바로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 드리셨던 그 기도를 자신이 직접 실천에 옮기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일시에 사람들을 땅에 엎드러지게 할 정도의 엄청난 신적 권능을 가지신 분이시지만, 그것을 결코 자신을 위해 쓰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제자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는 일에 사용하셨습니다. 대적들에게 먼저 자기 자신을 먹이감으로 던져 주심으로 제자들을 그들에게서 보호하고자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예수님의 이 선언은 말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던져 삶으로 이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리 떼 같은 로마 군대와 종교 지도자들이 보낸 사람들이 오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양들을 버리고 달아나지 않고 양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지체 높은 사람들에게 스캔들이 터졌을 때, 그들이 이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오랫동안 보아왔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부하들이 알아서 한 일이다.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라고 말하며 아랫사람들에게 모든 책임을 다 떠 넘깁니다. 이것을 가리켜 꼬리 자르기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꼬리를 자르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꼬리를 보호하시고 꼬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어 놓으시는 분이십니다. 이후 제자들이 안전하고 자유롭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결박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정신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결박되심으로 우리를 죄의 저주와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들이 죽음에서 풀려나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 십자가 정신에 동참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자녀에게 매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목자가 된다는 것은 양에게 매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엔 매이는 것이 너무 싫어서 결혼도 하지 않고 자녀도 낳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물며 누가 양에 매인 목자가 되려 할까요? 하지만 나의 매임이 누군가의 풀림이 될 수만 있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매임이 없이 어떻게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위에는 과거의 상처에 매인 사람들, 죄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 자기 세계에 갇혀 꽉 막힌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세력들을 향해 예수님은 지금도 “내가 대신 십자가에 묶였으니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손에 잡힌 도구가 되어 그들에게 참된 자유와 해방을 주는 십자가 복음의 전달자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십자가 희생 정신을 당시 제자들은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 베드로가 갑작스럽게 돌발행동을 합니다. 가졌던 칼을 휘둘러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편 귀를 베어버렸습니다(10). 내가 이렇게만 하면, 그 다음 예수님이 나서서 저 못된 무리들을 싹 쓸어버릴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의 용기와 의리를 칭찬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11)”

칼을 휘두른 순간, 베드로는 자신은 예수님을 잡으러 온 저 악한 무리들과는 다른 정의 편에 서 있는 줄 확신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둘이 사실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다 똑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로 결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도리어 세상의 일부로 흡수되는 길입니다. 정말 세상을 이기고 싶다면 칼 대신에 잔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거두는 대신 잔을 취하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이란 고난의 잔, 죽음의 잔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이 잔을 받아 마시고자 하십니다. 조금 전 이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이미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 그래서 예수님은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순순히 체포되어 대제사장 안나스의 관정으로 끌려 갔습니다(12,13). 

이 지점에서 저자인 사도 요한은 안나스의 사위인 가야바가 앞서 11장 59절에서 했던 말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14)” 이 말은 본래 가야바가 정국 안정을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는 편이 좋겠다는 뜻으로 했던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말은 예수님이 마시려 하시는 죽음의 잔에 담긴 깊은 영적 의미를 사전예고한 셈이 되었습니다. 칼은 아무도 구원하지 못합니다. 칼로 흥한 자는 다 칼로 망합니다(마26:52). 고난의 잔, 죽음의 잔, 희생의 잔을 마시는 길만이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을 따르는 길만이 진정한 구원의 길입니다.

지금 우리 손은 무엇을 쥐고 있습니까? 칼을 쥐고 있습니까? 아니면 잔을 쥐고 있습니까? 사실 우리도 종종 베드로처럼 칼을 휘두르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나에게 상처 준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고 그대로 되갚아 주고 싶습니다. 이 세상의 나쁜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어야 사이다처럼 속이 다 시원할 것 같습니다. 칼만큼 그 효과가 즉각적이고 확실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잔을 마시는 것은 고구마를 백 개 먹은 것처럼 답답해 보입니다. 언제까지 참고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괜히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의 칼을 칼집에 꽃아 넣으라고 하십니다. 그 대신 하나님이 주신 잔을 받아 마시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칼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칼로 만든 평화는 거짓 평화입니다.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초강대국 미국이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20년 간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 철수하는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사랑으로 만들어 가는 나라입니다. 희생의 잔, 사랑과 섬김의 잔으로 만들어진 평화가 참된 평화입니다. 정말 칼을 갈고 싶다면 우리가 갈아야 할 칼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말씀의 칼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 영혼의 심장과 폐부를 찔러 쪼갤 정도로 예리하게 날이 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권력의 칼, 돈의 칼, 지식의 칼이 서로 맞부딪치는 칼들의 경연장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칼이 아니라 말씀이 그리고 십자가의 잔이 승리의 길, 생명의 길임을 믿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들 대부분은 예수님이 체포 당하시자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두 명의 제자는 계속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15). 한 사람은 베드로였고, 다른 한 제자는 이름이 나와 있지 않으나 분명 요한이었을 것입니다. 요한은 의외로 인맥이 넓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였습니다. 그 덕에 심문이 열리는 대제사장 관저의 뜰까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문 밖에서 서성이는 모습을 보자 다시 나와서 그를 데리고 들어갔습니다(16). 이때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17)” 이 질문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아니라” 앞서 예수님은 자신을 체포하러 온 수백 명의 군대 앞에서 ‘내가 그리라’고 당당히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는 그저 문 지키는 한 여종 앞에서 ‘나는 아니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칼을 꺼내 휘두르던 베드로의 호기는 도대체 어디로 갔습니까? 겉으로 보면 순순히 끌려 가시는 예수님이 나약하고 소심해 보였습니다. 칼을 꺼내 휘둘렀던 베드로가 용감한 사람 같았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용기는 더 강한 힘과 무기로 더 약한 사람들을 제압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세상이 아무리 위협하고 협박을 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당장 고난이 주어지고 손해이고 위험해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나의 정체성을 지킬 때 영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부인하는 순간 몸은 살아있어도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안전을 얻는 대신 영혼을 잃어버린 베드로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18)”

유월절 무렵 팔레스타인 지역의 밤은 추웠습니다. 사람들이 숯불을 피우고 옹기종기 모여 몸을 녹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그 가운데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이것으로 베드로의 몸은 녹일 수 있었지만 마음의 추위를 녹일 수는 없었습니다. 꿈이 깨진 사람의 무너진 마음, 앞날에 대한 막막함, 사랑하는 스승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등이 뒤섞여 베드로는 마음이 무겁고 복잡했습니다. 이 와중에 함께 불을 쬐던 사람들은 이야기 꽃을 피워가고 있었습니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전세계 한국 드라마가 1위라면서?” “오징어 게임이라고 나는 벌써 다 봤지” 그러나 이 대화 속에 베드로는 도저히 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 옆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이상 그것도 불가능했습니다. 나는 어디에도 낄 수 없는 이방인이자 외톨이가 된 것 같아 너무 비참했습니다. 숯불의 저 붉은 색깔이 마치 수치심과 자괴감을 붉게 달아오른 베드로 자신의 얼굴빛 같아 보였습니다.

한편 같은 시각 대제사장 안나스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있었습니다(19). 그러나 예수님은 안나스의 질문에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재판 자체가 이미 정당성을 잃은 재판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늘 공개적으로 사역을 해오셨는데, 증인이 단 한 명도 없는 재판이라니 이것이 말이 됩니까(20,21)? 게다가 도중에 아랫사람 하나가 예수님을 폭행하기까지 했습니다(22). 이미 재판은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재판 과정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따져 물으셨습니다(23). 너무나 논리적이고 합당한 말이었기에 안나스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사위인 가야바에게 떠 넘기듯이 예수님을 보내 버리고 말았습니다(24).

이후 요한의 카메라는 다시 시몬 베드로를 향합니다. 함께 불을 쬐던 사람이 베드로에게 또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냐 물었습니다(25). 정식 재판은 아니지만 베드로 역시 심문과 추궁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이번에도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 부인했습니다. 세번째는 예수님의 재판과 달리 증인까지 나타났습니다. 베드로에게 귀가 잘린 말고의 친적으로 현장에서 이를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습니다(26). 이제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베드로는 무조건 나는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27). 그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예수님께서 13장 38절에서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셨던 말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예수님이 나를 오해하셨다. 착각하고 계시다”라고 생각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오해하고 착각한 쪽은 예수님이 아니라 베드로 자신이었습니다. 닭 울음 소리는 무지와 착각, 교만과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캄캄한 밤과 같았던 베드로의 영혼을 깨우는 자명종 소리와 같았습니다.

혹시 인생에서 베드로의 숯불과 닭 울음 소리를 경험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이 세상 가운데 특별한 부르심을 입어 예수님의 제자요 양들의 목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내 스스로 이 정체성을 배신하는 말과 행동을 저지르고 마는 순간이 오기도 합니다. 이때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고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 우리 인생에서 숯불의 시간입니다. 세상에서도 별 볼 일 없는 사람인 것 같고 신앙 생활에서도 실패한 것 같고, 모든 것이 다 끝장 난 것 같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이보다 더 비참할 수가 없습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 말씀을 깊이 인정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마음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그건 아닌데요. 내 생각으로는 이게 맞아요’라고 항변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 살다가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이 맞았고 내 생각이 틀린 것이었구나를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바로 그 순간이 우리 인생에서 닭 울음 소리가 들리는 순간입니다. 그 울음 소리가 너무 아프게 다가옵니다. 나의 실체가 발가벗겨지듯 다 드러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도 아니고 전부도 아닙니다. 요한복음 21장에 숯불이 한 번 더 등장합니다. 이른 아침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심장처럼 붉게 타고 숯불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숯불 같은 예수님의 사랑이 계속 타오르고 있었기 베드로의 죽었던 영혼은 다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의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던 숯불은 나중에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을 기억나게 하는 숯불이 되었습니다. 3년 반 동안이나 쌓아 올렸던 정체성을 단숨에 허물어 버렸던 베드로의 실패를 주님께서는 영원하고도 결정적인 실패가 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베드로는 다시는 자기의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를 통곡하게 만들었던 닭 울음 소리는 알고 보니 베드로 제 2의 인생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드로는 훨씬 더 단단하고 의연한 사람, 예수님처럼 자기 목숨을 내놓고 양들을 먹이고 지키는 목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모습이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질 때 예수님의 사랑은 이보다 더 붉고 뜨겁게 불타고 있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닭 울음 소리가 들릴 때 이 소리는 예수님을 알고 나를 알게 하는 소리, 그리하여 나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게 해주는 은총의 소리라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보다 더 단단한 사람, 더 의연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고 그래서 또 양들을 사랑하는 목자로 살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반응형

'설교 > 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라 이 사람이로다  (0) 2021.10.10
내가 왕이니라  (0) 2021.10.03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0) 2021.09.19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0) 2021.09.12
내 안에 거하라  (0) 2021.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