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사도행전 제 7 강 / 이창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말씀 / 사도행전 4:32-5:16
요절 / 사도행전 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우리는 보통 두려움을 부정적인 감정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때로는 건강한 두려움이 우리를 보호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운전을 할 때 교통법규를 어기면 사고가 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기에 우리는 신호를 지키고 안전하게 운전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쇼킹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행 5:11)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온 교회가 두려움에 휩싸였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두려움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초대교회의 모습 속에서 교회 공동체가 지녀야 할 세 가지 본질적인 모습에 대해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교회는 사랑과 나눔이 있는 공동체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수천 명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교회 공동체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떡을 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교회는 빠르게 성장했고, 성령의 임재로 가득한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때마다 사탄의 도전도 뒤따르는 법입니다. 초대교회가 직면한 첫 번째 도전은 외부에서 온 박해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이 계속 전파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사도들을 잡아 가두고 위협하며 복음을 막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박해는 교회를 위축시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더욱 강해지고 믿음은 굳건해졌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어떤 모습이 되었습니까?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4:32)
사도행전에는 그들이 가진 것을 함께 사용하고,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한 가족처럼 서로의 필요를 돌아보며 헌신했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나눔의 결과로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는 부족함을 겪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33)
이들이 부활의 복음을 듣고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한 순간, 더 이상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는 영원한 소망이었습니다. 이 소망이 물질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기꺼이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게 했습니다.
흔히 초대교회의 나눔을 공산주의와 비교하는 경우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개인의 재산을 국가가 강제로 몰수하고 평등을 강요하지만, 초대교회의 나눔은 전적으로 자발적이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인해 각 성도가 기쁨으로 자신의 것을 내려놓았기에 억압이나 불만이 아닌 감사와 사랑이 넘쳤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만든 체제는 결국 불평등과 권력 남용으로 이어졌지만, 초대교회의 나눔은 강요가 아닌 은혜로 이루어졌기에 기쁨과 자유를 가져왔습니다.
이러한 공동체 속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인물이 있습니다. 누구였을까요?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36-37)
바로 바나바입니다. 본래 그의 이름은 요셉이었지만, 사도들은 그에게 ‘바나바’(위로의 아들)라는 닉네임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밭을 팔아 그 대금을 사도들에게 맡겼고,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며 복음 사역에 헌신했습니다. 특별히 바울이 처음 회심했을 때, 그를 사도들에게 소개하며 복음 사역에 설 수 있도록 도운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고, 어리고 연약했던 마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줘서 결국 훌륭한 목자로 키워낸 것도 바나바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주의와 개인주의가 깊이 뿌리내린 사회에서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 경쟁하며, 남을 돕기보다 자신을 챙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우리에게 교회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교회는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곳이며, 강요가 아닌 은혜의 역사로 자발적인 섬김이 이루어지는 공동체입니다.
많은 목자님들이 학창시절 처음 예수님을 만나 은혜를 받고 나면 장막에서 공동생활을 했습니다. 개인적인 욕심과 이기적인 마음을 모두 내려놓고, 한 장막 아래에서 식사를 함께 나누고 한 이불 아래 잠들면서 서로를 섬겼습니다. 돌아가며 식사 준비를 맡고, 동역자들을 위해 정성껏 도시락을 싸는 분도 있었습니다. 양말을 한꺼번에 빨아서 서로 구별 없이 함께 나누어 신기도 했습니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모두는 행복했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이렇게까지 서로 섬기고 나눌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너무나 크고 놀라웠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 마음에 깊이 새겨졌기에 나의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는 일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UBF 공동체를 두고 '초대교회의 DNA를 가장 잘 이어받은 사랑의 공동체'라고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초대교회 DNA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지난 12월, 많은 분들의 헌신을 통해 구제 헌금을 모아 김요한 목자님과 비탈리 마르크 선교사님과 해외 선교를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지난 해 여름 수양회에서 많은 분들이 기부를 해 주신 덕분에 가족이 많은 집의 부담을 덜 수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많은 섬김이 있습니다. 이처럼 함께 기도하며 마음을 모아 사랑을 실천할 때, 교회는 더욱 든든히 세워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바나바가 그랬듯이, 우리가 흘려보낸 사랑과 나눔이 누군가를 살리고, 세우고, 복음이 확장되는 귀한 열매로 맺힐 것입니다.
2. 교회는 거짓과 위선을 배척하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나눔과 헌신이 살아 있는 초대 교회의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사도행전 5장은 충격적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다 헌금을 드리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일부를 감추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 사건은 앞서 등장했던 바나바의 헌신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밭을 팔아 전부를 기꺼이 교회에 드렸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마치 전부를 드린 것처럼 꾸미면서 일부를 숨겼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동일한 행동처럼 보였으나, 그들의 동기와 마음가짐은 전혀 달랐습니다.
대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속마음에는 뭐가 있었을까요? 그들의 마음속에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과 물질에 대한 집착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바나바가 '리스펙'받는 걸 보면서, '우리도 저렇게 칭찬받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할 믿음은 부족했고, 결국 위선과 거짓으로 자신을 꾸미려 했습니다. 그 순간, 성령께서 이 모든 것을 스캔하셨고, 베드로에게 이들의 죄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5:3)
베드로는 이 사건이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사탄의 역사와 관련된 것임을 지적했습니다. 사탄은 교회의 거룩함을 무너뜨리기 위해, 성도들 사이의 신뢰를 깨뜨리기 위해, 성령의 역사에 틈을 만들기 위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마음속에 교묘한 유혹을 심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개인적 일탈 사건 정도만으로 볼 수 없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앞으로 교회가 사느냐 죽느냐가 달려 있는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아울러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속이느냐?’라고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찌하여 성령을 속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의 주인은 베드로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고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속인 것은 결국 그 곳에 임재하시는 성령님을 속인 것입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4)
베드로는 분명히 말합니다. 헌금은 자발적인 것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억지로 드리는 헌신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에서 비롯된 헌신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헌신 코스프레'를 했을 뿐, 속마음은 딴판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거짓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5)
베드로의 ‘팩트 폭격’을 받자마자 아나니아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같은 거짓말을 했던 삽비라 역시 동일한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한 교회 공동체는 큰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읽을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아나니아가 교회에서 헌금을 훔쳐간 것도 아니고 헌금을 드렸는데. 물론 물질을 좀 감춘 죄가 있기는 하지만 죽게까지 하시는가?”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대체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초강수'를 두셨을까요?
초대교회는 이제 막 태동하는 시기였습니다. 첫 단추가 중요합니다. 만약 이런 거짓과 위선이 용납된다면, 공동체 전체가 타락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 사람 앞에서 신앙 생활하는 위선이 순식간에 퍼지고 말 것입니다. 성도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고 교회는 분열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방금 태어난 교회의 거룩함과 순결함을 지키기 위해 이 사건을 통해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두려움을 나쁜 두려움이 아니라 좋은 두려움입니다. 사람이 두려움을 상실하면 어떻게 됩니까? 빨리 죽을 확률이 높아집니다. 우리가 생존하려면 두려워할 만한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를 죄로부터 지키고 바른 길을 가게 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요셉입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일하며 신뢰를 받던 요셉은, 어느 날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낯선 땅에 끌려온 요셉에게는 순간적인 타협이 더 쉬운 선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이 더 두려웠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그는 인간적인 계산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행동했습니다. 결국 그는 빠르게 손절하고 도망쳤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순간적인 유혹 앞에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쉽게 죄에 빠지고 고의든 아니든 공동체 전체 큰 해악을 끼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아간 사건' (여호수아 7장)입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후, 하나님께 바쳐야 할 전리품을 아간이 몰래 숨겼을 때, 그 한 사람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간을 징벌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초대교회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거짓과 위선을 단호하게 다루심으로써, 성령이 다스리는 공동체는 거룩해야 한다는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거룩성과 진실성에 있습니다. 교회가 다른 모임보다 부족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께 하실 수 있는 이유는 교회가 거룩하고 성도들이 진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앞에서 진실되게 죄를 회개합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고자 몸부림을 칩니다. 이것이 교회의 힘이요, 생명력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거짓과 속임수가 난무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일을 해 간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실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너의 마음 중심을 꿰뚫어 보고 계신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거짓과 위선을 속히 회개하고 돌이키라.” 이 말씀을 듣고 진실하게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죄를 합리화하며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결국 큰 화를 당하고 후회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우리는 회개의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 회개를 미루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곧 하나님을 향한 깊은 경외심을 허락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 교회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공동체입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12)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이후, 초대교회는 다시 ‘원팀’이 되어 솔로몬 행각에 모였습니다. 비록 내부의 거짓과 위선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었지만, 교회는 이를 바로잡았습니다. 다시금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사도들을 통해 놀라운 표적과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이에 대해 세상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13-14)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거룩함을 보고 두려워하며 멀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 거룩함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또 다른 사람들은 교회의 진정성을 보고 더욱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실제로 나타나는 곳, 거짓 없이 진실한 믿음을 지키는 공동체야말로 참된 소망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15-16)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베드로를 통한 미라클 힐링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병자를 데리고 나와 길가에 두었고, 심지어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바랄 정도로 그의 사역을 신뢰했습니다.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귀신 들린 사람들이 자유를 얻는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와, 여긴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신다!'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주 우리 가운데서도 미라클한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바로 목자 선서식을 통해 여덞 명의 새로운 목자들이 공식적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요즘과 같은 시대에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기억하며 양들을 돌보는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목자가 선다는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이 새로운 목자들을 진심으로 뜨겁게 축복하고 격려하는 모습을 보며 큰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 교회의 주인이신 성령님께서 이루신 역사입니다. 우리 러너스가 계속해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거룩한 공동체로 세워져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초대교회는 완벽한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위기와 도전이 있었고, 내부적인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초대교회가 세 가지 중요한 요소를 중심으로 성장해 나갔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초대교회는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였습니다. 성도들은 '통 큰 헌신'으로 재산을 팔아 서로를 도왔고,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부족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둘째, 초대교회는 거룩함을 지켜낸 공동체였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해 거짓과 위선이 용납되지 않음을 보여주었고,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순결함을 위해 직접 개입하셨습니다.
셋째, 초대교회는 성령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나는 공동체였습니다. 믿는 자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시는 모습이 드러나며, 그 능력이 교회를 더욱 단단하게 세워갔습니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찰떡같이 조합을 이루었을 때, 초대교회는 더욱 강력한 하나님의 공동체로 서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동일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사랑과 나눔이 넘치는 공동체, 거룩함을 지켜내는 공동체, 그리고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공동체로 세워가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 진실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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