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창무 2021. 10. 31.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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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28 강 / 이창무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말씀 / 요한복음 20:19-31
요절 / 요한복음 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인 요한복음 20장의 전반부는 막달라 마리아, 베드로와 요한 각 개인에게, 후반부는 주로 제자 공동체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부활 신앙이 탄생합니다. 그 신앙은 공동체를 통해서 자라고 성숙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부활의 믿음을 가진 공동체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선물과 특권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번째 선물, 평강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날 저녁 제자들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부활의 기쁨으로 충만해 축제를 벌이고 있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유대인들이 잡으러 올까 두려워 문을 꽁꽁 걸어 잠근 채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이때 불쑥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인사하십니다. 이 인사는 단순히 “잘 있었느냐”는 인사가 아닙니다.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의 시대가 끝났고 평안을 누릴 때가 왔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에게 사망 선고가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 끝이 아닙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더 이상 죽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시 사는데 무슨 걱정입니까?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첫번째 선물인 평강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두번째 선물, 기쁨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0)”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제자들은 어안이 벙벙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혹시 유령인가 하여 무서워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못 박혔던 손과 창에 찔렸던 옆구리를 본 후에 주님을 알아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들의 두려움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것 역시 예수님의 부활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두번째 선물은 바로 기쁨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그의 영혼에 근원적인 평강과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제가 그랬습니다. 초등학교 때 9시 뉴스에서 강풍에 떨어진 간판이 지나가던 행인이 머리에 맞아 현장에서 즉사했다는 짧은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날도 제가 수많은 간판을 지나 집에 왔던 것이 기억이 났습니다. 만약 그 간판이 내 머리에 떨어졌다면 내가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한 동안 지나가다 간판을 보기만 해도 심장이 쿵쾅거렸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표정이 없고 심각한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달라졌습니다. 고등학교 때 알던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가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본다.” 회사 다닐 때 한 팀원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팀장님은 호수 같아요.” “왜?” “아무리 주위에서 돌멩이를 던져도 다 가라앉을 뿐 늘 평온해 보이니까요.” 저도 잘 몰랐는데 주위 사람들이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의 선물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평강과 기쁨, 이 두 가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가시적으로 나타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복음입니다. 고단한 인생길 속에서 항상 기뻐하며 평안을 누리며 사는 성도의 삶은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원색적인 복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는 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2:14)”

이 냄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의 냄새입니다. 향기로운 꽃 냄새가 나면 길 가던 사람들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냄새를 맡듯이, 우리에게서 부활 생명의 냄새, 평강과 기쁨의 향기가 흘러나온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 향기의 근원이 어디인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고약한 사람들이 그리고 사탄 마귀가 끊임없이 우리에게서 이 평강과 기쁨을 빼앗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 안에 평강과 기쁨이 충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제자 공동체는 이전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새롭게 탄생한 이 공동체를 신약 성경은 교회라고 부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교회의 역할과 본질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첫째, 교회는 선교 공동체입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 이어서 제자들도 증인으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오직 아버지의 말씀만을 전하셨습니다. 이제는 제자들 차례입니다. 예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분신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성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아들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가지셨듯이 세상으로 들어가 선교하는 공동체라는 정체성을 가진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둘째, 교회는 성령 공동체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2)”

이 구절은 창세기 2장 7절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사람은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숨을 내시면서 성령을 불어넣으십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세상에 증인이 되려면 성령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강림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부활이란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한 분의 부활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하나님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들은 마음에 할례를 받아 즐거이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져 가는 새 이스라엘입니다. 바로 성령님께서 이와 같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십니다. 교회가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마른 뼈 같은 인생을 살던 사람에게 예수님이 불어넣으시는 생기가 들어가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 교회입니다.

셋째, 교회는 성전 공동체입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23)”

예수님은 부활의 증인으로 세상에 보내지는 제자들에게 두 가지 권세를 주십니다. 죄를 사할 권세와 그대로 둘 권세입니다. 엄청나고 놀라운 권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제자들이 임의로 죄를 사할 사람과 사하지 않을 사람을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앞선 21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에 어떤 사람은 제자들이 전한 복음을 영접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거절할 것입니다. 영접한 사람은 죄 사함을 받고, 거부한 사람은 계속 죄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구약에서 죄 사함을 받는 장소가 성전입니다. 이를 종합해 보면 교회가 구약 시대 건물로서 성전을 대체하는 새로운 성전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종합해 보면 교회는 어떤 곳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교회는 예수님께 보내심을 받은 선교 공동체이며,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새 사람이 되는 성령 공동체이며,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성전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지난 봄부터 교회사 특강을 하고 있습니다. 이천 년 동안 교회의 역사가 증명해 주는 바가 있습니다. 교회가 선교하지 않고,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 죄사함의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면 반드시 타락한다는 것입니다. 중세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전 유럽이 기독교화 된 것에 만족하고 더 이상 선교하지 않았습니다. 성령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세속적인 권력과 부를 더 의지했습니다. 교회에서 십자가 복음은 사라지고 대신 천박하기 그지없는 면죄부가 사고 팔았습니다. 이 모습을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던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당의 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였습니다. 오늘이 정확하게 그로부터 504년이 지난 종교개혁 기념일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오늘이 할로윈 데이인줄로만 알고 있어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종교개혁 기념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우리 자신에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교와 성령과 성전이라는 교회의 본질을 얼마나 실현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분명 선교에 목숨을 건 공동체입니다. 교회사가들은 모라비안 선교사가 교인 12명 당 1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하여 놀라움을 표시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의 2명 당 1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을 것입니다. 역사를 새로 쓴 셈입니다. 또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난 성령의 역사로 살아나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십자가 복음이 힘있게 선포되고 그 복음을 믿고 영접하여 죄사함을 받는 일들이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물론 부족한 점, 잘못한 점, 미숙했던 점도 참 많았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리셨던 교회다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지금까지 많은 분들이 함께 해 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앞으로’입니다. 교회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깨어 기도하고 영적으로 싸우지 않는다면 중세 교회가 걸어갔던 전철을 다시 밟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남은 교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붙들었던 다음과 같은 모토가 있습니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다시 개혁되어야 한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이 말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개혁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선교하는 공동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공동체, 죄사함의 복음이 살아있는 성전 공동체를 함께 이루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음 없는 자에서 믿는 자가 된 도마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24,25)”

도마는 예수님께서 열 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모두가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고 기뻐했을 때 무슨 일인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이제부터 이 도마를 도마 위에 올려 놓고 해부해 보고자 합니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에는 도마가 여러 번 등장합니다. 11장에서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가자고 하셨을 때 도마는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합니다. 이를 보면 도마는 충성스럽고 의리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14장에서는 너희가 이미 길을 알고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언제 그런 적이 있느냐 따지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이를 보면 도마는 솔직한 면도 있는 반면, 상상력과 융통성이 좀 부족해 보입니다. 이런 사람은 대개 고집스럽고 자기 확신이 강한 편입니다. 이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독특한 사람이라는 평을 듣기 쉽니다. 본인도 “아쉬울 것 없다. 나는 내 길을 가겠다” 마음먹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곤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결국 공동체로부터 고립되는 상황이 생길 수 있습니다. 공동체로부터 고립은 상당히 위험한 일입니다. “한 마리 외로운 늑대처럼 살리라” 꽤 멋있게 들리지만, 야생에서 이런 늑대는 대부분 굶어 죽는다고 합니다. 성도 역시 공동체 안에 있어야 여러가지 것들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위로도 받고 격려도 받고 기도 지원도 받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공동체 안에 있을 때 자기 세계를 벗어나서 새로운 믿음의 세계로 도약할 수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자 그룹으로부터 고립되었던 도마는 홀로 예수님을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른 열 명의 제자와 막달라 마리아까지 증언을 하는데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못 자국에는 내 손가락을, 창 자국에 내 손을 넣어 본 후에나 믿겠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도마는 의심 많은 도마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도마의 불신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집불통 도마를 내버려 두어야 할까요?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6,27)”

예수님이 도마 때문에 일주일 후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찾아오십니다. 오직 도마 한 사람 때문입니다. 그리고 도마를 향해 손가락을 못 자국 난 곳에 손을 옆구리 상처에 넣어 보라 하십니다. 도마는 일단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이 자기가 다른 제자들에게 했던 말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에 더 놀랐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도마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십니다. 도마는 정확하게 말하면 의심 많은 제자가 아니라 믿음 없는 제자였습니다. 도마는 이제라도 불신을 끊고 믿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

도마는 아주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은 구약의 여호와를 주님으로, 구약의 엘로힘을 하나님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도마는 지금 예수님을 향해서 “나는 당신을 스스로 계신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선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 역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고백으로 끝이 나고 있습니다. 제자들 중 가장 믿기 힘든 사람, 믿음이 더디게 자랄 수밖에 없는 기질을 타고난 도마에게서 이런 고백이 나왔다는 사실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도마가 예수님의 못 자국 난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만져보았을까 궁금해집니다. 아닐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을 돕기 위해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예수님께 도마는 즉시 믿음의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도마는 후에 인도에 가서 선교를 하다가 순교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로써 도마는 의심 많은 도마로 끝나지 않고, 의심에서 확신으로 변화된 신자들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단 한 제자도 부활의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길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개인 신앙이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개인 신앙이 자라기 위해서는 공동체라는 토양이 중요하다는 사실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입니다. 신앙 생활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는 마귀의 온갖 시험과 함정들 속에서 우리는 결코 혼자서 이 낙심과 절망과 좌절의 늪을 무사히 통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이 서로를 격려하고 힘을 얻을 수 있도록 교회를 주셨습니다. 성도가 공동체 안에서 영적인 교제를 소홀히 하면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스스로 고립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고립은 신앙 생활의 독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해지고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성도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선 나 자신이 먼저 노력해야 합니다. 동시에 주위에 있는 동역자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고립되기 쉬운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너만 손해지, 내 손해냐?” 하면서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처럼 찾아가고 끌어주고 안아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다음에 내가 힘들 때 누가 와서 나를 도와주겠습니까? 그 동안 코로나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고립 상황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여기서부터 서서히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연약해진 우리의 믿음이 공동체 안에서 교제를 통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9)”

예수님은 도마가 믿음이 생긴 것을 보고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마의 믿음이 훌륭하지만 최상급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최상급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보지 못하고 믿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들에게 부활의 선물을 넘치도록 주실 줄을 믿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0, 31)”

요한복음에는 7개의 표적이 나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가장 큰 표적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표적입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표적을 기록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는 것과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는 것, 이미 예수님을 믿던 사람의 믿음이 더욱 성장하여 생명을 더욱 풍성히 누리게 되는 것, 이 두 가지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전도의 책이면서 동시에 양육의 책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아직 21장이 남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요한복음은 여기에서 끝이 납니다. 우리는 지난 3월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요한복음을 한 구절도 빼지 않고 공부했습니다. 어렵다는 이유로 종종 건너 뛰기도 했던 요한복음 후반부도 다 진도를 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재판과 십자가 죽음 부분을 비교적 자세하게 한 장면 한 장면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성장하셨습니까?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을 좀 더 풍성하게 누리셨습니까? 이 질문에 긍정으로 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저자 요한의 의도대로 요한복음을 제대로 읽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믿음을 북돋우고 믿음의 사람을 세우는 교회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욱 풍성하게 생명을 누릴 뿐 아니라 양들과 이웃의 생명을 살리는 부활의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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