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다 이루었다

이창무 2021. 10. 17.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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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26 강 / 이창무

다 이루었다

말씀 / 요한복음 19:17-42
요절 /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성경에 나오는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 대다수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현장을 목격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본 사람들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에 대한 사도 바울의 정의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밝히 보고 있습니까? 혹시 전에는 밝히 보이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흐릿하게 보이고 있습니까?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오늘 말씀을 통해 밝히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처형 장소인 골고다로 올라가셨습니다. 십자가 형은 길게는 일주일 가량 갖은 고통을 당하다가 결국 과다 출혈과 탈진으로 죽는 끔찍한 형벌이었습니다. 로마의 키케로는 십자가는 너무 끔찍해서 묘사할 만한 적합한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죄수에게 베풀어지는 유일한 자비는 다리를 꺾어 빨리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이 십자가 예수님을 묘사하는 방식은 독특합니다. 예수님을 타의에 의해 질질 끌려가는 여느 사형수의 모습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자기 의지로 십자가를 지시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을 태울 번제할 나무를 짊어지고 모리아 산을 올라가던 이삭처럼,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을 향해 뚜벅뚜벅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당당히 십자가 정중앙에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못 박히십니다. 이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요?


당시 십자가 형을 받는 죄수의 십자가 형틀 위에는 죄 패가 붙여지곤 했습니다. 빌라도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했습니다.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고쳐 달라는 항의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대 종교자들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패에 적힌 글귀는 빌라도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를 놀랍도록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이유는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대표하여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의 형벌을 받아 죽으신 것입니다. 게다가 그 패가 히브리 말, 로마 말, 헬라 말 세 가지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여기 기록된 그대로 유대인 뿐 아니라 후에 로마인 고넬료와 헬라어를 말하는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 이방인들까지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이 어떻게 세상 만민의 왕이 될 수 있을까요? 여러 성경 학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바로 예수님의 대관식이었다고 말합니다. 세상에 이런 대관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관점에서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영광이라는 단어입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12:23)” 십자가에 죽으시는 사건을 가리켜서 예수님은 계속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당신의 대관식으로 삼으심으로써 고난의 새로운 차원 곧 영광스러운 차원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섬기며 따르고자 할 때 겪게 되는 고난과 불이익과 손해와 따돌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 반드시 피해야만 할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현재의 우리의 고난은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한 고난이라 했습니다(롬8:17). 그러므로 고난은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피해야 할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영광임을 알고 기꺼이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요한복음의 예수님처럼 말하면 어떨까요? 앞으로 고난이 닥칠 것이 예상될 때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구나” 고난 중에 있을 때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영광을 얻고 있구나” 이것은 말장난도 아니고 정신승리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를 통해 증명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그 십자가에 참여함으로 예수님께서 얻으신 그 영광에도 참여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당시 죄수의 옷은 사형 집행인들의 부수입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겉옷은 솔기를 따라 찢어서 4인 1조로 된 군인들이 하나씩 가져 갔습니다. 반면 속옷은 군인들이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이 가져 갔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죽으실 때까지 십자가 위에 벌거벗은 채로 계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사형수에게 최대의 고통을 안겨주는 사형틀이었을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존엄을 짓밟아버리는 수치스러운 형틀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십자가 하면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만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에 견디기 힘든 수치가 더하여 졌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복음은 이 일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고 기록된 시편 22편 18절의 성취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성경은 메시아가 옷이 벗겨지고 벌거벗은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을까요? 벌거벗은 수치하면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들은 처음에 수치를 알지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은 이후 가장 먼저 경험하게 된 것이 수치심입니다. 벌거벗은 것이 부끄러워 무화과 나무로 급히 옷을 만들어 몸을 가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짐승의 피를 흘려 친히 가죽옷을 지어 아담과 하와를 가려 주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일어날 일을 예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이 벌거벗김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벗은 몸을 덮어주고자 하셨습니다. 수치 가운데 죽으심으로 우리들의 모든 수치를 영원히 제거해 주셨습니다. 수치심은 범죄한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 한 순간,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한 자존감을 상실했습니다. 대신 열등감, 인정 욕구, 강박적인 비교 의식, 자기 의와 완벽주의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은 평생 수치 의식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을 참으로 자유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는 사람은 더 이상 성공과 부와 명예, 괜찮은 사람이라는 껍데기로 자신의 수치를 가릴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신 수치를 당하신 십자가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품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구하며 십자가 앞으로 나아갑시다. 그러면 나의 모든 수치와 죄책이 제거되었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귀한 존재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근처까지 따라온 네 명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다.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는데 바로 제자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요한을 맡기시고, 요한에게는 마리아를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어머니를 끝까지 챙기는 예수님의 지극한 효성에 관한 내용일까요? 그렇다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마리아에게는 친아들들이 있고 요한에게도 친어머니가 있는데, 예수님이 왜 굳이 둘을 서로에게 맡기셨을까요? 이것은 효심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세워지는 새로운 가족 공동체의 출발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관계로 맺어진 가족을 십자가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의 기본 원리는 십자가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물론 이상과 현실은 다를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기 보다는 교회 안에서 서로에게 상처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그러다 보니 요즘 가나안 성도들이 엄청 늘어났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긴 하지만 교회에는 안 나가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예수님은 사랑하지만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순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창설하신 가족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만나서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며, 아들이고 딸이며, 형제이고 자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를 책임지고 서로를 돌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적인 사랑으로는 도저히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해져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 사랑이 동역자들과 양들까지 흘러 넘쳐 십자가 가족을 함께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 하셨습니다. 십자가 형은 출혈을 인한 탈수 증세를 일으킵니다. 극심한 갈증으로 혀가 입천정에 붙어버릴 정도입니다. 요한복음 안에서 목마름 하면 사마리아 여인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맛보아야 할 지옥의 목마름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우리를 목마르지 않게 하시려고 자신은 목마르신 분이 되셨습니다. 광야를 지나며 목이 말랐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반석에서 샘물이 터져 나왔듯이, 목이 마른 인생들을 위해 골고다 언덕에서 샘물이 터졌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반석이 깨어지듯이 십자가에서 찢어지시고 상하시고 깨짐으로써 그 샘이 터졌습니다. 그 샘에서 나오는 생수를 마실 때 비로서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고 만족할 수 없었던 우리 인생의 목마름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목을 축이라고 군인들이 건네준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예수님께서 하신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였습니다. 앞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다 하셨습니다. 결국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은 선포는 하나님이 맡기신 모든 일을 다 이루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루신 일이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들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이 구원을 조금의 부족함도 없이, 내가 해야 할 부분을 전혀 남기지 않으신 채 완전하게 성취하셨습니다. 구원을 위해 우리가 더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보다 더 우리에게 기쁨과 안전함을 주는 말이 있을까요?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선언은 우리에게 최고의 위로요, 확신입니다.

예수님은 이 구원을 어떤 방식으로 이루셨습니까? 십자가로 이루셨습니다.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우리를 위해 다 내어 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수치를 덮기 위해 겉옷과 속옷까지 다 내어 주시고 벌거벗은 몸이 되셨습니다. 그 몸도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 속죄 제물로 다 내어 주셨습니다.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까지 다 내어 주셔서 극도로 목마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영혼까지 다 넘겨주셨습니다.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처럼,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알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고 단 하나도 남지 않았을 때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신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 앞에 어떤 말로도 충분히 감사를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이루고자 할 때 어떤 방식을 생각합니까? 나를 위해 어떤 것을 차곡차곡 더 하는 플러스의 방식을 먼저 생각합니다. 더하고 더하고 또 더해서 더 이상 더할 것이 없을 정도로 꽉 찬 상태에 이르러야 비로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면 사업하는 사람은 재벌이 되고, 정치인은 대통령이 되고, 학자는 노벨상을 받아야만 다 이룬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루심은 이와 다릅니다. 나를 위해 무언가를 차곡차곡 더 하는 플러스의 이루심이 아니라 남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마이너스의 이루심입니다. 하나도 남지 않고 다 주고 나서야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방식입니다. 오직 이 십자가의 방식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이룰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마감하는 순간 어떤 후회를 하게 될까요? 더 맛난 것 먹지 못하고 더 구경하지 못하고 더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될까요? 제 주위에서 임종을 앞두고 그런 것으로 후회하는 사람을 아직까지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다들 더 사랑하지 못하고 더 용서하지 못하고 더 주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차피 죽어서 가져갈 수도 없는 것을 남겨 놓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예수님처럼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내어주는 인생을 살 수만 있다면 후회 없는 인생이 되지 않을까요? 내일이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직 우리에게 시간이 있을 때, 기회가 주어졌을 때, 더 사랑하고 더 용서하고 더 주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은 안식일 전날이자 동시에 유월절 준비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런 날에 시체를 밤새도록 두는 것은 부정해질 수 있으니, 얼른 시체를 치워 달라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예수님의 좌우편에 매달렸던 사람의 다리를 꺾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질식으로 빨리 숨을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운명하셨기 때문에 다리를 꺾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출애굽기 12장 46절에 보면 유월절 양은 뼈를 꺾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만약 유대들의 요구대로 군인들이 무심코 예수님의 뼈를 꺾었다면 유월절 양으로서 자격을 상실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뼈가 꺾이지 않았기 때문에 흠 없고 점 없는 유월절 어린 양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 군인들은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나왔습니다. 요한복음은 왜 이 사실에 주목하는 것일까요? 이 피와 물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피는 유월절 어린 양이 흘린 대속의 피입니다. 우리 죄를 사함 받게 하고 영원한 속죄를 이루는 피입니다. 물은 어떻습니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항상 성령님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은 십자가 사건 이후 성령이 오실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이제 영원한 속죄의 시대, 성령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장례에는 두 사람이 주요 인물로 등장합니다. 바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입니다. 이 둘은 공회 의원이자 예수님과 이미 관계성이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유대인이 두려워 숨기던 사람이고, 니고데모는 일찍이 예수님을 밤에 찾아왔던 사람입니다. 한 가지 공통점이 더 추가되는데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장례에 발벗고 나섰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자칫하면 예수님과 한통속으로 몰려 신분이 위태롭게 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들의 심경에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높이 달려 죽으심으로 사람들을 자신에게 이끌고 계십니다. 그 첫 출발점에 요셉과 니고데모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장례는 어떠했습니까? 니고데모가 향품 백 리트라를 가져왔습니다. 백 리트라는 37 킬로그램입니다. 이 정도 분량의 향품은 왕의 장례식에나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묻히신 무덤은 예루살렘 가까운 동산에 있고 아무도 쓴 적 없는 새 무덤이었습니다. 열왕기서에 나오는 유다의 왕들이 바로 이런 종류의 무덤에 묻혔습니다. 우리의 왕 예수님은 비록 십자가에서 큰 고통과 수치 가운데 죽으셨지만, 무덤에는 왕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묻히셨습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직접 본다면 매우 놀라워하고 감탄할 것입니다. 그리고 끝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십자가 현장의 일곱 개의 장면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런 감흥이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이 장면을 바라보게 되면 그 하나하나가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깨닫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구원이 있고 치유와 회복이 있고 죄사함이 있고 새 인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아무리 그 의미를 캐내고 또 캐내도 다 발견할 수 없는 진정한 불가사의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그 십자가의 세계를 밝히 보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이미 믿은 분들에게 새로운 감격과 은혜가 더하여 지고, 아직 믿지 않는 분들에게는 구원의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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