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나귀 타고 오시는 왕

이창무 2024. 10. 20.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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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23강 / 이창무

나귀 타고 오시는 왕

말씀 / 마가복음 11:1-26
요절 / 마가복음 11:9,10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동안, 우리의 마음이 열려 예수님의 뜻을 깊이 깨닫고 순종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우리의 부족함을 용서하시고, 오직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주님을 더 가까이 따르며 경배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얼마 전 제가 당신과 닮은 동물을 알려 준다는 사이트에서 테스트에 응해 본 적이 있습니다. 결과는 ‘당신은 햄스터와 닮았다’였습니다. 만약 동물 중에서 ‘예수님’ 하면 연상되는 동물이 무엇일까요? 아마 많은 사람들이 ‘어린 양’을 떠올릴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희생 제물로 자신을 내어 주신 구세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5장에서는 예수님을 어린 양인 동시에 사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자는 예수님의 왕권과 권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왕이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왕 되신 예수님은 자신을 어떤 분으로 나타내 보이셨을까요?

I. 예수님은 우리의 순종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왕이십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1)”

예수님이 감람 산 근처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입니다. 예루살렘부터 3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이 정도면 거리면 당시로서는 걸어가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 둘을 보내 입성하실 때 쓸 탈 것을 굳이 준비하도록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을 타고 들어가시느냐’ 그 자체가 주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메시지에 대해서는 잠시 후 생각하기로 하고 먼저 탈 것을 준비하는 과정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이 일을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2-3)”

예수님이 준비하시는 과정이 여러모로 놀랍습니다. 첫번째는 맞은편 마을에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예수님이 어떻게 아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두번째는 나귀 새끼를 데려오는 방식입니다. 제자들에게 그냥 풀어서 끌고 오라 하십니다. 이거 자칫하면 절도죄로 철컹철컹 아닙니까? 예수님이 왜 이런 방식으로 나귀 새끼를 준비하도록 하셨을까요?

가 보지 않고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알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 ‘내가 주인이다. 내가 원할 때 그것을 사용할 합법적인 권리가 나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딱 한 분 밖에 없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한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바로 그 하나님과 동등한 주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엄청난 사실을 믿고 영접할 수 있을까요?

“제자들이 가서 본 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4)”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순종합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정말로 그곳에 아무도 타 본 적 없는 어린 나귀가 묶여 있습니다. 남은 문제는 나귀의 주인입니다. 주인이 펄쩍 뛰며 난리를 치면 다 소용 없는 일 아닐까요?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5-6)”

놀랍게도 나귀 주인도 주가 쓰시겠다는 말 한 마디에 순순히 나귀 새끼를 내어 줍니다. 사실 오늘 말씀에는 겉으로 드러난 주인과 참 주인, 이렇게 두 명의 주인이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주인은 나귀 새끼의 본래 주인입니다. 그는 참 주인으로부터 위탁을 받아 잠시 관리하고 있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진짜 주인이 누구입니까? 바로 만유의 주님이시고 만 왕의 왕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들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쓰시겠다고 할 때 내어 드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 중에 소중한 것들이 참 많습니다. 핸드폰도 소중하고, 노트북도 소중하고, 내 양도 너무 소중하고, 나의 가족들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렇지만 물질도, 양들도, 가족들도 근본적으로 내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다만 청지기일 뿐입니다. 사실 모두 다 주님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쓰고 싶다.” 또는 “네 아들, 네 딸, 네 남편을 사용해야 하겠다.” 하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님이 쓰시겠다 하시면 주님께 기꺼이 내어드릴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싫은데요. 내 것인데 왜 주님이 쓰려고 하십니까?” 이렇게 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쓰시고자 하실 때 기꺼이 드릴 수 있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죄로 죽었던 나를 십자가로 다시 살리시고 그분의 영원한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지으시고 나의 삶과 죽음을 다 주관하시는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가 쓰시겠다’ 하실 때 이를 거절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본문 속 나귀 새끼가 특별한 짐승은 아닙니다. 더하기 빼기를 할 줄 아는 천재 나귀도 아니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나귀도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나귀입니다. 하지만 이 지구 상에 존재했던 모든 나귀 중에 가장 영광스러운 나귀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온 세상의 구주이자 하나님의 아들을 등에 업어 보다니! 저는 이 나귀가 너무 부럽습니다. 제가 만약 나귀 주인이라면 나귀를 향해 ‘너는 우리 가문의 자랑이다.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했을 것 같습니다.

평범하고 달리 내세울 것 없는 우리 인생이 가장 영광스럽게 되는 길은 주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은 어디 있겠습니까? 한 번 뿐인 인생인데 예수님을 등에 업고 함께 갈 수 있다면 이보다 더 값어치 있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준비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왜 하필 나귀 새끼를 타셨을까요? 이는 스가랴 9장 9절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바로 그 영원한 왕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고대의 왕들은 두 종류의 탈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나귀입니다. 전쟁터에 나갈 때 왕은 말을 탔습니다. 반면 평화의 때에는 나귀를 탔습니다. 말을 탄 왕을 보면 사람들은 걱정하고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나귀를 탄 왕을 보면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으로 무력이 아니라 평화로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십니다. 나귀 새끼를 탄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새끼 나귀는 너무 작아서 예수님의 발이 땅에 질질 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 위엄이 없고 폼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심으로 무장해제시키는 분이십니다. 나귀 새끼를 탄 예수님은 왕은 왕이시되 섬기러 오신 왕이요 스스로 종이 된 왕이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 대한 반응이 어떻습니까? 제자들은 안장 대신 자신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았습니다. 백성들은 레드 카펫을 대신하여 겉옷을 예수님이 가시는 길 앞에 펼쳐 놓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한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9-10)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이를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간절히 구원자를 기다렸는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압제아래서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억압과 경제적인 피폐함으로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윗과 같은 왕으로 오셔서 그들을 해방시켜 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군사적으로 부강한 나라, 경제적으로 윤택한 나라를 만들어 주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만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현실적인 유토피아만을 건설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왕께서 낮고 천한 이 땅에 우리를 만나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의 친구가 되기 위해 구유에 태어나시고, 냄새 나고 더러운 죄인들을 섬기시다가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 왕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이 겸손의 왕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 사랑의 왕을 우리가 어떻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겉옷을 벗어 왕 앞에 던지며 “이 옷을 밟고 지나 가소서”라고 외칩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도 소리 높여 “호산나”를 외치며 왕께 노래합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II. 예수님은 우리 안에 타락하고 부패한 것들을 깨끗하게 하시는 왕이십니다.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12)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나오실 때 시장하셨습니다. 멀리서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다가가셨습니다. 잎사귀가 많아서 열매를 기대했지만 열매가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14)라고 하시며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배 고파서 짜증이 나신 것일까요?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여기서 무화과 나무는 예루살렘 성전을 상징합니다. 당시 성전은 무성한 잎사귀처럼 외형은 화려했으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영적인 열매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로부터 큰 사랑을 받아 제사장 나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물질과 쾌락의 우상을 섬기며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특히 성전에서 일하는 종교지도자들의 타락과 부패는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들의 적나라한 모습이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의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더 이상 그곳은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양과 염소의 울음소리, 호객하는 소리, 흥정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마치 시장 바닥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장사꾼들은 성전의 바깥쪽 이방인의 뜰을 점령하여 장사하는 장소로 변질시켰고, 종교 지도자들은 장사꾼들에게서 뒷돈을 받고 이를 묵인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보시고 의로운 분노를 발하시며 성전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17)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이요 이방인들까지도 하나님께 나아와서 예배 드리고 기도하는 만민의 기도의 집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임재하시는 곳이요,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회개하고 감사의 제물을 드리는 거룩한 처소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성전이 가장 부패하고 타락한 강도의 소굴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죄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 안에 타락한 것, 부패한 것들을 깨끗하게 하시는 왕이십니다. 이 말은 단순히 행동의 수정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어둠과 부패함을 직면하게 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의 어둠을 보시고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에게 다가와 그 어둠을 빛으로 바꾸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안에 있는 죄와 더러운 것을 씻어내고,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 깨끗하게 하실 때, 때로 우리에게 아픔을 동반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에 있는 어둠을 깨뜨리고, 그곳에 빛을 비추실 때, 우리는 고통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고 온전하게 되려면 자기가 깨지고 부서지는 아픔의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새롭게 태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왕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내면을 점검하고 수시로 청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안에 더럽고 추한 죄의 요소들을 뒤집어 엎고 쫓아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I. 예수님은 우리를 새 성전으로 세우시는 왕이십니다.

이튿날 제자들이 아침에 지나가다가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무화가 나무가 단 하루 만에 뿌리째 말라 버린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능력이 어디서 오는지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22)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단순하게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능력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할 수 있습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23)

누가 감히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산은 산이요 바다는 바다이지 산이 어떻게 바다에 던져집니까? 사람들은 이런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산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고, 바다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산을 들어서 바다에 던지실 수 있습니다. 바다 가운데 길을 내실 수도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시온 산 위에 우뚝 세워진 성전이 영원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권세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들의 부패와 타락상을 드러내고 도전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은 무모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어차피 안 될 일이니 현실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응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과감하게 성전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하나님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저 산을 바다에 던져지게 하실 것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믿음대로 정말로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효력이 다한 성전의 역할을 앞으로 누가 대신해야 할까요? 바로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새 성전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도록 다음 두 가지를 당부하셨습니다.

첫째,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24)

예수님은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무엇이든 기도하고 구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제자들이 이제는 성전이라는 말씀입니다. 기도는 단순히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의 일부가 되었다는 표지입니다.

둘째, 용서입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25)

용서는 건물로서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이 선포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건물로서 성전이 아닌 제자들의 공동체 즉 교회 안에서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성전에서 희생 제물을 통한 용서가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드리는 용서의 기도로 대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혐의를 용서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산을 옮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용서를 믿음과 기도로 해내는 공동체! 이것이 기존의 건물 성전을 바다에 던져 버리고 우리의 왕 되시는 예수님이 새롭게 세우고자 하시는 성전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왕이신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그분의 백성들입니다.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분을 경배하고 찬양함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왕이신 예수님이 새롭게 새우신 성전입니다. 만약 우리가 죄와 싸우지 않고 부패와 타락의 길을 가게 된다면 우리는 말라 비틀어지고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도전하고 기도하고 용서한다면 만민이 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는 거룩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 안암 1부가 왕 되신 예수님께 충성을 다하는 공동체로 세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당신은 영광의 왕>

당신은 영광의 왕
당신은 평강의 왕

당신은 하늘과 땅의 주
당신은 정의의 아들

천사가 무릎 꿇고
예배하고 찬송하네

영원한 생명 말씀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주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불러 왕 중의 왕

높은 하늘엔 영광을
예수 주 메시야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 안에 있는 모든 타락과 부패를 깨끗하게 하시는 분임을 다시금 깨닫게 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성전으로 세우시기 위해 기도와 용서의 삶을 살도록 부르셨사오니, 우리가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며, 주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는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게 하소서. 우리 공동체가 주님을 찬양하며, 기도로 굳건히 서 있는 성전이 되기를 간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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