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섬기러 오신 예수님

이창무 2024. 10. 13.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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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22강 / 이창무

섬기러 오신 예수님

말씀 / 마가복음 10:32-52

요절 /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사랑의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허락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제자의 길로 인도하시고, 그 길에서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은혜를 주시니 감격합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섬김과 고난, 내려놓음의 가치를 배우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제자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옵소서. 성령님께서 이 자리에 함께하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깨달음을 허락하시고,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게 도와주시길 간절히 구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서울대 행정대학원장을 역임한 최종훈 교수가 쓴 ‘인생 교훈’이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라. 먹을까 말까 할 때는 먹지 마라. 살까 말까 할 때는 사지 마라. 말할까 말까 할 때는 말하지 말라. 줄까 말까 할 때는 줘라.” 이 문구를 우리의 제자도에도 응용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난을 받아들일까 말까 할 때는, 섬길까 말까 할 때는, 내려놓을까 말까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때 우리가 어떤 결심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I. 고난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십시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32a)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길을 따라 걷는 예수님의 얼굴은 결의에 차 있었습니다. 그 눈빛은 마치 앞으로 다가올 일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무언가 중대한 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끼며 불안해했습니다. 예수님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따로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33-34)

예수님의 세번째 수난 예고였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에게 닥칠 고난을 막연히 짐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고통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명확하게 알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얼마나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펼쳐질지 모두 아셨습니다. 흔히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지만, 예수님은 몰라서 용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도 그 길을 앞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면 영광의 자리에 앉을 것이라는 기대와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고난과 죽음에 대한 가르침은 그들이 받아들이기 매우 힘든 것이었습니다. 한창 꿈 많은 청년들인 제자들이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반드시 가야 할 길이며,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도 자신처럼 고난을 피하지 않고 그 길을 걸어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이 중요한 진리를 적어도 세 번이나 반복해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인생의 여정에서 크고 작은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고난을 정면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고난 앞에서 물러설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고난 앞에서 우리는 종종 회피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당장의 어려움을 피함으로써 잠시나마 평안을 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난을 회피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오히려 그 문제를 더 커지게 만듭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더욱 커지고, 마음의 평안은 점점 멀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주저했을 때, 그들은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고난을 피하려고 한다면, 우리 인생도 광야에서 헤매는 삶이 될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고난을 직면하고 그것을 이겨내려는 과정에서 우리는 더 강인한 내면을 갖추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지혜와 인내가 자라고, 우리의 인격은 성숙해집니다. 삶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고,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로마서 5:3-4)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고난을 피해 달아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로 여기며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더욱 강해지고, 풍성해지고, 고난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앞장서서 고난을 통한 승리와 영광의 길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뒤를 따르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 섬기는 종이 되기로 결심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세 번에 걸쳐 자신의 고난을 예고하셨을 때, 제자들의 반응은 각기 달랐습니다. 첫 번째는 거부, 두 번째는 침묵이었습니다. 그럼 마지막 세 번째 반응은 무엇이었을까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35)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나아가 예루살렘에서 영광을 받으실 때 자신들을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함께 영광을 누리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마태복음 20장에도 나옵니다. 거기에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와 절까지 하며 자리를 부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친척 관계였고, 이를 이용하여 높은 자리를 청탁한 것입니다. 그들이 엄마 찬스까지 동원해서 청탁을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더 늦기 전에 베드로를 제치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들어야 할 말씀은 전혀 안 듣고, 먼저 된 자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 먼저 된다는 말씀만 이상하게 적용한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41절에 보면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냈습니다. 그들 모두 예수님을 통해 얻게 될 영광의 자리를 탐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수하다는 제자 나다나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명예와 권력을 향한 욕망은 실로 강렬합니다.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오늘 말씀 속 제자들에게서 유난히 수컷의 느낌, 날 것의 느낌이 물씬 풍겨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권력욕에 사로잡힌 제자들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고자 하셨습니다. 어떤 오해입니까?

첫째, 제자들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38a)

제자들은 예수님의 좌우편을 섬김 받고 영광 받는 자리로만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큰 착각이었습니다. 사실 그 자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둘째, 제자들은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38b)

여기서 예수님이 마시려는 잔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고난의 잔, 죽음의 잔이었습니다. 이 잔을 마실 수 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두 제자는 “할 수 있나이다”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말한 대로 고난을 겪게 됩니다. 야고보는 열 두 사도 중 가장 먼저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가장 오래 살면서 가장 많이 고난을 짊어진 사도가 되었습니다.

셋째, 제자들은 천국의 자리를 인간의 뜻과 노력으로 얻을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40)

하나님 나라에서 얻게 될 영광스러운 지위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이제자들이 갖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지적하십니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42)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큰 권력을 가졌는지 사람들에게 과시하기를 즐깁니다. 자기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굽실거리는 모습을 볼 때 도파민이 콸콸 분출합니다. 제자들이 높은 자리를 탐했던 이유는 자신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43-44)

예수님은 제자들의 공동체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달라야 합니까? 참으로 큰 자가 되고자 한다면, 낮아져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다른 사람을 돌아보고 도와주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누가 어떤 직분을 맡게 되는지를 두고 갈등을 겪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이는 교회를 세상 조직처럼 서열과 권력이 작용하는 곳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권한을 차지하려는 마음이 생기고, 그 결과 서로 경쟁하고 시기하며 갈등과 분열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문제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교회의 원리는 세상의 서열과 권력의 원리와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섬기는 자'는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을, '종'은 고대 사회의 노예를 가리킵니다. 누구나 주인이 되기를 원하지 종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높은 직분을 맡을수록,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더욱더 섬기는 자,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크고 으뜸인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섬김은 성숙함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가정을 보십시오. 어린 자녀를 성숙한 어른인 부모가 종이 되어 섬깁니다. 섬기는 부모가 큰 자이고 섬김 받는 아이가 작은 자 아닙니까?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도저히 남을 섬길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 하나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만이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나이와 관계없이 섬기는 사람이 어른입니다. 서로 섬기기를 기뻐하고, 더 섬기지 못해서 아쉬워하는 교회, 이런 교회야말로 참으로 아름답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 본을 보이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45)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얼마든지 높은 자리에 앉아 권세를 부리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섬기러 오셨습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들을 섬기셨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추한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여전히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자기 중심적인 야망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과 대속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 쓰디쓴 고난의 잔을 기꺼이 마셨는지, 그 사랑의 깊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구속하신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더 온전히 알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은혜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기쁨으로 섬기고 종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섬겨야 할 그분이 도리어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주셨다는 사실을 더 깊이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기 중심성을 이기고 섬김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I. 내려놓기로 결심하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이 여리고를 지나가던 길목에, 많은 이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맹인 거지 바디매오도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자, 주저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사람들이 그를 꾸짖으며 조용히 하라고 했지만, 바디매오는 더욱 간절한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의 간절한 외침은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바디매오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안심하라, 일어나라. 예수께서 너를 부르신다." 바디매오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겉옷은 유일하게 남은 전 재산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주저 없이 그것을 버리고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바디매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52)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믿음을 보시고, 즉시 그의 눈이 열리게 하십니다. 바디매오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은 단순히 시력을 회복하는 것을 넘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면 이미 예수님을 따른 지 오래 된 제자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세 번이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세속적인 영광과 권력을 추구하며 예수님의 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 전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욕망에 눈이 멀어 버린 영적 맹인들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영적인 눈을 뜰 수 있을까요?

바디매오를 보면 됩니다. 바디매오처럼 먼저 자신의 영적인 눈이 가리워져 있음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불쌍히 여겨 주소서”하며 은혜를 간절히 구할 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시고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후에 제자들은 과연 눈을 떴을까요?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마태 수난곡'에는 베드로의 아리아가 나옵니다. 이는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후 베드로가 통곡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 가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제 눈물을 보시고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 앞에서 아프게 통곡하는 내 심장과 눈을 보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제자들의 기도가 바디매오의 기도와 같아졌을 때, 그들은 비로소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고 어둠 가운데 머물고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 외에 너무 많은 것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세상의 염려, 재물에 대한 집착, 성공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빛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고, 그분의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용기를 내어 예수님보다 더 의지하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그것이 재물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으며, 나 자신의 계획과 자존심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께 나아갈 때, “다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눈을 열어 주셔서 우리가 고난의 가치, 섬김의 가치, 내려놓음의 가치를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진정한 제자의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섬김의 자리에서 기쁨을 찾으며, 우리 안에 있는 세속적인 욕망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만을 의지하는 삶입니다. 오늘 인생 소감을 발표하실 체코 신한나 선교사님의 삶 속에 이 세 가지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고난을 외면하지 않고 믿음으로 맞서며, 섬기는 삶을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고 주님께로 나아가길 결심할 때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리고, 그분을 온전히 따르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려놓음>

나를 버리고 그의 길을 가는 것

세상 그 무엇보다 어려운 내려놓음

내 안의 예수 그분만 생각할 때

하늘의 그 손이 일하시네

그분의 마음 그분의 시선

그분의 원하심을 내 맘에 두는 것

십자가 그길 그곳에 나설 때에

주님 나를 통해 일하시네

그 사랑 그 사랑 나를 살리신 그 사랑

하늘의 모든 영광 다 내려 놓으신

내 삶도 그렇게 내려놓습니다

주님 기뻐하시는 그 길 가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섬기러 오신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다시금 깨닫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고난의 길을 앞서 가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섬김과 내려놓음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시고, 예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살게 하옵소서. 이제 우리의 삶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며, 세상 속에서 주님의 빛을 비추는 자들로 사용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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