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예수님을 따라 순교한 스데반

이창무 2025. 3. 30.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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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사도행전 제 10 강 / 이창무

예수님을 따라 순교한 스데반

말씀 / 사도행전 7:1-60
요절 / 사도행전 7:59,60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정민 교수가 쓴 『미쳐야 미친다』라는 베스트셀러가 있었습니다. 이 제목은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에 미쳐야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의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이라는 사자성어에 따온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만나게 될 스데반! 그 역시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에 미쳐 있었을까요? 그는 복음에 미친 사람, 예수님께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 스데반은 예수님처럼 살았고, 결국 예수님처럼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이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복음은 말씀에 근거한 담대한 변증으로 증언됩니다.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7:1)

도대체 무엇이 사실이냐고 묻는 걸까요? 앞장인 6장을 보면, 스데반은 두 가지 혐의로 고소를 당했습니다. 첫째는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율법을 폐하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은 바로 이 두 가지 혐의를 두고, 스데반에게 따져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이 길고도 깊은 설교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이자 변론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2)

스데반은 먼저 아브라함 이야기로 설교의 문을 엽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신앙의 뿌리로 여긴 아브라함을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신 것은 하란이 아니라, 갈대아 우르—즉 이방 땅인 메소포타미아였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붙잡고 있던 '혈통'과 '땅 중심'의 신앙관을 송두리째 흔드는 선언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조차, 처음에는 우상을 섬기던 이방 땅에 있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을 뿐이다!” 스데반은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9-10)

스데반은 이어서 요셉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형들의 시기로 인해 요셉은 이방 땅, 애굽에 팔려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그와 함께 하셨고, 결국 애굽의 총리 자리까지 올리셔서, 가족과 민족을 구원하는 도구로 쓰십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의 생애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십자가에 넘겨지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을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 높이 드셨습니다. 스데반은 요셉을 통해,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35)

모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마흔 살에 동족을 구원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거절당하고 광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다시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이끌고 애굽을 탈출하는 위대한 지도자로 세우십니다. 예수님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외면당하고 거절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분이 되셨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스데반은 이 말씀의 성취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39)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이 되풀이했던 불순종의 역사를 정면으로 지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 모세를 거절했고, 결국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민족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바벨론 포로라는 심판의 길로 내어주셨습니다(43).

그러나 이 비극적인 역사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반복되는 실패와 배반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절정을 맞이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분마저 거절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고, 지금도 온 세상에 선포하십니다. “이 이름 외에는 구원받을 만한 이름이 없다!”

스데반의 설교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긴 복음 변증입니다. 언뜻 보면 한 편의 유대 역사 강의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설교는 그 이상입니다. 스데반이 거짓 고발 앞에서 목숨을 걸고 전한 마지막 변론이었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얼굴이 천사 같았던 그는, 이 설교를 통해 초대 교회를 변호했고,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음을 날카롭게 폭로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공회원들은 성경에 능통한 자들이었지만, 그의 말에 단 하나의 오류도 지적할 수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스데반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 있었고,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스데반처럼 돌에 맞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기독교는 오늘도 댓글과 조롱, 냉소와 무관심이라는 돌에 맞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우리에게도 스데반처럼 ‘변증’이 필요합니다. 그저 감정에 호소하거나, 막연한 확신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말씀에 철저히 기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며, 담대하고 진실한 변증 말입니다.

만약 누군가 우리에게“왜 교회 다니세요?”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 맞습니까?” “성경을 왜 믿어요?” 묻는다면, 그 질문에 우리는 과연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스데반처럼 분명하게, “내가 믿는 바가 이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게… 말이죠…” 하며 말문이 막힐까요?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믿는 바를 말할 수 있고, 그 믿음을 삶으로 증명해내는 사람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스데반처럼 말씀 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말씀을 배우고, 깊이 묵상합시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냅시다. 우리의 말과 삶이 하나 되어,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이 시대의 변증자가 됩시다. 오늘 이 시대,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2. 복음의 본질은 형식이 아닌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49-50)

스데반은 유대인들이 성전을 지나치게 신성시하며 집착하는 태도를 지적합니다. 성전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는 참된 성전은 사람이 만든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곳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곳은 예루살렘이 아닌 갈대아 우르였고, 모세를 부르신 곳도 시내산의 떨기나무였습니다. 광야에서는 텐트처럼 옮겨 다니는 성막을 통해 하나님이 백성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이 모든 장소가 거룩했던 이유는 단 하나,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건물이나 장소에 제한받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는 곳, 바로 그곳이 성전입니다. 그리고 이 성전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실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참 성전이십니다.

하지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건물로서의 성전을 절대화하며 하나님을 마치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둘 수 있는 존재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틀과 체계 속에 갇히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진심으로 그분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과 함께하십니다. 그분은 광야 한가운데서도, 이방 땅의 낮은 자리에서도, 핍박받는 자의 눈물 속에서도 임재하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런 이들이 모이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스데반의 설교는 절정을 향해 치닫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51)

그는 유대 지도자들을 향해 외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이것은 단순한 분노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들의 완고함과 독선에 대한 예언자적 질책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조상들이 요셉과 모세를 거절했듯, 지금도 그 후손들이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으며, 성령의 역사까지도 대적하고 있다고 폭로합니다.

스데반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도전이 됩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에 집착하고 있습니까? 구조나 형식, 익숙한 프로그램과 전통들, 혹은 자기 나름의 틀 안에서 하나님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자유롭게 움직이시고 역사하십니다. 진정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르기 원한다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 역시 새로워져야 합니다.

건물로서의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임재는 성령을 통해 지금 우리의 심령 가운데, 삶의 자리 가운데 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벽돌로 세워진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는 공동체입니다. 형식과 전통에 머물다 낡은 가죽 부대가 되지 않는 것! 날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는 삶! 곧 말씀에 의해 우리의 내면이 변화되고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삶! 이것이 스데반이 목숨 걸고 전하고자 했던 진리이며, 오늘 우리도 붙들어야 할 복음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자유롭게 역사하시고 새 일을 이루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우리 기준에 가두지 않고, 주님과 함께 움직이는 교회가 될 때, 우리는 살아 있는 성전이 될 것입니다. 스데반이 붙들었던 이 진리를 우리도 붙들며, 하나님의 임재를 날마다 경험하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3. 복음은 예수님을 닮은 사람을 통해 열매를 맺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54)

스데반의 설교가 끝나자 공회는 충격에 빠집니다. 그들은 “마음에 찔려” 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평범한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려 회개하며 세례를 받았지만, 지금 이 자리의 종교 지도자들은 마음의 찔림을 자신들의 권위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는 이를 갈며, 스데반을 제거하려는 분노로 치닫습니다. 이는 마치 출애굽기에서 바로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마음을 굳게 했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 앞에서 그들은 마음을 열지 않았고, 오히려 더 강퍅해졌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스데반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봅니다(55). 성경은 대부분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기록하지만, 여기서는 ‘서 계신다’고 말합니다. 왜일까요? 어떤 해석은 예수님께서 스데반을 맞이하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셨다고 설명합니다. 또 어떤 해석은 예수님께서 스데반을 변호하시고 지지하시기 위해 일어나셨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스데반의 마지막 증언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하늘에서 그를 주목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스데반은 외칩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그러나 사람들은 은혜를 받기는커녕, 두 귀를 틀어막고 큰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습니다. 그 모습이 꼭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 같았습니다. 결국 이런 자들은 성령 충만한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내 돌로 쳤습니다. 거짓 증인들은 자기 겉옷을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이는 사울이 그 사건의 주도자였으며, 스데반의 죽음에 적극적으로 동의했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그 순간,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가 터져 나옵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리라"(59-60)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드리신 기도와 똑같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도가 고통의 절정 속에서도 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평소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 전체가 예수님으로 가득했기에, 죽음의 순간에도 예수님의 마음과 자세가 스며나왔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완전히 사로잡힌, ‘예수님께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곁에서 지켜보던 사울, 곧 훗날의 바울에게 지울 수 없는 충격을 남겼습니다. 스데반의 얼굴, 그의 기도, 하늘을 바라보는 눈빛—그 모든 장면이 사울의 마음 깊은 곳에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훗날 고백합니다. “나는 빚진 자라.” 그는 이렇게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스데반의 몫까지 살아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다해 복음을 전하며, 스데반이 걸었던 길을 따라갔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초대교회에 큰 충격이었지만, 동시에 놀라운 각성과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복음은 예루살렘을 넘어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까지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세례 요한의 죽음이 예수님의 공생애를 여는 문이 되었던 것처럼, 스데반의 죽음은 바울을 통한 이방 선교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단지 우리의 삶을 통해서만 일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고난도, 심지어 죽음조차도 그분의 손 안에서는 귀한 도구가 됩니다. 주님의 역사는 고난 앞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새로운 일이 시작됩니다. 죽음 같아 보이는 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생명을 일으키시고, 역사의 새로운 장을 펼쳐가십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스데반의 삶은 깊은 울림과 도전을 줍니다. 스데반의 삶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단순히 머리로 아는 지식인이 아니었습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묵상했고, 복음을 마음에 새겼으며, 예수님의 길을 실제로 걸으려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예수님처럼 살았고, 예수님처럼 죽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사랑하고, 복음을 가슴에 품으며, 일상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향기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해와 조롱, 핍박이 있어도 진리를 포기하지 않고, 원수를 품으며, 끝까지 믿음을 지켜내는 삶—그것이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입니다. 우리 안에도 스데반처럼 담대한 믿음과 순결한 사랑이 다시 살아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말합니다. “스데반처럼 사는 건 너무 어렵습니다. 세상이 너무 악하고, 사람들의 시선도 두렵고, 나 하나 살아가는 것도 버겁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스데반이 특별해서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특별하게 만든 단 하나의 차이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붙들린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했고, 말씀으로 깊이 채워져 있었기에, 어떤 상황 속에서도 두려움을 이기고 생명의 복음을 끝까지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를 바라보며, 무엇에 붙들려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주위를 둘러 보면 뭔가에 미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미쳐 있고 어떤 사람은 도박에 미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식음을 전폐하고 게임에 미쳐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법으로 처방 받은 약을 먹여가며 공부를 시킬 정도로 자녀의 성공과 출세에 미쳐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치지 않고서는 목표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왕 미칠거면 제대로 미쳐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복음에 미친 사람, 예수님께 사로 잡힌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리스도의 인격이 그 사람 안에 빚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에 발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올해 초부터 우리는 각 사람이 이런 사람이 되기를 기도해 왔습니다. 안암 1부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만들어서 퍼트리는 향기 공장이 되자고 다짐해 왔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가 곧 주님의 교회이며, 이 땅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통해 이 땅을 회복하시고,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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