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이창무 2025. 3. 16.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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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사도행전 제 8 강 / 이창무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말씀 / 사도행전 5:17-42
요절 / 사도행전 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혹시 "아무리 말을 해도 소통이 되지 않는 사람"을 만나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무리 진심을 담아 이야기를 전해도, 귀 기울여 듣기는커녕 오히려 화를 내거나 적대적인 태도로 반응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마주할 때 우리는 마음이 참 어렵고 복잡해집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 것을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일이 이와 비슷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좋은 소식을 전하고자 하지만, 세상은 그 복음을 결코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무관심으로, 또 어떤 때는 노골적인 거절로, 심지어 조롱과 핍박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 속에 등장하는 사도들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은 병든 자들을 고치고, 귀신 들린 이들을 자유롭게 하는 놀라운 은혜의 사역을 감당하였지만, 그 결과는 감옥에 갇히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전하였다는 이유로 매질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결코 복음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 때로 힘겹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계속할 이유가 있는가?" 사도들은 무엇을 붙들었기에, 어떤 마음으로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인지 함께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박해를 받아도 생명의 말씀은 꺾이지 않습니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모두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 사도들을 붙잡아 옥에 가두었더니”(사도행전 5장 17-18절)

본문에는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한 사람들, 곧 사두개파 지도자들의 마음에 시기가 가득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시기한 대상은 다름 아닌 사도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토록 사도들을 시기하였을까요?

본문 바로 앞부분에는 병든 이들이 고침을 받고, 귀신 들린 자들이 자유함을 얻는 놀라운 역사가 사도들을 통하여 일어났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혹시라도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스치면 낫지 않을까" 하며 몰려들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광경을 목격한 종교 지도자들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겼던 존경과 명예, 그리고 영향력이 온전히 사도들에게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도 기적을 행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으나, 안타깝게도 그들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선택한 길은 사도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있었던 1차 심문 때에는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만이 감옥에 갇혔지만, 이번에는 열두 사도 모두가 투옥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19절)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밤중에 감옥의 문을 열고 사도들을 이끌어 내신 것입니다. 마치 한 편의 영화와 같은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때 감옥을 지키던 간수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평소와 다름없이 근무 중이었겠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가리셨는지, 잠들게 하셨는지, 어쨌든 사도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감옥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풀려난 사도들에게 천사는 무엇이라고 말했을까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고생했으니 이제 좀 쉬라"는 말을 기대할 수도 있었겠지만, 천사의 명령은 전혀 달랐습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20절)

사도들이 감옥에 갇히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성전에서 이 생명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막 감옥에서 나온 그들에게 다시 성전으로 가서 같은 일을 계속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다시 잡히라는 말씀처럼 들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월드컵 때 유행했던 문구,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라는 표현입니다. 천사는 바로 그와 같은 담대한 마음을 사도들에게 심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정도 핍박에 굴하지 말고, 계속해서 이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천사는 단순히 ‘말씀’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요한복음 5장 25절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듣는 자를 살리는 생명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감당해야 할 사명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처럼 눈에 보이는 공권력의 핍박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얼음장처럼 차가운 무관심과 냉대가 우리를 낙심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올해도 대학 동아리 박람회에 복음 전하는 동아리를 신청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사실 작년에도 거절당했던 일입니다. 이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제는 명백한 거부가 캠퍼스 분위기로 자리 잡은 듯 보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위축되기 쉽고, 때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여전히 분명합니다. "이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

그래서 저희는 ‘고기연’과 함께 동아리 박람회에 참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고기연이라는 이름으로도 거부당하여, 결국 중앙동아리에 등록된 부스를 빌려 사용하였습니다. 솔직히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거절당해도, 무시당해도,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에도 다시 성전으로 나아갔던 사도들처럼, 우리도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과 장애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입을 막아도 생명의 말씀은 담대한 증인을 통해 선포됩니다.

그렇다면, 주의 사자의 명령을 들은 사도들의 반응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사도행전 5:21 상)

밤중에 천사를 통해 감옥에서 풀려난 직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다른 곳에 들르지 않았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집으로 돌아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곧장 성전을 향해 나아갔고, 이른 새벽부터 즉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순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즉각적인 순종은 생명의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이 그들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상황을 종교 지도자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공회를 소집하여 의기양양하게 재판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사도들이 감옥에 없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당황합니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급히 들어와 "지금 사도들이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라고 알립니다. 이 소식을 들은 종교 지도자들은 적지 않게 놀라고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사도들을 다시 체포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강압적으로, 폭력을 동원해서는 체포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의 시선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사도들을 존경하고 있었기에, 억지로 끌고 갔다가는 백성들의 분노를 살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결국 사도들은 다시 공회 앞에 서게 되고, 종교 지도자들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따져 묻습니다.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히 명령하였거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28절)

즉, 지난번 그들을 놓아주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는 가르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였음에도 왜 또다시 그 명령을 어기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왜 우리에게 지우느냐, 왜 우리를 난처하게 만드느냐고 항의합니다. 그들의 사도들에 대한 불편하고 적대적인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이때 사도들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을까요?
아닙니다. 사도들의 대답은 분명하고도 담대했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29절)

이 고백은 앞선 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했던 고백과 동일한 선언입니다. 사람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명령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굳게 붙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 담대하게 복음의 핵심을 선포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구원과 회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관하여 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도들의 담대함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순종과 충성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증언하다가 죽게 된다 해도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뿐"이라는 마음을 품었던 것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증인’이라는 단어는 원어로 ‘순교자(martyr)’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언제나 순교적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김모세 목자님께서 새봄 특강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친구를 바이블카페로 초대하는 일조차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관계 전도가 더 어려운 이유는, 혹여 친구와의 관계가 어색해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과 순교적 결단이 언제나 요구됩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은, 베드로와 요한이 이번이 두 번째 재판이었기 때문에 첫 번째 때보다 더욱 담대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처음에는 복음을 전할 때 두렵고 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용기를 내어 복음을 전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더 담대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시작하지만,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오히려 영적 담대함과 믿음의 성장이 일어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세상의 시선과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결코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 앞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기로 결단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담대함을 주시고, 복음 전파의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기억하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담대하게, 순종함으로 그 길을 걸어가시기를 소망합니다.

3. 길이 막혀도 생명의 말씀은 장애물을 뚫고 나아갑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였을 때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사도행전 5:33)

사도들의 담대한 복음 선포를 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마음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쌓여 있던 시기와 미움이 더욱 타올랐습니다. 복음의 말씀이 선포되는 그 순간, 그들의 마음은 오히려 완악해져 버렸습니다. 여기서 “없이 하고자 한다”는 표현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실제로 사도들을 돌로 쳐 죽이려는 계획을 의미합니다.

결국 사도들은 '생명의 말씀을 전하다가 죽게 되어도 감수하겠다'는 마음으로 순종하였지만, 정말로 죽음을 앞둔 위기의 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히든 카드', 곧 가말리엘이 등장한 것입니다.

성경은 가말리엘을 “율법 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바리새인”이라고 소개합니다(34절). 그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학자이자 바리새파의 지도자로, 그 영향력은 막강하였습니다. 만일 그가 다른 바리새인들처럼 복음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면, 이 재판은 사도들에게 훨씬 더 불리하게 흘러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말리엘은 먼저 사도들을 잠시 밖으로 내보내도록 한 후, 공회원들에게 신중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리고 두 가지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며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는 드다 사건입니다. 드다는 약 서기 4년경, 약 400명의 추종자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드다가 죽고 그를 따르던 자들도 모두 흩어져 사라졌습니다.

두 번째는 갈릴리의 유다 사건입니다. 그는 서기 6년경 로마 제국의 세금 문제로 반란을 주도하였으나,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 두 사건을 언급한 후 가말리엘은 다음과 같은 지혜로운 결론을 내립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38-39절)

참으로 깊이 있고 지혜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며, 인간의 감정과 교만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신중한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중한 권면이 결국 사도들의 생명을 구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묵상하면서 가말리엘이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동료 바리새인들이 사도들을 없애려는 분위기 속에서 홀로 신중함과 지혜의 말을 꺼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수의 분노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야말로 참된 리더의 모습이 아닐까요?

또한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하나님께서 복음 전하는 자들의 길을 어떻게 예비하시는지를 보게 됩니다. 사도들이 밖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기다리고 있을 때, 공회 안에서는 가말리엘을 통해 그들이 보호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가말리엘이 자신들을 변호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길을 여시기도 하십니다.

저 역시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최근 경험한 일을 떠올렸습니다. 이번 학생수양회 장소 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때, 본래 그 장소는 그곳을 지은 교회만 사용 가능하였기에 저희는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매우 난감한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저희 모임과 특별한 관계가 없던 한 교수님이 발 벗고 나서서 우리 일처럼 도와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셔서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 설득까지 해주셨습니다. 저희가 부탁드린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 교수님이 왜 그렇게까지 애써주셨는지, 아직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열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렇듯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길에는 때로 장애물이 놓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길을 여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직접 싸우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가말리엘과 같은 사람을 통해 우리의 길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이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결코 주저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며, 담대하게 나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4. 매를 맞아도 생명의 말씀은 기쁨과 함께 전파됩니다.

40절을 보면, 공회원들이 가말리엘의 권면을 옳게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가말리엘의 논리는 매우 설득력 있었기에 쉽게 반박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사도들을 풀어주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단순히 놓아준 것이 아니라, 매질을 가한 후에 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공회에서 매를 맞으신 분이 계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마도 사도들은 그 매를 맞으면서 주님의 고난을 마음 깊이 떠올렸을 것입니다.

“아, 주님께서도 이 채찍을 맞으셨지. 이제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로구나.”

그리하여 사도들은 이렇게 반응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사도행전 5:41)

참으로 놀라운 반응입니다. 매를 맞고 나오면서도 오히려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통 억울함과 서러움에 눈물부터 나오는 것이 인지상정일 터인데, 그들은 오히려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저 역시 개인적으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대학 2학년 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이후, 3학년 때에는 캠퍼스에서 매일같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물론 수없이 거절당하고, 차갑게 외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제 마음 깊은 곳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불과 1년 전의 나 역시 복음을 거절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며 거절당할 때, 오히려 "내가 이렇게 변화되었으니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라는 감격이 제 마음을 채웠던 것입니다.

아마 사도들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 맞으실 때 도망갔던 내가, 이제는 주님의 이름을 위해 채찍을 맞는 자로 변화되다니,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 억울함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과 기쁨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이는 세상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깊은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베드로도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권면을 이렇게 전합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베드로전서 4:13)

또한 바울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갈라디아서 6:17)

여기서 말하는 예수의 흔적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복음을 전하다가 맞은 채찍 자국, 고난의 상처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우리에게는 몸에 남은 채찍의 상처는 없을지 몰라도, 마음에 남은 상처(일명 마상)는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받은 거절과 냉대, 때로는 외면당한 아픔, 다른 사람을 섬기며 겪은 괴로움과 오해, 심지어 사랑하는 이들에게 외면당하며 흘린 눈물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처조차도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 영광의 흔적으로 여길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그 상처를 결코 헛되게 두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넘치는 보상과 열매로 갚아 주십니다.

얼마 전 목자 선서식에서 여덟 분의 새로운 목자님들이 헌신을 다짐하는 장면을 보며, 또한 졸업예배에서 여섯 분이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소감을 나누는 모습을 통해 저는 깨달았습니다.

"아, 우리가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자 흘린 땀과 눈물이 결코 헛되지 않았구나.”

또한 이번 주 고기연 개강예배에서 역대급으로 많은 학생들이 모여 418 강당을 가득 메운 장면을 보며, 하나님께서 여전히 이 땅에 복음의 역사를 이루고 계심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러한 순간들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주는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오늘 본문은 감동적인 결말로 마무리됩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42절)

날마다, 성전에서든 가정에서든, 그치지 아니하고, 공적 예배 자리에서도, 개인적인 만남 자리에서도 복음 전파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탄과 종교 지도자들이 어떻게든 복음을 막으려 했지만, 생명의 말씀은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이 일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천사를 통해, 때로는 가말리엘과 같은 지혜로운 사람을 통해, 그리고 성령의 권능으로 사도들을 담대케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길에서 때로 고난을 겪을 수 있습니다. 한 영혼을 양육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눈물과 아픔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고난에는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영광이 있으며, 하늘의 상급이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능욕을 기쁨으로 여기며, 사도들이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결코 포기하지 말고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 복음을 온전히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말하라."

이 사명은 시대가 바뀌어도 교회가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본질입니다. 우리 교회와 우리 공동체가 이 생명의 말씀을 위하여 살아가고,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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