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사기

이스라엘의 배도와 음행

이창무 2023. 3. 12.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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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사기 제 2 강 / 이창무

이스라엘의 배도와 음행

말씀 / 사사기 2:6-3:6
요절 / 사사기 2:17 “그들이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알렉산더 솔제니친이 1983년에 쓴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지역의 종교’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50년 전 내가 어릴 때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에 불어 닥친 대재앙에 대해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이후는 나는 6천만명 이상을 삼켜버린 이 비극의 원인을 파헤치기 위해 수백 권의 책을 읽었고 수많은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며 연구를 했다. 지금 나에게 누군가 우리가 이런 재앙을 당했던 이유에 대해 물어본다면 나는 이렇게 답을 줄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 문제다’” 이런 솔제니친의 분석이 단지 러시아에서 일어난 역사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3,000년 전 사사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났던 비극에도 동일한 원인이 있었던 것을 아닐까요?

사사기 1장에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각 지파가 했던 일들이 차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2장 6절에 여호수아가 나오고 이어서 여호수아의 죽음이 다시 또 언급됩니다. 그 이유는 사사기는 1장에서 첫 번째 서론이 나오고 2장에서 두 번째 서론이 나오는 독특한 구조를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뉴스에 비유를 하면 첫 번째 서론은 실제 사건을 그대로 전달한 것이고, 두 번째 서론은 사건에 대해서 기자가 요약하고 평가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살펴 볼 두 번째 서론은 사사기 전반에 관한 해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2:7)

시작은 좋았습니다. 여호수아가 각 지파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고, 그 땅으로 백성들을 보냈습니다. 백성들은 기업으로 받은 땅으로 가서 그 땅을 차지해 나갔습니다.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 백성들은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여호수아와 함께 했던 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10)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모두 죽은 후였습니다. 여호수아의 죽음과 곧 이은 장로들의 죽음은 이스라엘 역사의 전환점이 됩니다. 세대 교체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세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들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이 어떤 일인데 그 일을 모른다니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수백 년이 지난 후에 벌어진 일입니까? 아닙니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 그 아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합니다.

정말 다음 세대가 하나님이 누구신지 전혀 몰랐을까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아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말이야“ 이렇게 말했을 때 아들이 ”네? 하나님? 그게 누군데요?“ 이랬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애굽에 내려진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신 일, 홍해와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시고 날마다 만나를 내려주시고 반석에 물을 내시며 여리고성이 무너뜨린 일, 그들이 이런 일들을 전혀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국사 시간에 배워서 머리로는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알다’라는 말은 관계적이고 체험적으로 안다 것을 의미입니다. 여기서 그 후에 일어난 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말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분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나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경험적으로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미워하시는지, 그분을 어떻게 섬기는지, 그분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합당한지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특별한 역사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단지 지식으로만 알 뿐 그 역사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사사기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것, 이것이 사사기에 나오는 모든 문제의 원인입니다. 한 세대가 경험했던 하나님을 다음 세대에게 전하지 못한 것, 이것이 비극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그 후에 일어난 세대를 어떤 세대라고 말합니까? “다른 세대”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표현이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백성들은 이전 세대와 같지 않습니다. 다릅니다. 다른 세대입니다. 사사기는 이 다른 세대가 겪는 이야기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가운데 많은 분들이 극적인 회심을 통해 구원을 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못 나게 하는 부모님의 핍박을 견딘 경험을 한 분들이 많습니다. 또한 캠퍼스에서 일어난 엄청난 제자 양성과 부흥의 현장에 함께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열정이 넘치는 학생들로 바글바글하던 여름 수양회에 대한 추억이 있습니다. 내가 인도했던 양이 구원을 받았을 때 그 감격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철의 장막, 죽의 장막을 뚫는 선교 역사도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우리 목자님들은 이와 같은 드라마틱한 하나님 역사에 대한 체험과 하나님과의 뜨거운 만남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자님들의 자녀로 태어난 다음 세대는 다른 경험을 한 세대입니다. 이른바 모태 신앙이라고 해서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예배에 참석을 했습니다. 때문에 내 인생에 B.C.와 A.D.를 가르는 시점이 언제인지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어릴 적부터 배운 성경에 대해 아는 것도 많고 들은 것도 많습니다. 부모 세대와 달리 교회 왜 안 가냐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부모로부터 물심양면 지원을 받고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한 경우가 많습니다. 태어나 눈을 떠 보니 이미 교회 건물이 세워져 있었고 체계가 잡힌 안정된 상태에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과연 우리의 다음 세대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경험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될까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애쓰고 씨름할 목자를 계속해서 배출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어느 순간 목자의 대가 끊어지게 될까요? 다음 세대가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나아가는 예배자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머리로만 성경을 공부하고 형식적으로 예배하는 무늬만 신자로 남게 될까요?

저는 마음이 매우 복잡합니다. 어떤 때는 참 안심이 되고 감사함이 넘칩니다. 예를 들어 이번 전국 학생 수양회와 목자 선서식이 끝났을 때 그랬습니다. 또 어떤 때는 걱정이 되고 염려가 됩니다. 특히 다른 일은 열심히 하면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일을 소홀히 하는 모습을 볼 때 그렇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합니다. 지금은 어떤 결론 내리기에 아직 이른 시점인 것 같습니다. 결론은 지금부터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계승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계승에 성공한 다음 세대가 될 것인가?’ 아니면 ‘계승에 실패한 다른 세대가 될 것인가?’ 오늘 사사기 말씀은 지금 우리가 정말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11절부터 19절까지 다음 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네 가지 사이클을 따라 반복되는 고통 가운데 살아가야 했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첫번째 단계는 이스라엘의 범죄입니다. 구체적으로 바알과 아스다롯으로 대표되는 우상 숭배입니다. 두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주변 이민족을 통한 압제입니다. 세번째 단계는 이스라엘의 회개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울부짖음입니다. 네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사사를 통한 구원입니다. 그들은 이런 네 단계가 반복되는 삶을 무려 350여년을 살았습니다. 그것도 시간이 갈수록 타락의 상태가 더 심해집니다. 사사기가 진행될수록 반역은 더 심해지고, 억압은 더욱 가혹해지고, 회개는 더 얄팍해지고, 사사들은 흠이 많아지고, 사사들이 가져오는 구원과 부흥도 갈수록 더 약해집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도전으로 다가오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은 괜찮을지 모릅니다. 눈에 보이는큰 문제가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이 문제는 우리에게도 현실이 될 것입니다. 사사기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방심하면서 엉뚱한 곳에 마음을 빼앗겨 한 눈 팔고 있으면, 우리는 세상에게 다음 세대를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우리 다음 세대가 다른 세대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정말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빠르게 타락해가고 있습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죄라고 말하는 것들이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죄를 더 이상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 자녀, 우리 손자, 손녀를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요? 다음 세대에게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어떻게 물려줄 수 있을까요? 자녀들을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다음 세대를 위한 대책은 이미 신명기 6장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 속에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힘써서 할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십니다. 그리고 이대로만 하면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복을 받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크게 번성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꼭 지켜야 할 계명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

모세의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너와 네 자손이 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야!’ 누구에게 한 말씀입니까?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가르치라는 명령입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너는 자녀들이 아니라 부모들입니다. 신명기는 ‘부모로서 자녀를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말로 자녀를 가르치기 전에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내가 먼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후에 계명을 지켰습니까? 지난 주 말씀에서 본 대로 이스라엘은 70%만 순종했습니다. 대체로 순종하다가 너무 힘들 것 같으면 순종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잃을 것 같으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모습에 누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겠습니까? 뻔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이런 모습을 다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은 부모의 모습을 보고 ‘적당히 순종할 수 있구나. 그래도 되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70% 순종이 50%가 되고 50%가 30%가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늘날 세상의 모습을 보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지금도 세상이 이렇게 타락해가고 있는데, 우리 자녀들이 커서 살아가는 세상은 또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면 마음에 걱정과 두려움이 생기는 겁니다. 하지만 저에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가치 있다고 말하면서 정작 나는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그냥 빈껍데기 같은 신앙으로 의무감으로 순종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나는 정말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고 감사함으로 수고하고 있는 걸까? 하나님을 섬기는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함이 식어져 버린 나에게서 아이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그것이 제일 두렵습니다.

우리 교회가 겉으로 보기에 괜찮아 보인다 해서 마냥 안심할 것만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멀어져 버린다면 외적인 것은 한순간에 다 무너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섬기려 하지 않고 사랑으로 인내하지 않고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산다면, 우리의 다음 세대는 다른 세대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다음 세대, 나의 자녀와 손자들도 알기를 원하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위대한 일을 날마다 기억해야 합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합당하게 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냐 하거든”(신6:20)

언제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훗날에 자녀가 물어볼 것입니다. 부모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이유를, 왜 부모가 그렇게 사는지 왜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지 그러면서도 왜 기쁨으로 행복해하는지 궁금해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도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가치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신앙의 진실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로서 자녀를 정말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자녀를 정말 사랑한다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0절에 보면 하나님은 백성들이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은 것에 진노하셨습니다. 진노하신 하나님은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21)

미완의 순종에 대해 하나님도 가나안 정복을 미완의 상태로 남겨 두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겨 둔 가나안 족속들을 이용해 이스라엘을 위해 두 가지를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첫째, 이방 민족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시험하고자 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22)

이방 민족들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대적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가시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런 가시를 원하지 않습니다. 가시 같은 존재들은 아예 없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시가 되는 이방 민족들을 그들 곁에 두셨다는 것은 모순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이런 시험은 없는 것이 더 좋을까요?

누구나 시험을 원하지는 않지만 누구에게나 시험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험 자체는 즐거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지만 그 시험을 통해서 얻는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나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점검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얻게 됩니다. 시험을 거치면서 보다 더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둘째, 다음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쳐 알게 하고자 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3:2)

여호수아와 그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민족들과 전쟁을 하면서 그 땅을 정복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세대들은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전쟁을 가르치려고 이방민족들을 남겨두셨습니다. 하나님이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려고 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남고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전쟁에서 승리하는 법을 가르치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필승의 전략을 세우고, 무기 사용법을 익히고, 부대를 어떻게 배치하는지, 적의 공격에 따라 어떻게 대응하는지 이런 전쟁의 기술을 배워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월등한 무기와 숫자로 승리한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싸워 승리했습니다. 앞선 정복 전쟁에서 여리고 성 전투를 비롯해 이런 사례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승리는 백성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 민족들과의 전쟁에서 배워야 할 것은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느냐가 승리의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도 크고 작은 전쟁이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죄악 된 본성과 매일매일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전쟁 같은 상황으로 내몰리기 일쑤입니다. 입시 전쟁, 취업 전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전쟁을 겨우 통과했는데 이제는 출근길이 전쟁터로 끌려 가는 길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정말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편 우리는 이런 전쟁 상황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매달리지 것 외에는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끝까지 싸웠을 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나를 대신해 싸우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시험과 전쟁, 이 두 가지 우리가 다 싫어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만 아니라 하나님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시험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으십니다. 전쟁을 미워하시는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수단을 사용하십니다. 우리에게 시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전쟁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내신 첫번째 시험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 시험에서 어떤 점수를 받았을까요?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에 거주하면 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5,6)

첫번째 시험 문제는 자녀들의 결혼 문제였습니다. 결과는 낙제였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방 민족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고 하셨건만 이스라엘은 이를 어기고 혼인 언약을 맺어버렸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불순종한 결과 우상 숭배 문화가 이스라엘 깊숙이 스며들게 되었습니다. 첫 시험부터 낙제라니 너무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과거의 이스라엘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시험하십니다. 우리들도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처럼 이방 백성들 가운데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 답게 사는 지 여부를 시험 받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는 이 시험에서 어떤 성적을 내고 있을까요? 특히 본인의 결혼 또는 자녀의 결혼 문제에 있어서 어떤 답을 선택하려고 합니까? 여기서 잘못된 답을 선택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결과는 사사기가 우리에게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사 시대 이스라엘의 비극, 솔제니친 시대 러시아의 비극이 결코 우리 시대의 비극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백성,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 크신 일들을 결코 잊지 않는 백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다음 세대가 주의 말씀 앞에선 참된 예배자요 세상을 이길 주님의 군사로 세워 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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