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이창무 2025. 3. 30.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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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사도행전 제 9 강 / 이창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말씀/ 사도행전 6:1-15
요절/ 사도행전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에게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교회는 우리에게 편안하고 따뜻한 안식처입니까? 많은 경우,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은혜로 가득한 공동체 안에서도 때때로 예기치 않은 긴장감이 스며들 때가 있습니다. 아주 작은 갈등에서 비롯된 균열이, 오히려 공동체 전체에 어려움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러한 위기를 경험한 초대 교회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그 상황을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해 나갔을까요? 오늘 말씀을 함께 묵상하며,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생길 수 있는 크고 작은 오해들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마음과 자세로 교회를 함께 세워가야 할지를 깊이 깨닫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1. 사랑의 공동체에서도 갈등은 생길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6:1)

그때에 제자의 수가 더욱 많아졌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교회가 이미 급속한 성장을 경험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인해 날마다 수천 명씩 믿는 이들이 더해지는 놀라운 부흥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면 그만큼 새로운 도전과 예상하지 못한 문제들도 함께 찾아오게 됩니다. 초대 교회 역시 그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한 가지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 문제는 구제 사역과 관련된 갈등이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서 제외되고 있다며 히브리파 유대인들에 대해 불만을 제기한 것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 출신으로 헬라어를 사용했습니다. 문화적으로도 헬라화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토박이로 전통 유대 문화를 따랐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예루살렘 교회 내 헬라파 유대인의 비율은 약 10~20%였고, 대다수는 히브리파 유대인이었다고 합니다. 이 두 그룹 사이 언어적 장벽과 문화적 차이로 인해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생겼고, 그로 인해 오해가 누적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이 반복적으로 구제 명단에서 누락되는 일이 생기면서, 의도치 않게 깊은 상처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서운함은 원망으로 번졌고, 공동체 안에 갈등의 조짐이 피어났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초대 교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한 분이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가장 널리 퍼진 병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섭섭병’입니다.” 교회 안에는 ‘나, 좀 섭섭했습니다’라는 말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간혹 이런 상황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양회에서 방 배정과 같은 사소한 문제로 “왜 저 분들은 좋은 방을 쓰고, 우리는 이 방이냐”며 불편한 감정이 생기기도 합니다. 사실은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마음의 간극이 생기면 오해는 쉽게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작은 섭섭함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원망이 되고, 원망이 깊어지면 결국 갈등과 분열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교회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이와 갈등을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인도하심과 지혜로 극복해 나갈 수 있을까요? 바로 이 질문이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초대 교회가 맞이했던 이 갈등 앞에서, 사도들은 어떤 기준과 원칙으로 그 상황을 해결해 나갔을까요?

2. 교회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꾼을 세울 때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2)

먼저 사도들은 온 교회 공동체를 소집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이 표현은 자칫 사도들이 구제 사역을 경시하는 듯한 뉘앙스로 들릴 수 있지만, 원문의 의미는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구제 사역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주어진 본래의 사명, 곧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역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이어서 사도들은 구제 사역을 전담하여 섬길 일곱 명을 따로 세우자는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사도들이 제시한 선발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3-4)

우리는 일반적으로 음식을 나누고 재정을 관리하는 일이라 하면 계산이 빠르고, 체계적으로 일할 줄 아는 사람, 혹은 엑셀을 능숙하게 다루고 조직 관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세운 기준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 기준은 바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공동체로부터 칭찬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기준을 세웠을까요? 그것은 구제 사역이 단순히 물질을 나누는 기술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드러내는, 매우 영적인 사역입니다. 누구에게, 얼마만큼, 어떤 방식으로 도울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은 공동체 안의 민감한 감정과 상황을 아우르는 섬세함이 요구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오해와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역을 맡을 사람은 무엇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를 줄 아는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지혜로 공동체를 세우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가 신뢰하고 존중하는 사람, 다시 말해 삶으로 신앙과 영성을 증명해 온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도들은 단지 자신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이것을 제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이 여러 사역을 동시에 감당하면, 결국 말씀과 기도에 집중할 수 없게 됩니다. 그 결과 말씀이 약화되면 말씀의 은혜가 점점 고갈됩니다. 그 말씀을 통해 살아가는 공동체의 심령이 메말라 가게 됩니다. 그럴 경우 공동체는 더욱 흔들리고, 갈등은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분명히 하며,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겠다”는 방향을 세운 것입니다.

사도들의 이러한 제안에 대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5-6)

회중은 사도들의 제안을 모두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온 교회가 함께 일곱 명의 사람을 택하여 세웠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 선택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믿음과 성령의 충만함을 겸비한, 신실하고 존경받는 이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 일곱 명의 이름을 살펴보면, 모두 헬라식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그들 대다수가 헬라파 유대인 출신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왜 이것이 중요할까요? 이번 갈등은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이 구제에서 소외되었다고 느끼며 불만을 토로했던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상황과 아픔을 가장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 곧 같은 문화적 배경을 가진 헬라파 신자들 가운데서 일꾼을 세운 것은 매우 지혜로운 결정이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은혜로운 마무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는 단지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상처 입은 자의 마음까지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공동체의 품격을 세운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7)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 사역에 집중하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꾼들이 구제와 행정 사역을 충실히 감당하자, 교회 안에 있던 원망과 갈등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이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힘 있게 역사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교회는 이전보다 더 크게 성장하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심지어 이전까지는 복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고, 사도들에게도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던 제사장들 중에서도 회심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온 것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안티 기독교 운동을 하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회심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강력하게 역사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원망의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세 가지 원칙을 배우게 됩니다.

첫째, 원망의 문제를 간과하거나 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들은 이 상황에 대해 “우리의 책임이 아니다”라고 회피하거나,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고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미 발생한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집중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공동체 안에 원망과 시비가 생겼을 때, 하나님의 방법은 그 문제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 있는 태도로 적극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입니다.

둘째, 사역의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문제가 생기면 모든 사역을 멈추고, 오직 문제 해결에만 집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들의 사명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천사가 옥문을 열어주며 들려준 말씀,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는 명령을 여전히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어려움과 갈등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본래의 부르심과 사명을 붙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셋째,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동역자를 세워야 합니다.
초기에는 사도들이 공동체의 모든 일을 직접 감당할 수 있었지만, 교회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모든 사역을 혼자 감당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사도들은 사역을 분담하고, 각 역할에 맞는 은사와 믿음을 지닌 이들을 세움으로써 공동체를 더욱 건강하게 세워 갔습니다. 그 결과 원망과 갈등도 자연스럽게 해소되었고, 교회는 더욱 든든히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며 함께 동역하는 것, 그것이 바로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길임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오는 4월 5일과 6일, 1박 2일 일정으로 봄 수양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번에 하나님께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분의 부장단 목자님들, 그리고 중보기도팀의 장허드슨 목자님까지 더하여, 말 그대로 7+1 드림팀을 세워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각 목자님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실제적인 사역들을 책임감 있게 섬겨 주시고, 기도로 이끌어 주시는 덕분에 저는 보다 온전히 말씀 준비에 집중할 수 있는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번 봄 수양회가 서로 원망 없이,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의 수양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함께 묵상할 요나서의 말씀이 우리 각 사람의 심령에 깊이 역사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다시 일어서는 말씀의 부흥이 일어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3. 하나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일꾼을 통해 교회를 세워가십니다

이제부터는 초대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진 일곱 명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 한 사람에게 집중해 보려 합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스데반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8)

‘권능이 충만한 사람’은 강하고 단호한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가까이 가기 어려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반대로 ‘은혜가 충만한 사람’은 따뜻하고 부드럽지만, 현실에서는 약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 두 가지가 함께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부드러움과 강인함, 사랑과 담대함이 조화를 이루는 사람. 그는 ‘소프트함과 파워풀함의 환상적인 조합’을 보여주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미 앞선 3절에서는 그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으로, 5절에서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묘사를 종합해 보면, 스데반은 성령, 믿음, 지혜, 은혜, 권능—그 모든 면에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각 영역이 고르게 발달된 ‘육각형 인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쓰시기에 합당한 온전한 일꾼의 모범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데반은 복음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분명하게 변호할 수 있는 변증의 능력까지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9)

스데반은 이른바 자유민들의 회당에 속한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여기서 ‘자유민’이란 과거 노예였다가 해방된 이들의 후손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구레네,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 아시아 등 이방 지역에서 어렵고 험난한 삶을 살아오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더욱 철저히 율법과 전통을 고수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유민들은 아마도 성전과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그 자리에서 담대하게 복음의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메시아, 구세주이십니다!”

이 논쟁에서 누가 이겼을까요?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10)

결국 스데반의 완승이었습니다. 그가 전한 복음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성령과 지혜로 충만한, 힘 있는 진리의 말씀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논리로 반박하거나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밀려서, 스스로 ‘GG(굿 게임)’를 선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데반이 전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짓 증인을 내세워 스데반을 고소하기에 이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장면입니다. 그들이 들고나온 죄목은 바로 모세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십계명 중 제9계명,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계명을 스스로 어기고 있었습니다. 실상은 누가 모세를, 누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었던 것입니까?

이 억울한 상황 속에서 스데반은 얼마나 억울하고 분노가 치밀었을까요? 또, 재판정에 끌려간다는 사실에 두려움이 몰려오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성경은 그 재판정에서의 스데반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15)

지금 스데반 앞에는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두려움 대신 담대함이, 분노 대신 사랑이, 근심 대신 평안이 머무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같은 얼굴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모습이 가능했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특별한 평안과 위로가 그와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시선과 판단을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며, 진리 위에 우뚝 선 사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런 스데반은 사도들과 비교해서 어디 하나 부족한 부분이 보이지 않습니다. 더 뛰어난 점도 있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이 나서서 이제부터 나도 사도를 하겠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이것이 더 교회에 유익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스데반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저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그 자리에서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직분을 맡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스데반의 삶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일꾼의 분명한 기준을 다시 한 번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믿음과 은혜, 능력이 조화를 이루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공동체의 신뢰를 얻고, 주님의 마음으로 사역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시기심이 충만하고, 욕심으로 움직이며, 쉽게 분노하고 혈기를 앞세우는 사람입니다. 만약 이러한 사람이 교회 안에서 직분을 맡게 된다면, 그곳에는 원망과 불평이 끊이지 않게 되고, 모일 때마다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나는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갈등을 품고, 치유하며, 공동체를 세워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인가? 말뿐인 일꾼이 아니라, 말씀 앞에 순종하는 일꾼.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며, 지혜로 사람을 품을 줄 아는 일꾼.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사람. 하나님은 오늘도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이 시대의 스데반이 되어,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는 귀한 일꾼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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