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보라 이 사람이로다

이창무 2021. 10. 10.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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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25 강 / 이창무

보라 이 사람이로다

말씀 / 요한복음 19:1-16
요절 / 요한복음 19:5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의 저서 중에 “이 사람을 보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바로 오늘 말씀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가리키면서 했던 “보라 이 사람이로다”라는 말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라는 뜻이 아니라 그 대신 니체 자신을 보라는 뜻으로 이런 제목을 붙였습니다. 이 책 1, 2, 3장의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어떻게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기 중심적일 수 있을까요? 아돌프 히틀러가 니체의 이 책을 항상 품에 두고 탐독했다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바라보아야 할까요? 니체도 나 자신도 아닙니다. 거기에서는 어떤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8장에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동시에 유대인들과 대결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유월절 특사였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이제 빌라도는 2차 시도를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더 이상 경쟁의 대상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을 정도로 망가트리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1)”

그 첫 단계로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채찍질을 가했습니다. 왜 채찍질일까요? 저는 고등학교 때 선생님에게 혁대로 맞아 본 적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아프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치심과 모멸감이 엄청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2,3)”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의 머리에 씌웠습니다. 예수님의 이마에 굵은 가시가 박혔습니다. 그 자리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피가 눈으로 들어가 엉겨 붙어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몸에 왕의 옷을 상징하는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물론 진짜 자색 옷이 아니라 싸구려 짝퉁 옷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왕께 경배하는 듯한 시늉을 냈습니다. 얼굴에 입맞춤을 하는 척 다가가더니 갑자기 손으로 뺨을 때렸습니다. 그 순간 주위를 둘러 싼 군병들과 구경꾼들에게서 배꼽을 잡으며 낄낄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모습이 어느 정도로 험하게 망가지고 찢어졌을 지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시고 무한불변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천한 인간들에 의해서 이렇게 조롱과 멸시를 받으시는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사람의 비참함과 낮아짐을 바닥까지 경험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학대만 아니라 조롱, 멸시, 모욕, 폭언과 같은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정신적인 학대를 모두 다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학대 받은 사람의 아픔과 상처를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바닥까지 내려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아픔을 깊이 공감해 주시고 이해해 주실 있는 분이십니다. 프랑스 시인 랭보는 일찍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정말 상처 없는 영혼은 한 사람도 없는 듯 합니다. 저마다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 갑니다. 누가 이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을까요?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가족이라도, 친구라도, 목자님이라도 다 이해하고 공감해 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계십니다. 예수님은 아픔과 상처를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능히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상처가 있다면 그 상처를 가지고 이 예수님이 계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위로부터 하늘의 위로를 주시고 상처가 아물고 새 살이 돋아나는 역사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빌라도는 다시 피에 굶주린 유대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험하게 상하고 깨어진 모습의 예수님이 그 뒤를 따라 나타나셨습니다. 빌라도는 다시 한번 분명하게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고 말했습니다(4). 빌라도의 두 번째 무죄선고입니다. 그는 이와 함께 라틴어 “에케 호모(Ecce Homo)!”로 알려진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5)”

예수님을 가리켜 “이 사람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빌라도는 이런 의도로 말한 것입니다. “너희 앞에 서 있는 이 비참하게 찢어지고 상한 인간을 봐라. 이 사람이 로마에 위협이 된다고 말할 작정이냐? 이 사람이 너희에게 위협이라도 되는 무서운 인물이라고 말할 작정이냐? 이 사람을 봐라. 어릿광대 같지 않은가? 이제 충분하지 않은가? 유대인들이여! 이제 그만 하자.” 

빌라도가 가리키고 있는 이 사람, 예수님을 바라보실 때 무엇이 보이십니까? 그의 말대로 왕도 아니면서 왕처럼 꾸미고 한바탕 놀이를 벌인 어릿광대가 보이십니까? 아니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할 위대한 왕이 보이십니까? 표면적으로 보면 빌라도의 시각이 더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열왕기상 10장에 보면 솔로몬 왕은 여섯 층계 위에 상아로 만든 보좌에 앉았고, 왕궁의 모든 그릇이 금이어서 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역사상 이 순간의 예수님보다 더 왕답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빌라도의 입을 빌려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초라한 겉모습 속에 감추어진 엄청난 진실을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 이분은 감추어진 왕이시다. 이분은 아무 죄가 없으시지만 죄인 취급을 받고 계시다. 이것은 너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이분이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조롱과 모욕을 당하고 계시다. 이것은 너희의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시키기 위해서이다. 다시 한번 이 사람을 보라.” 자기 백성이 살든지 죽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만 잘 먹고 살고자는 왕,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온갖 모욕과 수치를 자기가 대신 받고자 하는 왕, 이 둘 중에 누가 진정한 왕입니까? 당연히 후자가 아니겠습니까? 많은 이들에게 고난 당하시고 조롱 받는 모습이 예수님이 왕일 리가 없다는 증거로 보이겠지만, 단언컨대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진정 왕이시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우리의 왕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고생 한 번 한 적 없을 것 같은 꽃미남 스타일의 왕이 아닙니다. 우리 왕의 등에는 채찍에 맞은 상처가 있고, 손목과 발목에 굵은 못 자국이 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자신이 진정한 왕임을 나타내는 영광의 상처로 보셨기 때문에 부활하신 이후에도 그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교회를 섬기면서 얻게 된 상처들을 영광으로 여겼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를 떠 안는 것입니다. 상처를 입지 않고서 누구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양들과 이웃을 사랑하며 얻은 상처는 영광의 상처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입은 이 상처로 말미암아 누군가에게는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며 목자라는 입증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도 사랑과 섬김으로 바울처럼 내 안에, 내 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빌라도의 두번째 시도는 과연 효력을 발휘했을까요?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6)”

이번에도 역시 완전한 실패였습니다. 유대들은 예수님을 보고 소리쳐 십자가에 못 박으라 요구합니다. 이제 빌라도는 거의 체념한듯이 다시 말합니다.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노라.” 세 번째이자 마지막 빌라도의 무죄 선고입니다. 마치 유월절에 잡을 양이 흠이 있는지 없는지를 삼일 동안 살펴보는 유대인들의 습관처럼, 예수님은 빌라도에 의해서 세 차례나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흠이 없으심을 드러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7)”

유대인들은 죄를 찾지 못하겠다는 빌라도의 말을 반박하느라 엉겁결에 사실을 실토하고 맙니다. 예수님이 죽어야 할 이유가 신성모독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처음에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소할 때에는 없었던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그들의 말에는 도무지 진정성이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빌라도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8)”

빌라도는 유대인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전달한 예수님의 말 때문에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빌라도는 심문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님이 정신이 나갔거나 미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보기 드문 진정성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면 그냥 무시할 수 있는 발언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마태복음에 보면 빌라도의 아내가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해주면서 이 사람은 옳은 사람이니 손대지 말라는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더 겁이 났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정말 신의 아들이라면, 그를 때리고 모욕하도록 한 사람을 어떤 신이 가만 내버려 두겠습니까?

당대에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세를 가졌다는 로마 총독을 벌벌 떨게 만든 예수님의 힘이 무엇입니까? 권력, 재력, 매력, 다 아닙니다. 바로 진정성의 힘입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언제나 진리만을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 세상 권세는 그분의 말의 무게를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두려울 때가 참 많습니다. 그 앞에 서기만 하면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강하고 우리에게는 힘이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이 가지지 못한 힘이 있습니다. 진정성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답게 진리를 추구하며 빛 가운데 살아갈 때 거꾸로 세상이 우리를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과 안전을 위해서라면 수시로 말을 뒤집는 사람은 자기들끼리 라도 서로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관되게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저 사람은 결코 허튼 소리할 사람이 아니다” 인정을 받게 되고 그가 하는 말에 무게가 실리게 됩니다. 두려움은 더 큰 두려움으로만 이길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면 됩니다. 그러면 세상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우리를 두려워할 것입니다.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9)”

빌라도는 예수님께 너는 어디로부터냐고 질문합니다. 이 말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 맞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 다른 질문에는 대답을 잘하셨던 예수님이 이 질문에는 침묵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미 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이 말은 곧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빌라도의 문제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영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10)” 

예수님의 침묵에 빌라도는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유치하게 예수님을 협박합니다. 총독으로서 식민지 백성의 생사여탈권을 자신이 쥐고 있다는 빌라도의 말은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11)”

빌라도의 권한은 본래 자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이 그에게 위임하신 것입니다. 위임을 받았으니 마땅히 주신 분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만약 위임 받은 권한을 하나님의 뜻에 반하게 사용한다면 무엇이 됩니까? 예수님은 이것을 죄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죄가 큰 사람들입니다. 빌라도 역시 그들 만큼은 아니지만 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의 모습이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법정에서 죄를 정하고 죄의 경중을 결정하는 사람을 가리켜 재판장이라고 합니다. 이 재판의 재판장은 빌라도입니다. 그런데 지금 죄를 정하고 죄의 경중을 논하고 있는 사람은 빌라도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재판장인 빌라도와 배심원 격인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심판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실질적인 재판장은 예수님입니다. 이 재판은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앞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재판입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12)”

빌라도는 계속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유대인을 끝내 이기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결정적 한 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석방하면 가이사의 충신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갑”이었지만 황제 앞에서는 “을”일 수밖에 없는 빌라도는 이 말에 결론을 내립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13,14)”

마침내 빌라도는 선고를 내리기 위해 유대인들 앞에 나타납니다. 여섯 시간 동안 긴긴 심문이 다 끝나고 정오의 태양 아래서 마지막으로 판결문 낭독만이 남았습니다. 일단 빌라도는 예수님을 가리키면서 “보라 너희 왕이로다”라고 선언합니다. 집요하게 자기의 아킬레스 건을 공격한 유대인들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15)”

빌라도의 도발에 유대인들은 격렬하게 반발합니다.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도 지지 않고 한 번 더 도발합니다.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마땅합니까? “무슨 소리요? 하나님 말고는 우리에게 왕이 없소” 라고 해야 옳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 전혀 뜻 밖의 말이 나옵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이것은 선을 넘어도 너무 넘은 발언이었습니다. 유대인 더구나 대제사장이 결코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유대인이 되게 하는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바로 “오직 여호와 하나님 만이 우리의 왕이시다”라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지키기 위해 수천년 동안 조상들은 얼마나 고난을 받고 수많은 피를 흘렸습니까? 그런데 이방인 로마 황제를 어떻게 자신들의 유일한 왕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이 말을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유대교에 대한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16)”

가이사를 향한 충성심 경쟁에서 결국 로마 총독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졌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그 자신이 죄 없다고 세 번이나 밝힌 예수님을 십자자에 내어주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2주간에 걸쳐서 예수님이 재판 받으시는 장면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분량으로만 따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장면보다 더 깁니다. 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재판을 이렇게 비중 있게 다루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재판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이 무죄이고 도리어 예수님을 못 박은 세상이 유죄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아야만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 때문이며, 누구를 위한 죽음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특히 재판의 마지막 부분은 유대인의 민 낯, 로마인의 민 낯, 더 나아가서 이 세상의 민 낯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유대인은 자신들의 신앙과 종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민족입니다. 하지만 오늘 그들은 가이사만을 왕이라 고백함으로 그들의 신앙이 허울 뿐인 껍데기라는 사실을 다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로마인은 탁월한 법과 제도를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그들은 죄 없으신 예수님에게 십자가 형을 선고함으로 그들의 시스템이 얼마나 허술한가를 다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역시 본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정의, 진실, 인권, 평화 등등 입으로는 늘 고상한 가치를 말합니다. 저마다 스스로 구축한 체계와 업적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자신들이 이룩한 민주주의를 자랑하고, 중국은 단시일에 이룬 경제 성장을 자랑합니다. 우리 나라도 요즘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케이 열풍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BTS가 연속으로 빌보드 1위를 하고, K-드라마가 전세계 1위를 하고, 이게 다 실화인가 싶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 이면에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이 빚어내는 희비극의 현장이 있습니다. 최근에 대장동 비리가 터졌습니다. 우리 사회 얼마나 많은 곳에 이런 부정부패가 똬리를 틀고 있을까요? 이 세상의 민 낯을 보고 나면 “참 답이 없다.”며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이란 존재를 알면 알수록 그 죄악의 깊이가 정말 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사람을 보라”고 합니다. 온전히 순결하고 의로운 예수님을 보라고 합니다. 인간의 모든 죄악을 그 어깨에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계신 예수님을 보라고 합니다.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죽음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보라고 합니다. 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시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나의 왕, 나의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그분의 뒤를 따라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아직 그분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보라 이 사람이로다” 힘있게 선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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