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마가복음 21강 / 이창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말씀/ 마가복음 10:1-31
요절/ 마가복음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C.S.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내 안에 이 세상의 어떤 경험도 결코 만족시켜 줄 수 없는 갈망이 있다면, 나는 다른 세상을 위해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다른 세상을 성경은 하나님 나라라고 표현합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그 해답을 제시해 주시고 있습니다.
I. 하나님 나라는 욕망 대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사람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을 떠나 요단강 건너편 베레아 지역에 들어가셨을 때, 많은 무리들이 그분을 따랐습니다. 그 가운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나와서 묻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그들의 질문은 이 지역의 통치자인 분봉왕 헤롯의 추잡한 이혼 사건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습니다(6장). 예수님이 만약 이혼이 옳지 않다고 답하시면 헤롯의 미움을 사 세례 요한처럼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었습니다. 만약 옳다고 하면 백성들이 크게 실망하고 다 돌아설 수도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교활한 술수에 넘어가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반문하십니다. "모세는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그들은 이혼증서를 주고 이혼할 것을 모세가 허락했다고 대답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방패 삼아 자신들의 이혼을 정당화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인함이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완악함’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 그 부패한 마음을 뜻합니다.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서 이혼을 완전히 막는 것이 가능할까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만약 이혼을 완전히 금지하면, 남편이 약자인 아내를 몰래 함부로 버리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혼증서를 쓰도록 하여 여자를 보호하고자 하셨습니다. 이처럼 이혼은 부득이하게 허락된 것이지, 하나님의 본래 의도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무엇일까요?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6-8).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 결혼의 원래 모습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결혼은 인간이 만든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신 신성한 것입니다. 결혼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도, 단순한 남녀 간의 계약 관계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하나 되게 하셨기에, 결혼은 그분의 창조 질서에 속합니다. 어떻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결혼을 가리켜 ‘Great Mystery(큰 비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두 사람의 연합을 넘어,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는 부부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비유합니다. 아내와 남편이 서로를 사랑하고 하나 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가정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펼쳐지고, 구속의 은혜가 드러나는 소중한 장소입니다. 가정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가까이 경험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9).
예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한 몸이기 때문에, 사람이 함부로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이혼하는 것은 곧 간음을 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혼을 금지하는 규칙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깊이 이해하고, 그 원리를 우리의 삶 속에 온전히 적용할 것을 요청하시는 말씀입니다. 결혼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며,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는 훈련을 받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길입니다.
한 목자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부서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노총각 직원 하나가 자신의 결혼 소식을 알렸다고 합니다.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요? 다들 축하한다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구동성으로 이런 반응이 나왔다고 합니다. “왜 결혼을 해? 이제 와서 굳이?” 이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 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입니다. 결혼해 봐야 결국 이혼할 수 있는데 뭐 하러 하느냐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이런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결혼을 하기 때문입니다. 결혼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결혼 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둘이 한 몸이 되지 못하고 각각 따로 있다가 마침내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에덴의 기쁨이 넘치는 결혼,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요? 남편과 아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기심을 내려 놓고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헌신하라는 예수님의 제자도를 그 가운데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결혼 생활 속에서 우리가 배우고 훈련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우리 가운데 결혼을 앞 둔 분들은 나의 기호와 이상형을 앞세우기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미 가정 꾸린 분들은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으로 한 몸 된 가정을 가꾸어 가기를 기도합니다.
II. 하나님 나라는 권력 대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13).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꾸짖으며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 그들은 예수님께서 큰 사역을 감당하고 계시니, 어린아이들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어린아이들은 어디를 가든지 귀하게 대접받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에서 어린아이들은 존재조차 숫자에 넣지 않을 만큼 무시 받던 존재였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예수님께 다가가려 하자, 제자들은 성가시다 여기며 그 길을 막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권위와 힘으로 세워진다고 여겼기에,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들은 마땅한 지위와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으십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막는 제자들에게 분노하셨고, 어린아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음을 명확히 선포하십니다. 더 나아가 어린아이들이 제자들이 배워야 할 본보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15).
여기서 예수님이 강조하신 어린아이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어린아이들은 스스로를 지키거나 의지할 만한 힘이 없습니다. 그들은 부모나 보호자를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자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은 그와 같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마가복음에 등장한 중풍병자, 혈루증 앓던 여인, 한 손 마른 사람, 수로보니게 여인 등은 모두 어린아이처럼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매달렸던 이들이었습니다.
보통 어른이 될수록 스스로의 힘을 믿고 의지하게 되고, 체면과 자존심을 중요하게 여기며 목에 힘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해질수록 마음은 더 가난해지고, 더 겸손해지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더욱 더 깨닫게 됩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변해가는 것입니다. 성숙할수록 오히려 어린아이가 되어간다니! 참으로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참된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III. 하나님 나라는 재물 대신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람의 것입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7).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가 부유한 청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그를 관리라고 부릅니다. 아직 젊은 나이에 높은 지위와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다니,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그는 어릴 적부터 한 번도 나쁜 것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욕 한 마디 한 적 없는 바른 생활의 사람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딸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사윗감으로 탐낼 만한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 나와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은 곧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나요?”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을 담은 훌륭한 질문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먼저 왜 나를 선하다 부르느냐 반문하십니다. 예수님은 왜 콕 집어 이 표현을 문제 삼으셨을까요? 이 청년이 인간은 결코 선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저보다 더 선한 분인 것 같으니 저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하며 나온 이 청년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선함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스스로 선함에 이를 수 없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다. 네가 하나님인 줄 아느냐? 착각하지 마라.”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십계명 중 다섯번 째부터 열 번 째까지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을 언급하시며 이 계명들을 제대로 지켰는지 물으십니다. 이 질문에 대해 청년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제 안에 선함이 없고 선을 행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놀랍게도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대답합니다. 이 말이 정말일까요? 한 번도 거짓말도 안하고 부모에게 대들고 반항한 적도 없을까요? CCTV 까고 한 번 추적에 들어가 볼까요?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21).
예수님은 인생에 대한 깊은 고민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온 이 청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한 가지 결정적인 부족함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그에게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선행이 부족하니 더 화끈한 선행을 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 명령을 통해 예수님은 그가 영생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치명적인 장애물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바로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재물이라는 우상이었습니다. 그는 삶의 중심에 재물을 두고, 그것에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쏟아왔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만을 의지한다고 생각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재물을 더 의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부자 청년에게 영생의 기회를 얻을 절호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어떻게 반응했어야 했을까요? “예수님, 감사합니다. 제가 재물의 종으로 살았음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재물을 팔아 나누어 주고, 오직 주님만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했다면 그는 영생의 기쁨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많은 재물 때문에 근심하다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영생을 간절히 원했지만, 자신의 재물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영생의 문턱에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장면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버릴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원숭이는 한 번 붙잡은 것은 절대로 놓지 않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를 이용하여 원숭이를 사냥합니다. 상자에다 바나나와 같은 원숭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넣어 두고 손이 겨우 들어갈만한 구멍을 만듭니다. 원숭이는 이게 웬 바나나냐 하며 손을 넣어 잡습니다. 일단 움켜 쥔 다음은 손이 상자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바나나만 놓으면 되는데 욕심 때문에 놓지 않고 꽥꽥 소리 지르다가 결국 붙잡히고 맙니다. 본문의 부자 청년은 무척 똑똑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원숭이와 동급으로 미련한 사람이었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을 따르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우리 삶에 최우선의 자리에 놓는 것에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버릴수록 더욱 풍성해지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24,25).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하나님 나라는 겸손하고 믿음 있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자연스럽게 교만해지고,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더욱 놀라며 예수님께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냐고 묻습니다(26). 재물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라 여겼던 제자들에게, 부자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냐는 의문이 생긴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7).
이 말씀은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인간의 힘이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겸손하게 하시고, 돌처럼 굳었던 마음을 부드럽게 바꾸십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이 은혜의 역사의 산 증인이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입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28).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약속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29-30).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재물을 희생하고, 가족보다 주님과의 관계를 더 우선시한다면 그에 대한 보상을 이 땅에서 여러 배로 받고,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약속하십니다. 이미 우리는 그 보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사는 집보다 몇 배나 큰 믿음의 공동체가 있고, 부모님 같고 형제 같은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내적으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구원의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성령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보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장차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영국의 폴 리지 목자님이 우리 예배에 와서 인생 소감을 발표하셨습니다. 이분은 22년 동안 무신론자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욕설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술과 파티를 즐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하여 앞날의 부귀 영화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세속적인 영국인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요 목자가 될 수 있을까요? 그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람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우연히 참석한 성경 읽기 모임이 그를 진리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죄인으로서 자신을 발견하고 마침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고 삶이 달라졌습니다. 술을 끊고 세금도 다 내고 부모님의 돈을 훔쳤던 것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후 사무엘서 말씀을 통해 성경 선생이자 목자로의 부르심을 영접하였고 지금까지 런던 지부를 섬기고 있습니다. 현재 영국에는 13 가정이 있고 23명이 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 폴 리지 목자님의 형제요 자매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시대 가운데 폴 리지 목자님처럼 바늘 귀를 통과하는 낙타들의 대열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어 없어질 부를 추구하며 그 안에 소망을 두는 것은 허영이다. 명예를 갈망하며 높은 지위에 오르려는 것 또한 허영이다. 육신의 정욕을 쫓는 것도 허영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재물과 권력, 욕망의 추구가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을 가로막을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로 그 나라의 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우리의 삶 속에서 재물, 권력, 욕망이 아닌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두는 삶을 선택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 그 나라에 들어가 참된 만족과 안식을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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