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사명은 나의 힘

이창무 2022. 8. 8.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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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여름수양회 폐회예배

사명은 나의 힘

말씀: 요한복음 4:31-39
요절: 요한복음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즘 날씨가 매우 덥습니다. 조금만 움직이면 숨이 막히고 땀이 납니다. 이럴 때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면서 얼음을 띄운 냉면을 먹으면 딱일 것 같습니다. 반면 이와 정반대의 방법도 있습니다. 이열치열이라고 합니다. 뜨거운 것으로 뜨거움을 이긴다는게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될 것 같은데, 인생을 살다보면 이것 또한 말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그러한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언뜻 들으면 이게 말이 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명이라면 뭔가 부담스럽고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 같은데, 이게 힘이라는 사실이 말이 되나? 하면서 갸우뚱 거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또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 말이 맞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사명이 어떻게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있는지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31)”

당시 제자들은 사마리아 수가란 동네에 들어가 예수님께 드릴 먹을 것을 가지러 갔었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대화하던 여인이 갑자기 물동이를 팽개치더니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감격에 찬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녀의 이 단순한 고백은 동네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일이 동네에서 일어나고 있던 사이에 제자들은 가져왔던 음식을 꺼내어 예수님께 드실 것을 권했습니다. 제자들은 아마도 “아이고, 그래 수고 많았다. 배고팠는데 함께 먹자꾸나”하는 예수님의 칭찬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달랐습니다. 제자들에게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와 사마리아가 서로 적대시하는 관계를 생각한다면 사마리아 동네에서 누군가가 유대인 예수님께 음식을 드릴 것 같지 않아, 그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자신의 양식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4)”

예수님을 보내신 이가 누구십니까?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다음과 같이 증거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종합적으로 보면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일이 나의 양식, 나의 밥, 나의 에너지원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수가 동네에 가셨을 때 몹시 피곤하신 상태였습니다. 연약한 인간의 육신을 덧입으셨기에 땡볕에서 오랜 시간 걸은 후 숨도 차고 지치셨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그녀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삶이 변화되고, 그 변화의 열매를 보셨을 때 모든 피곤함이 물러가고, 오히려 새 힘을 얻으셨습니다. 이것이 처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쉴 사이 없이 말씀을 가르치시며 귀신을 내쫓고 병든 영혼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이 힘들다고 중도에서 포기치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위에서 “다 이루었다”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치지 않으시고 힘 있게 복음역사를 감당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자체가 예수님에게 힘을 얻는 양식이요 쉼이요 기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명이 곧 나의 양식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몇 마디 대화만으로 복음을 영접하게 할 수 있고 즉시 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이지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럴 지 몰라도 맨날 실패만 하는 나는 사명이 힘이 되기는 커녕 늘 무거운 짐일 뿐이라고 항변하고 싶을 지 모릅니다. 만약 이것이 맞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나중에라도 제자들이 생명력이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명이 우리에게 힘이요 기쁨이 될 수 있습니까?

첫째,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하기에 힘이 됩니다. 아내와 결혼 전 약혼 기간에 제 집은 부모님이 사시던 부천이었고 회사는 마포에 있었습니다. 당시 동역자는 서초동에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회사에서 야근을 한 뒤 동역자를 만나기 위해 서초동으로 갔습니다. 잠시 만남 후에 집에 가기 위해 영등포역까지 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역에 도착하면 대부분 이미 전철이 끊어진 뒤였습니다. 그러면 영등포역에서 출발하는 총알 택시를 타고 부천 집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분명 어제 택시 탈 때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부터는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너무 피곤해서 일시적으로 필름이 끊긴 상태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똑같은 일을 반복했습니다.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때 내가 미쳤었구나 제 정신이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전혀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동역자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 받는 것도 힘이 되지만 사랑하는 것도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태초부터 우리를 주권적으로 부르시고 의롭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사 십자가에게 그 아들을 내어 주실 정도로 사랑이 한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우상에게 한 눈을 팔면 질투하실 정도로 우리를 열정적으로 사랑하시는 참 남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때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임하고 새 힘을 얻게 됩니다. 몸은 피곤할 수 있지만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솟아오르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사람에게 사랑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부담이 아니라 이것 또한 은혜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게 되어 사랑을 확신하게 됩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대학교 3학년 시절을 떠올립니다. 그 이유는 제가 생애 처음으로 전도에 도전했던 때이기 때문입니다. 왜 전도가 행복이 되었을까요? 양을 많이 얻었기 때문일까요?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학교 이곳 저곳을 쏘다니면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거의 양을 얻지 못하고 거절과 외면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실이 저를 감격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절하고 외면하던 사람이 바로 저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의 거절과 외면과 고집에도 불구하고 나를 오래 참으시고 마침내 구원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물밀듯이 밀려 왔습니다. 내가 얼마나 큰 은혜 받은 사람인가 얼마나 큰 사랑 받은 사람인가 날마다 확인하면서 사니 행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 단순한 탁상공론이 아닙니다. 나의 몸과 성정이 개입되고 시간과 열정이 투입이 됩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여러 모양으로 동역하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동역자들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드러나게 됩니다. 이때 그 동안 알지 못했던 나의 장점을 발견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에 마주할 때도 많습니다. 이로 인해 절망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무지하고 제멋대로였던 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가 더욱 깊어집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확신할 때, 우리는 더욱 힘을 내어 사명을 감당하고 우리 자신을 내어드릴 수 있게 됩니다. 부족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심으로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깨닫게 하시고, 그 위에 굳게 서도록 도우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셋째,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체험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을 그냥 지켜만 보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하나님께서 영으로 임재하십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경에 이런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졌을 때, 하나님의 천사들이 나타나 사자의 입을 막고 그를 안전하게 보호하였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을 감옥 문이 열려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당사자에게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다니엘과 사도 바울 이외에도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성령으로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끝가지 믿음의 삶, 사명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이야기는 비단 성경 속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현재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현실에 도전했을 때 이성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체험을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당장 저는 이번 여름수양회 인생소감과 소감 발표하신 모든 분들이 다 하나하나 기적같이 느껴집니다. 절대로 교회 일을 안 하겠다고 손사래를 치던 형제가 묵묵히 러너스 캠프를 뒤에서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러너스 가운데 십자가만 봐도 눈물이 나오는 형제가 있고 일주일에 말씀 공부를 세 번이나 하는데 말씀 공부가 기다려지는 자매도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수양회 준비하고 섬기느라 에너지와 시간을 쏟았기에 심신이 피곤해야만 하지만 도리어 심장이 뛰고 가슴에서 무언가 주체할 수 없는 벅차오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느끼고, 특별한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그 삶에 성령으로 함께 하시고 특별한 축복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가운데, 인생의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보여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의 구원을 통해 영적인 힘을 얻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그 후에는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을 바라보시고 특별한 비전을 보셨습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35)”

여기서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른다는 것은 일종의 격언으로 심고 나서 추수할 때가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씨를 뿌린 후부터 추수하기까지 일정 기간이 소요되는 것은 자연 세계에서 매우 당연한 현상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추수는 이와 다릅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씨를 뿌린 후 곧 추수할 때가 이르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영적인 세계에서는 추수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그 즉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그 즉시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사실 그 당시 제자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순수성을 잃어버려 구원의 자격도 없고 소원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에 대한 편견과 민족적인 감정 문제에 얽매여 비전은 커녕 그 땅을 밟는 것조차 부담스러웠습니다. 복음을 전하려고 생각도 하지 않았고 또 전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해도 안 받아 들일 것이라는 깊은 불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유대인으로부터 무시 받으면서 마음이 겸손해져 누구보다도 자기들을 구원해줄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준비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실제로 사마리아 여자가 하는 몇 마디 믿음의 고백을 듣고 많은 온 동네 사람들이 즉각 몰려왔습니다. 

이처럼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의외의 장소에 감추어져 있을 지 모릅니다. 우리의 밭은 일차적으로 캠퍼스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캠퍼스라는 밭에서 추수하고자 해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럴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 밭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을 들어 보면 주님께서 의외의 장소에서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을 보여주실 지 모릅니다. 그곳이 어디일까요? 알고 보면 우리 주변일지도 모릅니다. 내 옆에 일하고 있는 직장 동료일 수 있습니다. 자녀의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된 학부모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 중에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 마음이 겸손히 준비된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놓치지 말고 거두는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전을 심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그들이 예수님의 복음의 동역자가 되어 추수할 일군으로 쓰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특히 36절을 통해 거두는 자와 뿌리는 자의 영적 비밀을 알려 주셨습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36)”

말씀에 따르면 추수를 하는데 있어 거두는 자가 있고 뿌리는 자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실제 농사를 지을 때는 대부분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일치합니다. 거둔다는 대가가 없다면 뿌린다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원리입니다. 

하지만 생명을 거두는 영적인 세계는 좀 다릅니다.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같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36절을 보면 예수님은 뿌리는 자도 거두는 자를 통해 함께 즐거워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거두는 자는 거두는 것을 통해 영의 양식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기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뿌리는  지금 당장 내가 거두는 것이 없어도 함께 기뻐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목자 생활 중 힘들게 하는 것 중 하나가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많이 수고하였는데, 열매가 없으면 힘든 것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시간에 다른 것은 좀 더 할 걸 그랬나?” 하면서 손해의식이 들기도 합니다. 심한 경우 많은 불평을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뿌리는 자로서 감사할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 뿌리는 자의 원리를 영접해야 합니다. 내 손으로 거두지 않아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통해 거두신다는 것을 믿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눈에 보이는 열매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뿌려진 씨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은 뿌리는 것의 열매를 보지 못할 수 있지만,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그로 인한 열매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뿌린 사실을 나 자신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날에 네가 뿌린 것이 결실을 맺어 이렇게 거두게 되었다 라고 우리에게 알려주실 것입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울까요? 우리는 이런 소망 가운데 기쁨으로 하나님 역사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뿌리고 또 거두는 역사에 참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매주 토요일마다 캠퍼스 전도를 나가고 있습니다. 이 전도를 통해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를 많이 거두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아예 듣지 않고 가버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도 자체가 메시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냥 가버리는 사람들도 한번쯤은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도대체 저 사람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얼마나 소중하길래 저렇게 미련하게 전도하려고 할까?” 이것이 계기가 되어 다음 번에는 귀를 한 번 쯤 열게 될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누군가가 그 영혼을 거두게 될 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도가 결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젠가 반드시 거두게 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힘은 어디로부터 나옵니까? 주님을 만나고 아는 것으로부터 나옵니다. 어떻게 주님을 만나고 알 수 있습니까? 말씀으로 압니다. 기도로 만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주님과 함께 함으로 주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힘과 에너지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명을 통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더 깊이 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서 영혼의 양식, 삶의 충만한 생명력과 에너지를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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