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및 나눔/단상

그를 가만 두어라

이창무 2017. 12. 4.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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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인 2015년 6월 15일에 엘리자베스 엘리엇 여사가 88세를 일기로 소천하셨습니다. 엘리엇 여사의 남편 짐 엘리엇은 남미 에콰도르에서 마지막 '식인 부족'인 아우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28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때 타임지는 이 사건을 10 페이지에 걸쳐 다루었는데 기사의 제목은 ‘이것이 무슨 낭비인가’였습니다. 


이 타임지의 제목은 요한복음 12장에서 가롯 유다가 향유를 부은 마리아에게 했던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속으로는 “부을거면 바닥에 비닐이라도 깔고 부을 것이지 아깝구만. 아까워.”) 타임지와 유다의 말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상식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은 결코 낭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제 엿새 후 마리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실 분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죽음으로 마리아를 구원하시고 그녀에게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주실 분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향유를 부은 마리아 사건은 사람들을 두 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로 나눕니다. 첫째는 ‘마리아가 쓸 데 없는 짓을 했다’ ‘마리아는 바보다’ ‘마리아는 광신자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상식과 합리성으로 무장한 교양인들입니다. 그들은 ‘믿어도 좀 적당히 믿지 너무 광신적으로 믿지 마라’고 합니다. 예배나 선교에 쓸 돈이 있으면 차라리 그 돈으로 사회 복지 사업을 하고 구제에 힘쓰라고 충고합니다. 그들의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조차 여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둘째는 ‘마리아는 마땅히 할 일을 했다’ ‘마리아를 본 받고 싶다’ ‘마리아처럼 헌신하지 못하는 내가 부끄럽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생명을 바쳐 주님을 섬긴 순교자들을 흠모합니다. 복음의 불모지에 나아가 말씀을 전하는 선교사의 삶이 가장 아름답다고 여깁니다. 이들은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 되신 주님께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쉬운 마음뿐이라고 고백합니다. 내 헌신은 늘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것입니까? 그 차이는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아느냐 모르느냐는 차이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자기와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주님을 향한 헌신과 사랑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이고 대책 없는 광신이라고 비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죽으심이 바로 내 죄 때문이고 주의 못 박히심이 바로 내 허물 때문임을 아는 사람은 마리아의 헌신에 공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주님은 나의 전부 나의 모든 것이 되심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선교사님은 한국에서 교사를 하시다가 어느날 홀연히 나이지리아 선교사로 떠나셨습니다. 이 나라는 보코하람이라는 극렬 이슬람 테러 단체가 활동하고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곳입니다. 편지를 읽어 보니 자주 전기도 안 들어오고 물도 끊어진다고 합니다. 자녀들이 땀띠로 무척 고생한다는 말에 마음이 짠했습니다. 세상이 보기에는 이분은 정말 바보 같은 선택을 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같은 편지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언젠가 세계 선교 보고 대회에서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아프리카에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 필요합니다’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내가 그곳에서 빛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런 마음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십자가의 예수님이 그 선교사님에게 생명의 빛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선교 일선에서 아낌없이 남김없이 후회없이 자신을 주님께 드려 헌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자신을 드린 사역자들 중에서 ‘제 정신이냐?’ ‘미친 것 아니냐?’는 말을 한두 번 이상 안 들어 본 사람이 있을까요?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기회를 뻔히 알면서도 모두 다 마다하고 스스로 가난하고 힘든 길을 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장된 장래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루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섬김의 길을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이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까?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셨고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내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시고 내가 받아야 할 죽음을 대신 죽으신 주님이신데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드린다고 해도 아까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캠브리지 세븐의 한 사람으로 콩고 선교사로 헌신했던 찰스 스터드가 남긴 말을 기억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그분께 드리는 어떤 희생도 결코 크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앞에서 너무 큰 희생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무한한 가치를 드러나기 위해 하는 어떤 헌신, 어떤 희생도 낭비가 아닙니다. 엘리엇 여사는 남편 짐 엘리엇의 뒤를 이어 아우카 부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결국 그녀의 용서와 헌신에 감동을 받은 원주민 대다수가 복음을 영접했습니다. 그녀의 남편 짐 엘리엇 선교사의 일기장에는 이런 유명한 글귀가 남아 있었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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