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사도행전 제 5 강 / 이창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말씀 / 사도행전 3:1-26
요절 / 사도행전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서론>
이름이 가진 힘이 얼마나 될까요? 겨우 이름 하나가 뭐 대단한가 싶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이름은 상당히 큰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이름은 문을 열어 주고, 어떤 이름은 사람을 움직이며, 또 어떤 이름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예를 들면, 경찰서에서 “제가 검사입니다” 한 마디만 해도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병원에서 “제가 교수입니다” 하면 대우가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이름은 무엇일까요?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하늘의 권세와 능력이 담긴 이름! 어둠이 떨고, 병이 떠나가고, 죄가 사함을 받는 이름!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전도할 때마다, 영적 싸움 속에서 붙드는 그 이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예수님의 이름이 가진 권세에 대해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큰 이름인가? 그리고 우리는 이 이름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 기대하는 마음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1. 주저 앉은 우리를 일으키시는 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1-2)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가던 어느 날, 미문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평생을 남의 손에 의지해 살아야 했습니다. 성전 문 앞에서 사람들에게 구걸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했습니다. 아침마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성전 문가로 오고, 저녁이 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반복되는 삶. 희망 없는 삶, 변화 없는 삶을 그저 그렇게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지나가다가 멈춰 섰습니다. 그는 당연히 동전 몇 닢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6)
앞부분만 들으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줄 돈이 없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어지는 다음 말씀에서 드러났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돈은 없지만, 일어나 걸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베드로가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 순간, 그의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그는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걷는 정도가 아니라 뛰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순간을 눈앞에 떠올려 보십시오. 평생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던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을 말입니다. “아니, 저 사람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그 사람이 아니야?”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를 바라봤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이름에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가진 것은 은과 금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은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돈이 그 사람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좋은 말이나 동정도 그를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이 그를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인생에서 절망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같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 변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주저앉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에는 새로운 시작을 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들 때, 무너졌던 삶이 다시 일어납니다. 멈춰 있던 걸음이 다시 시작됩니다.
또한, 이 기적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의지한 사람들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이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는 능력임을 알았기에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능력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할 때, 우리의 삶도 변화될 뿐만 아니라,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지난 전국 학생 수양회에서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변화된 인생을 살게 된 한 분의 인생 소감 발표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어린 시절 매우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초등학교 때부터 극심한 외로움과 상실감을 겪었습니다. 자살 충동과 불안장애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방황하는 그에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본문 속의 두 명의 사도처럼 어느 은퇴한 크리스천 부부가 이분에게 주목하고 따뜻한 사랑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이분은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동아리 박람회를 통해 UBF를 만나 성경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여러 목자님의 돌봄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서서히 열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돌아보며 회개했습니다. 이후 그는 하나님을 자신의 영원한 아버지로 고백하며 믿음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에도 삶 속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려 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갑상선 혹 진단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하심과 기도의 응답을 경험했습니다. 또한, 믿지 않던 고등학교 때 친구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려고 했으나 카카오톡 친구 차단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일년 후 스스로 성경책을 사서 예배에 참석하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이제 앞으로 어릴 적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효도하는 삶을 살려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저는 이분의 인생 소감을 듣고 나서 광고를 해야 하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서 광고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여전히 이 시대 청년 대학생에게 구원의 이름, 능력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이 놀라운 이름을 의지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주저앉아 있는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일어나 걷고, 뛰고, 찬양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드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2. 망가진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자, 사람들은 놀라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저 사람을 매일 성전 문 앞에서 봤는데, 한 번도 걸은 적이 없던 사람인데, 어떻게 갑자기 저렇게 뛰어다닐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충격과 경이로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입을 열었습니다. “이 사람을 우리가 고친 줄 아십니까? 우리의 능력이나 경건함 때문에 그가 걷게 된 줄로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16)
베드로는 이 기적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 사람을 온전하게 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라고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다시 살리셨고, 지금도 살아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 살아 계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이 사람을 온전하게 했습니다. 사실 이 사람은 자신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단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된 말씀을 듣고 손을 내밀어 붙잡았을 뿐입니다. 그의 온전함은 그의 힘이나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이름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는 아픔과 부족함이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온전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손을 붙잡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하게 합니다. 이 걷지 못했던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 일어나 걸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믿을 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번 학생 수양회에서는 앞서 소감 발표를 했던 분을 한때 차단했던 친구의 인생 소감 발표도 있었습니다. 이분은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공부를 내팽개치고 학생이 하면 안 되는 일을 골라서 다 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기초생활수급자인 부모님의 희생 속에서 부족함을 못 느낀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전교 150등에서 1등으로 성적이 수직상승했습니다. 그는 재수 끝에 고려대학교에 입학하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명문대 진학과 자격증 취득, 철학과로 전과 등 많은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가난 속에서 사람들에게 받은 무시와 상처로 인해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불신으로 괴로워했습니다.
그 와중에 철학과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며 절대자를 찾고자 깊은 고민을 했습니다. 하지만 곧 여기에 한계를 느끼고 나를 만드신 인격적인 신이 계신 것 같다는 어렴풋한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 공부를 제안했다는 이유로 일년 전 차단했던 고등학교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스스로 성경책을 사서 이 친구를 찾아갔습니다.이후 성경 공부를 꾸준히 하면서 하나님이 절대자로서 자신의 인생을 돌보셨음을 깨달았습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화평과 기쁨을 경험했습니다. 저에게 이분이 소감 마지막에 고백한 이 말이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도와줄 것 같지 않을 때, 이 세상에 내 편은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유일하게 위로하는 건 성경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힘들 때면 성경만 붙잡았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부족합니까? 혹시 해결되지 않는 상처와 아픔이 있습니까? 혹시 죄책감과 후회로 인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성경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 이름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온전하게 합니다. 베드로가 외쳤던 것처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늘도 그 이름을 믿고 담대히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3. 우리의 죄를 씻고 새롭게 하는 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17)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들에게 길을 열어두셨습니다. “너희가 무지하여 그렇게 한 줄 안다.” 베드로의 이 말 속에는 깊은 하나님의 자비가 담겨 있었습니다. 실수하고 넘어졌지만, 여전히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19)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실수를 하고, 때로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잘못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성경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19절의 “새롭게 되는 날”은 영어 성경에 보면 “that times of refreshing”입니다. 개역 한글판 성경에서는 “유쾌하게 되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원어를 보면 “숨통이 트이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고통 때문에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사람이 비로소 숨을 쉬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까지 쌓인 죄 때문에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는데 숨통이 트여서 이제 제대로 숨을 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유쾌, 상쾌, 통쾌하겠습니까? 우리가 회개하고 죄 사함 받을 때 이런 감격을 맛보게 됩니다. 과거의 모든 수치스런 죄의 목록이 다 말소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에서는 회개에 대한 설교가 점점 줄어드는 현상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목회자를 청빙할 때 "회개 설교를 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내세우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는 회개에 대한 큰 오해이며, 왜곡입니다. 회개는 죄를 없애고, 우리를 새롭게 하며, 참된 희망을 주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그분의 종을 보내셔서 여러분을 복 주시려 하셨습니다. 그가 여러분을 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단순히 좋은 말씀을 전하고, 기적을 베푸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번 학생수양회 주제강의 강사 중 한 분은 UBF 스텝 목자님의 자녀였습니다. 이분은 믿음의 가정 안에서 행복하게 자랐습니다. 하지만, 청년 시절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욕망을 앞세웠습니다. 성령보다 감정에 이끌려 한 자매와 잘못된 관계에 빠졌고, 그것을 교회에 숨기며 거짓으로 일관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드러내셨고, 결국 모든 것이 깨어지는 아픔을 통해 자신을 낮추게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알지 못하여 그렇게 했으나 하나님께서 여전히 회개의 길을 열어두셨다”고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회복의 길로 부르셨습니다.
그는 아픔 속에서 자신의 교만과 죄를 깨닫고, 진정한 복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년 전국학생수양회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용서를 깊이 경험했습니다. 그 순간 억눌렸던 죄책감과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새롭게 되는 날’을 맞이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마치 숨통이 트이는 것처럼 자유와 평안으로 가득 찼고, 하나님 앞에서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변화된 모습을 본 불신자 친구가 하나님을 궁금해하며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고, 하나님은 그를 인도 선교사로 부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믿음의 배우자를 만나게 하셔서, 함께 복음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는 힌두교 문화 속에서 길 잃은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이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증거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시대를 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것들이 무너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 죄와 갈등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돌아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새롭게 하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실수할 수 있습니다. 한때 방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회개의 길을 열어 두십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결단합시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 삶 가운데 새로운 시대를 여시는 은혜를 경험합시다.
<결론>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이 가진 권세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이름이 절망에 앉아 있던 자를 일으키셨고, 부족한 자를 온전하게 하셨으며, 죄로 무너진 인생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단순한 종교적 문구가 아닙니다. 우리가 힘들 때 위로 삼는 주문도 아닙니다. 이 이름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으며,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질문은 단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이름을 어떻게 사용할 것입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시다. 우리가 삶의 어려움 속에서 싸울 때,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합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의 이름을 담대히 선포합시다. 그 이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이름을 붙드는 자는 절대 쓰러지지 않습니다.
오늘 이 순간, 우리가 각자가 마음속으로 이렇게 결단하길 기도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을 붙들겠습니다. 나는 이 이름으로 일어나겠습니다. 나는 이 이름으로 담대히 살겠습니다!” 그 결단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 결단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13세기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화려하고 호화로운 바티칸을 보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교황 이노센트 2세를 만났는데, 교황은 많은 돈을 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그러자 아퀴나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마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 없나 봅니다.”
가진 것이 많아지면서, 우리는 시선을 땅에 고정하고 사명을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은과 금이 대신할 수 없는 이름,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이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매일 스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주목하여 보라” “회개하고 돌이켜 이 놀라운 복을 받으라”라고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세상에 밝히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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