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사기

이스라엘을 구원한 꿀벌과 산염소

이창무 2023. 3. 26.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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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사기 제 4 강 / 이창무

이스라엘을 구원한 꿀벌과 산염소

말씀 / 사사기 4:1-24
요절 / 사사기 4:4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클래식 음악에서는 주제와 변주와 반복이 자주 등장합니다. 하나의 주제가 되는 선율이 반복되되 조금씩 다르게 다양하게 변주되는 것이 클래식 음악의 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에는 매번 반복되는 주 멜로디가 있습니다. 바로 범죄-징계-회개-구원으로 이어지는 네 단계 사이클입니다. 그런데 이 사이클이 항상 똑같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사사가 등장할 때마다 새로운 변주가 일어납니다. 어떤 부분에서 변주가 일어 났는지 살펴 보는 것이 사사기 읽기의 묘미입니다..

오늘은 사사기 열 두 명의 사사 중에 네 번째 사사인 드보라와 그의 시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사사기의 주제가 어떻게 변주되고 있을까요?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1)

모압 왕 에글론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한 왼손잡이 에훗이 팔십 년 동안 사사로 있는 동안 이스라엘은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에훗이 죽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하나님 목전에서 악을 행했습니다. 에훗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감히 못했는데 죽고 나니 우상 숭배의 본성이 다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2,3)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결국 이들을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파셨습니다. 앞선 사사들의 시대에는 이스라엘은 메소보다미아, 모압, 블레셋 등 외국 세력의 압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과거에 마땅히 정복 했어야 했던 가나안 사람에게 오히려 정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했더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을 겪게 되었으니 백성들로서는 더욱더 뼈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가나안 왕 야빈은 군대장관 시스라에게 철 병거 구백 대를 주어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습니다. 여기서 ‘학대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본래 쥐어짜다 또는 짓누르다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시스라가 철 병거 구백 대로 위협하며 이스라엘을 쥐어짜고 강하게 압박한 것입니다. 그것도 역대 최장기간인 이십 년 동안 쥐어짜고 짓밟았으니 당시 이스라엘의 형편이 얼마나 피폐했겠습니까? 견디다 못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옷니엘과 에훗을 사사로 세우셨던 하나님이 이번에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어떻게 응답하실까요? 이번 적은 보통의 적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최신 무기인 철 병거 구백 대를 거느린 용장 시스라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옷니엘과 에훗보다 더 강력한 사사를 보내시지 않을까요?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4)

놀랍게도 이 위기의 순간 전면에 등장한 인물은 드보라라는 여인이었습니다. 왜 하필 이 순간 여인이 사사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게 되었을까요? 철 병거 구백 대에 맞설 사내 대장부가 이스라엘에 한 명도 없었다는 말입니까? 남자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현실이었습니다. 5장 6,7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로를 놔두고 소로로만 다녔습니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며 집 안에만 콕 박혀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남자들의 사기가 얼마나 저하되어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남자들이 믿음과 용기를 보여주지 못할 때, 하나님은 여인을 일으키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도 하십니다. “Why Not?” 여자라고 안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드보라가 사사로서 한 일을 무엇입니까?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5)

드보라가 사사가 되어 한 일은 재판하는 일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모든 종류의 사회적, 법적 사건들을 해결하기 위해 드보라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우리는 사사라고 하면 적과의 전쟁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두는 군사령관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립니다. 사사가 재판을 하다니 조금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없는 시기에는 하나님 백성의 일상 생활 속에서 재판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것이 사사의 중요한 책무였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저자는 드보라의 활동을 묘사하며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여기에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려나무에서 단맛이 나는 시럽을 채취했습니다. 그래서 종려나무를 가리켜 ‘꿀 나무’라고 불렀습니다. ‘드보라’라는 이름은 꿀벌이라는 뜻입니다. 결과적으로 5절 말씀은 다음과 같이 풀어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꿀벌이라는 이름의 드보라가 꿀이 나오는 나무인 종려나무 아래 재판석에서 달콤한 하나님의 의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

우리는 드보라를 통해서 하나님이 택하신 사사는 원수로부터 그의 백성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드보라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원수인 죄와 죽음과 사단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자로 알고 믿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오직 그런 분으로만 아는 것은 너무 폭이 좁은 것입니다. 자칫 구원 받은 이후에 예수님은 더 이상 나와 큰 상관이 없는 분으로 여기게 되기 쉽습니다. 그리스도는 구원자이며 동시에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말씀을 통해 또한 성령을 통해 무엇이 의의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인지 알려주시고 우리가 그 길을 따라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길을 따라 사는 삶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에 기초해 볼 때 한 마디로 ‘꿀 빠는 삶’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시편 19편 10절은 ‘여호와의 법은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은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말씀은 우리 마음에 공의와 인애로 다스려지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 공부하는 시간은 꿀맛 보는 시간이고, 예배 때 말씀 듣는 시간은 꿀을 빠는 시간입니다. 게다가 이 꿀은 살을 찌게 하거나 건강을 해치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에게 살아나게 하고 우리 눈을 뜨게 하게 생명의 꿀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귀한 꿀을 주시는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려나무 아래 드보라에게 나아갔듯이 우리가 생명의 꿀을 사모함으로 예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재판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사사는 역시 싸워서 백성을 대적으로부터 구원하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보통 사사들은 적들과 전투를 벌일 때 백성을 이끌고 앞장을 섰습니다. 그렇다면 드보라도 역시 직접 시스라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을까요? 그러나 드보라는 직접 전투를 지휘할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6)

하나님은 바락에게 이 일을 맡기실 작정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드보라가 여자라서 싸움에 능숙하지 못해서 일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어차피 이 전쟁은 전쟁 기술로 승패가 날 전쟁이 아닙니다. 드보라가 지휘를 해도 얼마든지 승리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바락을 세우도록 하신 까닭은 위축될 대로 위축된 이스라엘 남자들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연약하다고 해서 아예 아무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떠한 변화도 성장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 엄청난 사명을 맡기면서 무엇을 주었습니까? 미국이 우크라이나에게 주었듯이 최신식 대전차 무기를 주었나요? 아니면 병력을 보태주기라도 했나요?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7)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드보라는 바락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라 오직 승리의 약속만을 전했습니다. 드보라는 ‘병력과 무기를 보태 주고 싶어도 그럴 만한 능력이 나에게 없구나. 말씀 밖에 줄 게 없어서 미안하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된다. 말씀으로 충분하다.’ 이렇게 바락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도록 권면했습니다. 이것은 말씀의 대언자인 드보라 자신이 먼저 그 말씀을 믿고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목자로 살면서 종종 무력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시험 공부하느라 힘들어 하는 사람은 합격하게 해 주고 싶고, 취업이 안 되어 낙심하고 있는 사람은 빨리 취업을 시켜 주고 싶고, 물질이 없어 고생하는 사람은 물질을 주고 싶고, 아파서 괴로운 사람은 빨리 병이 낫게 해 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뾰족하게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한계를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전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은과 금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말씀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도록 권면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그 사람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요 위로요 힘입니다.

그러면 드보라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에 대한 바락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8)

바락은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 순종하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붙였습니다. 드보라가 자신과 함께 하면 자기도 가고 함께 가지 않으면 자기도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바락이 왜 그랬을까요? 이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말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연약한 자신에게 용기와 믿음을 북돋워줄 수 있는 여인이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런 바락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남자가 되어서 누님 치맛자락이 붙잡고 늘어지다니 한심하다 한심해. 절반의 믿음으로 나설 바에 그냥 집에 가라’ 이렇게 생각십니까? 아니면 ‘그래도 안 하겠다고 안 하고 드보라와 함께 라면 싸워보겠다고 했으니 얼마나 기특한가? 절반의 믿음이라도 믿음은 믿음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당사자인 드보라는 어떻게 보았을까요?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9)

드보라는 주저 없이 바락과 함께 가겠다고 선언합니다. 드보라는 바락을 한심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연약한 바락을 이해해 주었습니다. 바락의 용기와 믿음을 북돋아줄 수 있다면 전쟁터이든 어디든 함께 하겠다 말하며 안심을 시켜주었습니다. 드보라는 절반의 믿음을 귀하게 보았습니다.

실제로 드보라는 시스라와 전투에 나서는 바락과 함께 갔습니다. 바락이 시스라의 철 병거 구백 대를 보고 겁을 집어 먹고 주저 앉아 있을 때 다음과 같은 말로 용기와 믿음을 불러 일으켜 주었습니다.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 주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덕분에 바락은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적군을 전멸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드보라는 바락에게 이번 원정길에서 영광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전혀 아무런 영광도 얻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승리의 영광은 누릴 수 있되, 적장 시스라를 잡는 영광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락은 절반의 믿음 때문에 영광도 절반만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드보라의 말대로 적장 시스라는 잡는 영광은 바락이 아니라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몫으로 돌아갔습니다. 야엘이 시스라를 유인해 우유를 먹여 재운 뒤 장막 말뚝을 그의 머리에 박아 죽였기 때문입니다. 야엘이란 이름은 산염소라는 뜻입니다. 산염소에게서 나온 우유가 이스라엘의 승리에 절반을 채워 준 셈입니다.

컵에 절반의 물이 차 있을 때 어떤 사람은 ‘벌써 절반이나 찼네’라고 말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아직 절반 밖에 없네’라고 말합니다. 누가 틀렸나요? 사실 둘 다 맞습니다. ‘0’을 기준으로 볼 것이냐 ‘100’을 기준으로 볼 것이냐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가장 정확한 것은 양쪽 측면 모두에서 보는 것입니다. 오늘 드보라가 우리에게 이런 균형 잡힌 시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도 단번에 0에서 100으로 끌어올릴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0에서 50이 된 것을 보았다면 우리는 기꺼이 박수를 쳐주어야 마땅합니다. 더 좋은 것은 내가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이 부족한 50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최상은 아닙니다. 여기서 더 좋은 것은 그 사람이 아직은 50이 부족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나머지 50마저 채워 100을 향해 나아가도록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이자 바락의 누님이자 이스라엘의 어머니인 드보라의 리더십입니다. 서포트 하는 리더십, 키워주는 리더십, 양육의 리더십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런 리더십은 종종 남자보다는 여자에게서 더 탁월하게 발현되곤 합니다.

무엇보다 이런 리더십의 최고봉이자 완성형은 바로 우리의 영원한 사사, 완전한 사사이신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복음서의 열 두 제자와 사도행전의 열 두 사도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잘 믿겨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미련하고 믿음이 없던 제자들이 성령 충만하고 담대한 믿음을 소유한 사도들이 될 수 있었습니까? 삼 년 반 동안 예수님이 함께 하시며 온갖 정성을 다해 그들을 키워 주시고 양육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제자들을 때로는 격려해 주시고 때로는 책망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시기가 되자 예수님은 제자들이 역사의 전면에 설 수 있도록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대신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들을 계속 서포트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열 두 사도는 강력한 사탄의 진영을 무너뜨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양육하고 계십니다. 누구를 통해서 입니까? 종교 개혁자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교회를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사람에게는 교회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고 낳고 기르시는 것처럼 교회는 신자를 양육하는 어머니의 품과 같습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 모두는 어머니인 교회의 품 안에서 자랐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이, 성령님이 누구신지를 배웠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교회의 품 안에서 러너스와 다음 세대가 성장하고 있습니다. 설령 좀 부족하고 연약해도 목자님들이 이해하고 지원해 주시는 덕분에 믿음이 자라고 있습니다. 또한 목자님들이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끊임 없이 격려해 주시는 덕분에 점점 더 업그레이드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인 이 교회를 사랑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교회를 사랑합니다. 내 영적 생명의 자궁이자 요람은 지금까지 나를 키워 준 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바락이 계속 드보라의 치마만 붙잡고 있을 수 없었듯이, 건강한 신자는 교회의 품 안에서만 계속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양육을 받은 후에 거친 세상 속으로 나아가 하나님만 의지하고 도전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맞부딪치고 이 세상에는 많은 시스라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진검승부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진 철 병거 구백 대 앞에서 우리가 기죽으면 되겠습니까? 심지어 내가 예수님 믿는다는 사실을 감추기에 급급해서야 되겠습니까? 꿀 먹은 벙어리가 되라고 주님께서 꿀 같이 단 말씀으로 우리를 양육하신 것이 아닙니다. 꿀을 먹고 힘을 내서 믿음의 승리를 쟁취하라고 우리를 이제까지 양육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짠 맛 내는 소금이 되고 복음의 빛을 발하는 언덕 위의 도시가 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어머니인 교회에서 열심히 양육을 받고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이 세상을 이길 주님의 군사가 되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함께 세워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승리가 사사기의 다른 이야기와 구별되는 지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인공이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점입니다. 전쟁을 지시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사사 드보라가 있었습니다. 직접 전쟁터에서 군사들을 이끈 장군 바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망친 시스라를 잡은 이방인 야엘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승리는 이 세 명의 주인공들이 함께 만들어 낸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이 이야기에서 여인들이 두드러진 활약을 한다는 점입니다. 꿀벌 드보라는 사사기에서 유일한 여자 사사입니다. 시스라를 잡는 영광도 여자인 산염소 야엘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도 ‘이스라엘을 구원한 꿀벌과 산염소’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습니다. 세 명의 주인공 그리고 주목할 만한 여인들의 활약 뒤에 숨어 있는 진짜 영웅은 따로 있습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신지라”(23)

이 전쟁의 진짜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셨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을 구원한 분은 꿀벌도 아니고 산염소도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드보라, 바락, 야엘 모두 하나님이 각자 역할을 주시고 불러서 쓰신 사람들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영광 받아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오늘날 남성 우위냐 여성 우위냐를 놓고 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은 다 부질 없는 짓입니다. 교회는 남성 우위도 아니고 여성 우위도 아닙니다. 홀로 하나님만이 위에 계십니다. 교회 안에서 누가 주연이냐 조연이냐를 놓고 따지는 것도 다 쓸데 없는 짓입니다. 홀로 하나님만이 진짜 주인공이십니다. 남자든 여자든 주연이든 조연이든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은혜요 특권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 삶의 고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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