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사기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이창무 2023. 4. 2. 20:38
반응형

2023년 사사기 제 5 강 / 이창무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말씀 / 사사기 5:1-31
요절 / 사사기 5:12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일어날지어다 바락이여 아비노암의 아들이여 네가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

7080 세대 복음성가 중에 ‘노래할 이유 있네’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곡은 이런 가사로 시작합니다. “하늘문이 열리면 노래할 이유 있네 / 놀라운 일 그곳에 있으리 노래할 이유 있네” 이 노래의 마지막 부분이 재미있습니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매일 노래할 이유 있네” 이렇게 끝이 납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 노래의 작사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을 경험했기에 매일 노래할 이유가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드보라와 바락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들에겐 어떤 노래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이르되”(1)

이 날은 어떤 날입니까? 이 날은 하나님께서 철 병거 구백 대를 거느린 시스라를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위대한 승리를 주신 날입니다. 이런 날 빠질 수 없는 것이 노래입니다. 드보라는 북받치는 감격과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드보라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2)

찬양의 첫번째 이유는 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영솔하다’라는 말을 직역하면 ‘긴 머리를 풀어 헤치다’입니다. 이것은 전쟁을 하기 전에 나실인처럼 머리를 깎지 않음으로써 헌신을 맹세하던 풍습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결심을 하면 머리를 짧게 자르는 우리와는 정반대입니다. 드보라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즐거이 헌신하려는 마음을 주셨으니 그분을 찬송하라 권면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4)

찬양의 두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연만물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이런 하나님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났던 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조상들이 출애굽 이후 가나안에 장착하기 전까지 광야 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물을 내리시고 땅을 진동하게 하심으로 자신의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시스라의 전쟁에서도 함께 하셨습니다. 지금 시인은 우리 하나님,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를 주변 나라 왕들과 통치자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부르는 이 노래에 귀를 기울여 보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누가 이루십니까? 우리가 지난 주 말씀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친히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다만 하나님이 홀로 행하지 않으십니다. 자원하여 헌신하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십니다. 사람을 자신의 동역자로 삼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이 또한 자격 없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긴 머리 휘날리며 즐거이 헌신하는 나실인으로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기 전 이스라엘의 상항이 어떠했습니까?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6)

가나안 군인들이 대로를 통제하고 있었기에 행인들은 대로로 다닐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마을들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합계 출생률은 0.78로 떨어졌고, 이대로 가면 나라가 소멸될 수 있다는 우려와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새 신들 곧 바알과 아스다롯을 선택해 섬겼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의 결과는 그들은 약해질 대로 약해지고 말았습니다. 적군이 성문 가까이 왔지만 사만 명의 주민 들 중에 아무도 방패와 창을 들지 않았습니다. 싸울 무기도 없었고, 결정적으로 싸울 의지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철 병거 구백 대를 거느린 시스라와 싸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가나안 왕 야빈의 노예가 되고 말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놀라운 대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반전의 첫번째 계기가 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사 드보라가 일어난 것입니다. 비록 연약한 여인의 몸이었지만, 수많은 이스라엘의 아들 딸들이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보다 못 해 그들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드보라가 일어섰습니다. 드보라의 등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결코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니 여호와를 찬송하라”(9)

드보라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에서 방백들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백성들 가운데 즐거이 헌신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이 오합지졸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백성들 가운데 리더로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깃발을 들었는데 아들들이 잠자코 있을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지. 저도 따르겠습니다.’ 하며 자원하여 리더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빠질 수 없지. 저도 하겠습니다.’ 하면서 너도 나도 손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즐거이 헌신하려는 리더들이 선 이상 승리로 향해 가는 길에 절반은 온 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절반은 누가 채웠을까요?

“흰 나귀를 탄 자들, 양탄자에 앉은 자들, 길에 행하는 자들아 전파할지어다 활 쏘는 자들의 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일을 전하라” (10,11a)

여기서 흰 나귀를 탄 자들, 양탄자에 앉은 자들은 부유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오늘날로 치면 포르쉐나 람보르기니를 타는 사람들입니다. 길에 행하는 자들은 살림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BMW(Bus, Metro, Walk)를 즐겨 이용하는 서민들을 가리킵니다. 활 쏘는 자들의 소리는 전쟁터 한 가운데 있는 군인들을, 물 긷는 곳은 후방에서 빨래 하는 아낙네들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빈부귀천, 전후방을 막론하고 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동일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위대한 일을 행하려 하신다는 소식을 때로는 말로, 때로는 카톡으로, 때로는 인스타그램으로 널리 입소문이 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로 이대로 했고 그 결과 너도 나도 성문으로 내려가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앞서 대로에는 사람이 없던 모습, 아무도 리더가 되려 하지 않고 숨기에 바빴던 모습, 적국이 몰려오는 데도 무기를 들고 싸우려는 사람 하나 없던 모습과 비교해 보십시오.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이제야 하나님의 백성답습니다. 무기력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던 이스라엘에 이런 놀라운 변화의 방아쇠를 당긴 분이 누구입니까?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일어날지어다 바락이여 아비노암의 아들이여 네가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12)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무려 네 번이나 ‘깰지어다’를 외치시며, 잠들어 있던 드보라를 깨우셨습니다. 그녀에게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될 미래를 상상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저 앉아 있던 바락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에게 적군을 포로로 끌고 갈 미래를 상상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미래를 상상하는 한 사람이 일어서자 그 뒤를 따라 리더들이 일어섰고, 마침내는 온 백성들이 일어서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상상력을 사전에서 찾아 보면 경험하지 않은 것, 현재에 없는 대상을 직관하고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능력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문학이나 음악과 같은 예술의 영역에서부터 철학, 과학, 공학과 같은 학문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상상력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상상력이 없으면 시선이 오직 현실에 고착되어 조금도 발전이나 진보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심각한 손상을 입습니다. 상상력이 현저하게 저하된 사람들에게 우울 증상이 많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믿음의 영역에서도 상상력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는 것이 없으면 믿음도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상상력이 없으면 믿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펼치실 미래를 상상해 보도록 격려하시고 자극을 주십니다. 그 미래가 보일 때 우리는 깨어날 수 있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영적인 전투에 나서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될 수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는 우리 눈에 철 병거 구백 대를 거느린 시스라가 보입니다. 그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하고 아무 것도 없는 내 자신의 모습이 또한 보입니다. 아무리 봐도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돈과 권력과 쾌락의 힘은 너무 막강합니다. 그에 비하면 교회는 아무런 힘이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여기서 멈추어 버린다면 우리는 아예 싸움을 포기하고 숨 죽이며 조용히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씀을 통해 상상력을 불어 넣으십니다. 캠퍼스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는 날을 상상하게 하십니다. 이 나라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는 날을 상상하게 하십니다. 패배한 사탄의 목을 밟고 여호와의 노래를 부르며 승리의 축배를 들게 될 그 날을 상상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 날을 고대하며 오늘 우리 앞에 놓여진 영적인 싸움에 매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때에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내려오셨도다”(13)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강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백성인 열 두 지파는 당연히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쟁에 참여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열 두 지파가 한 마음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남은 자들만이 그렇게 했습니다. 누가 참여하고 누가 참여하지 않았습니까?

참여한 지파는 에브라임, 베냐민, 요단강 서쪽 므낫세 반지파인 마길, 스불론, 잇사갈, 납달리 이렇게 여섯 지파였습니다. 아말렉 지역에 살던 에브라임이 전쟁에 참여했고 남쪽 베냐민 지파가 에브라임의 뒤를 따랐습니다. 마길, 스불론, 잇사갈에서는 지도자들과 장군들이 전쟁을 도우러 왔습니다. 특히 스불론과 납달리는 죽음을 무릅쓰고 생명을 아까지 않고 싸웠습니다.

반면, 르우벤 지파는 처음에는 참전을 결심했기 했지만 이후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한가로운 목축 생활에 방해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 므낫세 반지파와 갓 지파를 말합니다. 이들은 아예 요단 강을 건너올 마음이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강 건너 불구경만 하려 했습니다. 단 지파는 배 타고 무역하고 상업하는 일에 바빴습니다. 해변의 아셀 지파는 바닷가에서 일광욕하고 회나 먹으며 평온한 삶을 즐기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에 벌어졌는데 왜 이들은 일어서지 않았을까요? ‘나는 나, 너는 너!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 아닌 이상 너희가 알아서 해’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만 잘 사면 된다는 지파 이기주의가 작동한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선택이 자신을 위한 좋은 선택이었을까요? 공교롭게도 이때 참여하지 않았던 지파들의 이후 과정이 순탄하지 않습니다. 아셀 지파는 기드온 때 잠깐 반짝한 것 외에는 거의 사라져 버립니다. 단 지파는 사사기 이후 아예 실종 상태입니다. 길르앗은 반복해서 외침을 당해 이방에 짓밟히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이미 가진 것을 지키는 것에만 몰두하느라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결국 가진 것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과 달리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한 지파들은 어떤 것을 경험하게 되었을까요?

“왕들이 와서 싸울 때에 가나안 왕들이 므깃도 물 가 다아낙에서 싸웠으나 은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19)

하솔 왕 야빈은 가나안 열왕들을 모아 연합군을 만들어 드보라와 바락에 대적을 했습니다. 이들은 전장에 나오면서 이스라엘을 격파하고 수많은 은을 전리품으로 얻어 가리라 기대했습니다. 오합지졸 이스라엘을 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전리품을 하나도 얻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이스라엘이 이렇게 예상 밖 대승을 거두게 된 것입니까?

하늘에서부터 별들이 시스라와 싸웠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별들로 하여금 천둥과 번개와 비를 시스라의 군대 위에 쏟아 붓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계절천인 기손 강이 쏟아지는 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급류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시스라의 군대는 이 급류에 다 떠내려가고 말았습니다. 휘몰아치는 물을 피하기 위해 철 병거를 버리고 사방으로 도주하는 시스라 군대의 말들의 발굽 소리가 울렸습니다. 앞서 노래했듯이 하늘이 물을 내리고 땅이 진동하는 장관이 펼쳐졌습니다. 므깃도 산에서 벌어진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저는 간혹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4강에 올랐을 때 그 감격을 내 남은 인생에서 다시 경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이 날의 위대한 승리 역시 사람이 일평생 한 번 경험하기 힘든 놀랍고 귀한 경험입니다. 단, 이 경험은 오직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한 지파만이 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참여하지 않은 지파들은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뒤늦게 ‘나도 그때 참여 했어야 했는데.’ 하면서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 없었습니다. 언제나 늘 그래왔듯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것은 오직 참여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이렇게 전쟁은 모두 끝났습니다. 하지만 아직 남은 것이 있었습니다. 누가 A학점인지 누가 F학점인지 평가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저주를 받을 자와 복을 받을 자를 나누고 각각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23)

먼저 저주 받을 자로 지명한 사람은 메로스 주민들입니다. 메로스가 어디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기손 강 근처 마을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쟁터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군대는 그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움 주기를 매몰차게 거절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전쟁을 돕는 일을 거부할 수 있습니까? 말이 안 됩니다. 그들이 저주 선언을 듣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있는 여인들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24)

다음 복을 받을 자로 지명한 사람은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입니다. 메로스 주민은 이스라엘 사람이면서 전쟁을 돕지 않은 반면에 이방 민족 출신 야엘은 적극적으로 참여를 했습니다. 여인으로 용사인 시스라를 넘어뜨린 야엘은 칭송을 받고 복을 받아 마땅합니다.

이제 시인의 시점은 시스라가 죽어 누워 있는 야엘의 장막에서 시스라의 어머니가 기다리는 대저택으로 이동합니다. 시스라의 어머니는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창가에 서서 더디 오는 아들을 기다리며 애먼 병거와 병거 바퀴만 탓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시녀들은 시스라의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시스라가 빼앗은 전리품이 너무 많이 늦게 오는 것이 틀림 없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처녀를 데리고 채색 옷을 입고 오고 있을 터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시스라는 겐 족속 여인에게 머리가 부서져 죽임을 당했습니다. 시스라의 옷은 자기의 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 동안 시스라에게 죽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 아들들의 어머니의 눈에서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리게 했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아마도 시스라의 어머니는 아들을 장하다 칭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시스라의 어머니가 피눈물을 흘릴 차례가 되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31)

이 노래의 마지막은 드보라와 바락의 기도입니다. 먼저 주의 원수들은 다 시스라와 같이 망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 다음 주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누구겠습니까? 드보라, 바락, 야엘 그리고 스불론, 납달리, 에브라임, 베냐민, 마길, 잇사갈 지파들입니다. 그들이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동해 바다 수평선 위로 해가 힘 있게 돋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누구나 그 모습을 보면 박력, 에너지, 열정, 패기가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전쟁에 즐거이 헌신하여 참여한 사람의 삶의 모습이 이와 같이 될 것입니다. 패기와 박력이 있고, 그의 삶에 에너지와 열정이 넘칠 것입니다.

‘헌신’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혹시 ‘부담스럽다’ ‘힘들다’ ‘괴롭다’ ‘나만 손해 본다’ ‘억지로 한다’ 이런 단어들이 연상 되십니까? 예전에 인터넷 한 게시판에 올라온 다음과 같은 글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고 유행어가 된 적이 있습니다.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 헌신을 했다가 얼마나 상처를 많이 입었으면 이런 말이 인터넷 밈이 되었겠습니까? 정말 사회 생활하다 보면 믿고 헌신했는데 결국 헌신짝처럼 버림 받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사회 생활에서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힘들고 괴로운 일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주님께 헌신해 봐야 헌신짝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역사이든 공동체이든 형제 자매든 신경 쓰지 말고 오직 나만 위해서 사는 것이 지혜롭고 현명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여러 차례 반복해서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즐거이 헌신하는 백성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은 원래 즐거운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은 해가 힘 있게 돋음과 같이 다이내믹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날마다 노래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억지로 쥐어 짜낸 헌신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즐거운 헌신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헌신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의 헌신을 기뻐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즐거이 헌신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기를 즐거워하십니다. 주가 일하십니다. 단, 주께 아끼지 않는 자와 함께 일하십니다. 주가 일하십니다. 단, 주를 신뢰하며 걷는 자와 함께 일하십니다. 우리가 드보라, 바락, 야엘처럼 주를 사랑하고 주님께 즐거이 헌신하는 주의 백성들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체험한 후 힘차게 노래하고 찬양하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반응형

'설교 > 사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리떡과 칼  (0) 2023.04.23
큰 용사여  (0) 2023.04.16
이스라엘을 구원한 꿀벌과 산염소  (1) 2023.03.26
사사를 세우신 하나님  (0) 2023.03.19
이스라엘의 배도와 음행  (0) 2023.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