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및 나눔/단상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답이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

이창무 2017. 12. 4.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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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불행은 죄가 원인일까요? 생각해 보면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가 알듯이 인간의 불행이 죄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는 어떤 질병도 장애도 죽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에는 암이 있고 세월호 같은 비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인간의 범죄가 있었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질병과 장애와 죽음이 함께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이런 질병과 장애와 죽음의 현실을 목도하면서 우리가 낙원을 잃어버렸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우리 몸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병 들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와 같다고 합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삶의 불행과 고통은 죄가 얼마나 치명적이고 무섭고 파괴적인가를 깨닫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원리를 가지고 각 개인의 삶에 적용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또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한 사람의 불행이 죄의 결과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인간을 질병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징계하시는 사례들을 종종 보여줍니다. 웃시야 왕은 인생 말년에 몹시 교만해져서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분향을 직접 하려는 월권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웃시야를 치셔서 나병에 걸리게 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침상 채 들려 온 중풍병자 역시 예수님께서 그에게 먼저 죄사함을 선포하신 것을 볼 때 죄가 원인이 되어 중풍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면 ‘모든 질병이나 인간적인 불행이 다 누군가의 특정한 죄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욥은 기왓장으로 온 몸을 득득 긁어댈 정도 지독한 피부병으로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이때 욥의 세 친구들이 와서 네가 죄가 있어서 이런 병에 걸렸으니 빨리 네 죄를 이실직고하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 친구들에게 너희가 틀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욥에게도 다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라고만 말씀하하실 뿐 이유를 설명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원인과 이유를 알고 싶어 합니다. 원인을 알아야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원인을 알고 책임을 규명하는 일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의 원인과 이유를 다 파악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세상에는 우리가 아무리 묻고 또 물어도 그 답을 알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왜 죄 없는 사람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번영을 누리는가?’입니다. 이는 욥이 던진 질문입니다. 또한 시편 기자는 수도 없이 이와 똑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선지자들 역시 같은 질문을 합니다. 우리도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우리가 너무 깊숙하게 빠져들다 보면 그 질문 자체가 함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답이 없는 질문이 우리를 과거의 사건에만 얽매여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온통 불행과 고통이 가득 찬 인간의 어두운 현실에 우리 마음을 가두어 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선하신 분이신가 전능하신 분이신가에 대한 의문에 사로잡히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주신 교훈 역시 ‘네가 어떻게 창조주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하려 하느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다 이해하고 납득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것입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라는 저명한 기독교 윤리학자가 있습니다. 그가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랑하던 아내가 심각한 정신 질환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는 날마다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야 했습니다. 연구를 하면서 동시에 아내를 간호하고 아들을 거의 혼자서 키우다시피 했습니다. 24년 동안 아내의 온갖 폭언과 기행을 참아 주었지만 결국 아내는 집을 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아내는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풀러 신학교의 한 강연에서 이런 자신의 삶을 담담히 말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그의 말이 답이 없는 인생을 오늘도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기독교 신자입니다. 사람들은 제가 이런 질문에 답변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전 이런 질문에 뭐라 답변해야 좋을지 전혀 모릅니다. 제가 기독교 신학자로 살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우리가 이런 질문에 답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 정도가 될 것입니다...... 정답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기독교를 설명으로 폄하시킬 뿐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답이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답이 없이 사는 방법을 배우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정말 훌륭한 일이 될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답을 모른 채 계속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너무 쉽게 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저의 주장이 최소한 제가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제 인생이 왜 무진장 흥미로운지를 설명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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