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마가복음 25강 / 이창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 / 마가복음 12:18-44
요절 / 마가복음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저는 초등학교 때 시험에서 올백을 맞은 적이 한 번 있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빨리 엄마에게 알려서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끝나자 마자 집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때 저희 집이 내리막길 아래 끝에 있었습니다. 저는 달려가는 가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철로 된 대문에 그대로 박치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응급실이었습니다. 자초지종을 엄마에게 말씀드리자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했냐며 등짝을 세게 맞았습니다. 올백을 맞고 엄마에게 등짝을 맞은 사람은 아마 저 밖에 없을 것입니다. 엄마에게 인정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인정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 인정받는 사람의 특징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I. 예수님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믿는 사람을 인정하십니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18)
사두개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제사장 그룹들로 로마와 협력하면서 권력을 유지하며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습니다. 여기에 부활에 관한 교리가 없다며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미래의 어떤 상급이나 형벌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신명기에 나오는 형사취수법을 배경으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형사취수법이란 한 사람이 아들이 없이 죽으면 그의 형제나 가까운 친척이 형수와 결혼해서 후사를 낳도록 한 법입니다. 이 법의 목적은 집안의 대를 잇고, 과부를 부양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이 법을 요상하게 비틀어 황당한 질문을 했습니다. “어느 집에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요. 장남부터 막내까지 다 요절하는 바람에 글쎄 한 여자가 이들 모두의 아내가 되고 말았지 뭡니까? 만약 부활하게 되면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할까요? 형제끼리 집단 난투극이 벌어지지 않을까요?” 결국 사두개인들이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부활은 있을 수 없고 또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지요?’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들이 첫째는 성경에 대한 무지, 둘째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 때문에 부활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25)
이 말씀은 부활하면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몸을 입게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더 이상 후손을 남기기 위해 장가가거나 시집 갈 일도 사라집니다. 사두개인들이 오해한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몰랐기 때문에 부활을 다만 현재의 삶이 그대로 연장되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의 성경에 대한 무지를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26b)
이 말씀은 사두개인들도 정경으로 인정하는 출애굽기 3장 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 말씀을 하셨을 때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모두 죽어서 무덤에 묻힌 뒤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이삭의 하나님이었고 야곱의 하나님이었노라'고 하셔야 옳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모두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곧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모두 부활하여 살아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27a)
예수님의 결론이면서 동시에 사두개인들을 은근히 디스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부활도 영생도 심판도 믿지 않고 이 땅에서 호위 호식하며 하는 것만을 전부로 여기며 사는 사두개인들은 살았지만 사실상 죽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성경을 진리의 말씀으로 믿고 사는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두개인들은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 기반을 상실하고 역사 뒤편으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그들은 부활했습니다. 현대판 사두개인들은 성경을 자기 입맛에 맞게 나름대로 재구성합니다. 성경에서 홍해 사건, 동정녀 탄생, 부활 등등 초자연적인 기적들을 모두 다 제거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고 여기기 때문에 천국 복음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대신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며, 오로지 이 땅에서 안녕과 복지를 누리는 것에만 관심을 두며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세련된 그리스도인, 현대적인 그리스도인, 합리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칭송해 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판단은 다릅니다. 이들은 신자라고 하지만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박물관에 박제된 신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런 사람은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죽은 자의 하나님이 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비웃고 조롱해도 여전히 성경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진리의 말씀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 능력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나도 부활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을 믿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삶에 얽매이지 않고 나그네처럼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성경을 맹신하는 자들, 꽉 막힌 그리스도인, 너무 올드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폄하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판단은 다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런 사람이 산 자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지금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처럼 내 인생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의 스토리를 만들어 나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우리 모두 죽은 자가 되지 말고 산 자가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죽은 하나님으로 만들지 말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해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II.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을 인정하십니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28)
이번에 나온 사람은 서기관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앞선 사두개인들과 예수님 간의 논쟁 과정 속에서 예수님이 들려주신 지혜로운 답변에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런 분이라면 평소 잘 풀리지 않던 의문점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실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질문했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29-31)
예수님은 먼저 신명기 6장 4절과 5절을 인용하셔서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한계를 두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전폭적으로 사랑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셔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만큼 이웃도 그렇게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예수님은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덧붙임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그 전체로 최고의 계명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이다처럼 시원하게 신앙생활의 본질과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에 대한 서기관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32-33)
서기관은 먼저 예수님의 말씀에 인정과 동의를 표했습니다. 그리고 좋은 학생이 늘 그러하듯이 선생님의 말을 한 번 더 반복함으로 마음에 새겼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학생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스승의 가르침을 한 단계 더 심화시킵니다. 서기관은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어떤 화려한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덧붙였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의 지혜로운 대답에 감동 받으시고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며 우등상을 주셨습니다.
학교 다닐 때 보면 죽어라 열심히 공부는 하는데 영 성적이 시원치 않은 친구들이 꼭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다 의아해 하고 본인도 참 힘들어 합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대부분 선생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공부하지 않고 엉뚱한 곳을 깊이 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이 딱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화려한 제사를 드리는 것, 율법을 탐구하고 논쟁하는 것은 열심히 했지만, 그들은 정작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고 인정하시는 것, 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 내가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에는 무관심했습니다.
우리도 역시 동일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내가 몇 명의 양을 제자로 남겼는가, 역사를 얼마나 성장시켰는가, 얼마나 종교적인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느냐’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기준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것들은 다 우리가 행해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질 때, 비로서 이 모든 것이 참된 예배로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목적은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서로 사랑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사랑이 없이는 그 어떤 영웅적인 행위도 아무 것도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삶의 목표와 방향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고정시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에 가장 가까운 사람, 예수님께 상 받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I.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자신을 드리는 사람을 인정하십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35)
예수님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 이해하던 당시 서기관들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셨습니다. 이 견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견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다윗의 주님이십니다. 그 근거로 예수님은 시편 100편 1절을 인용하셨습니다.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36)
여기서 앞의 주는 하나님을 뒤의 ‘내 주’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성령에 감동된 다윗은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만유를 다스리시는 주의 주, 왕의 왕이 되실 것을 내다 보았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 말씀을 즐겁게 들었습니다. 더 이상 종교지도자들 중에 예수님을 시험에 빠뜨리려는 사람이 감히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를 내리실 차례입니다. 그들은 어떤 학점을 받았을까요?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38-39)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의 어떤 점들을 주의해야 할까요?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긴 옷은 당시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만 입던 옷이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이 옷을 식당 갈 때도 입고 마트 갈 때도 입었습니다. 또한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상석에 앉는 것을 원했습니다. 제발 좀 남들이 자기를 알아봐 주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이 겉으로는 이렇게 고상한 척 했지만 뒤로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있었습니다. 당시 과부들은 죽은 남편의 재산을 서기관에게 위탁하여 관리하도록 한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때 서기관들이 과부 몰래 재산을 뒤로 빼돌려 자신이 치부하는 사례가 빈번했습니다. 또한 서기관들은 기도할 때 일부러 기도를 길게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말이 많아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를 경건한 사람으로 봐주길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서기관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바로 오직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웃 역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착취하고 이용할 대상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오직 자기만 사랑하고 자기만을 위해 산 사람의 결국이 어떠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가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F학점을 주셨습니다.
반면에 A학점을 받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41-42)
예수님께서 헌금함 앞에 앉으셔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셨습니다. 여러 부자가 와서 거액을 넣자 "촤르르르 우두둑" 금화 닢이 수북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주위에서 ‘와’하는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반면 한 가난한 과부가 와서 두 렙돈(현재 가치로 2천원 가량)을 넣었습니다. ‘땡그랑’ 소리가 나자 과부는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습니다.
이 둘의 헌금에 관한 예수님의 평가가 어떠합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43)
겨우 동전 두 닢을 넣은 가난한 과부가 여러 부자들보다 더 많이 헌금했다니요? 팩트 체크가 영 잘못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액수를 가지고 평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서 일부를 넣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녀를 가장 많이 넣은 사람이라고 보셨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어떻게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지극히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두 렙돈이지만 이 작은 것으로나마 주님을 향한 진심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그가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헌금을 드리고 하루를 굶을지언정 어디선가 이틀을 굶고 있을 이웃을 어떻게든 돕고 싶었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예수님이 앞으로 가시려는 길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짊어지려 하십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순종의 제사를 드리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죄를 병들고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남김 없이 다 내어주어 우리를 살리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불러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아낌 없이, 남김 없이, 후회 없이 너희 자신을 드리라는 의미를 전달하신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평가와 인정을 내릴 때,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곤 합니다. 크고, 많고, 화려한 것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찬사를 받습니다. 사회는 더 큰 성공, 더 많은 재산, 더 화려한 업적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칭송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에서 그 기준을 완전히 뒤집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겉으로는 초라해 보일지라도, 마음 속 진실한 헌신과 사랑을 크게 보시고 이를 최고의 가치로 인정해 주십니다.
우리는 종종 "이것밖에 드릴 것이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우리의 작은 헌신을 부끄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진심과 사랑을 받기 원하시지, 우리의 재산이나 능력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께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드릴 때, 비록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작고 초라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중심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그 마음들이 하나 하나 모여서 새 성전인 교회 공동체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 예수님이 찾으시는 사람,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드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 또 다른 과부 한 사람을 우리 중에서 찾고 계십니다. 그 한 사람을 찾으시면 너는 나를 닮은 사람이구나 하시며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만 사랑하는 자기를 위해 하나님과 이웃을 이용하는 사두개인이나 서기관 같은 사람이 되지 맙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한 과부 같은 사람,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온 맘 다해>
주님과 함께 하는 이 고요한 시간
주님의 보좌앞에 내 마음을 쏟네
모든 것 아시는 주님께 감출 것 없네
내 맘과 정성 다해 주 바라나이다.
주님과 함께 하는 이 고요한 시간
주님의 보좌앞에 내 마음을 쏟네
모든 것 아시는 주님께 감출 것 없네
내 맘과 정성 다해 주 바라나이다.
온 맘 다해 사랑합니다
온 맘 다해 주 알기 원하네
내 모든 삶 당신 것이니
주만 섬기리 온 맘다해
나 염려하잖아도 내 쓸 것 아시니
나 오직 주의 얼굴 구하게 하소서
다 이해할 수 없을 때라도 감사하며
날마다 순종하며 주 따르오리다
온 맘 다해 사랑합니다
온 맘 다해 주 알기 원하네
내 모든 삶 당신 것이니
주만 섬기리 온 맘다해
온 맘 다해 사랑합니다
온 맘 다해 주 알기 원하네
내 모든 삶 당신 것이니
주만 섬기리 온 맘다해
온 맘다해 사랑합니다
온 맘다해 주 알기 원하네
내 모든 삶 당신 것이니
주만 섬기리 온 맘다해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 인정받는 사람의 삶에 대해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인정과 찬사에 매이지 않고, 오직 주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을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사랑하게 하시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작은 헌신과 진심을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도록 사용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모든 말씀을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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