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사기

큰 용사여

이창무 2023. 4. 16.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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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사기 제 6 강 / 이창무

큰 용사여

말씀 / 사사기 6:1-16
요절 / 사사기 6: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 키보드 상단에 보면 F 1부터 F 12까지 ‘Function Key’를 모아 놓은 곳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F5 키는 대부분 프로그램에서 현재 화면을 새로운 정보로 업데이트해 주는 특정한 용도로 기능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이 키를 가리켜 ‘새로고침’ 키라고 부릅니다. 만약 이 새로고침 키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페이지를 최신 정보로 업데이트 할 수 없어서 굉장히 답답할 것입니다. 해묵은 정보를 바탕으로 상황을 오판하여 잘못된 의사 결정을 할 수도 있습니다. 새로고침 키가 꼭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악순환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을 그리고 두려움에 갇힌 기드온을 새로고침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새로고침 키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1a)

이스라엘은 또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습니다. 위기 때에 여호와께 돌아왔다가 평안해지면 다시 우상숭배에 빠지는 악순환이 벌써 세 번째입니다. 사사기의 사이클에 이미 익숙해진 우리는 다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1b)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셨습니다. 고통의 기간은 칠 년으로 이전보다 더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강도는 이전보다 훨씬 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 사람의 눈을 피해 집을 버리고 험준한 산지에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만들어야만 했습니다(2). 미디안은 정치적 지배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경제적 착취에만 집중해 그 땅의 모든 곡식을 약탈해 갔습니다(3). 그들은 이스라엘 가운데 먹을 것을 쌀 한 톨조차 남겨 두지 않았습니다(4).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굶주렸습니다. 이제까지 없었던 최악의 압제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부르짖고 또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6,7).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에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사사기의 패턴에 따르면 다음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를 일으키실 차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8a)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이 구원자를 즉각 보내시는 대신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사람들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첫 번째 응답은 즉각적인 구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 편의 메시지였습니다.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두 가지를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과 백성들이 저지른 일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8b-10a)

하나님은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해 내시고, 노예 살이에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학대하던 주변 나라와 민족들의 압제로부터 여러 차례 그들을 건져내 주셨습니다. 덕분에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왜 이렇게 큰 은혜를 베푸셨을까요? 왜 그들에게 이토록 전폭적으로 사랑을 쏟아부으셨을까요? 이는 하나님이 그들의 유일한 하나님이 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먼저 참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되고 또 그들을 통해서 세상 만민이 하나님을 알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신들을 숭배하지 말도록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무엇을 했습니까?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10b)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신을 섬기며 서서히 가나안 사람에게 동화되어 갔습니다. 하나님을 잊고 점점 더 멀어져 갔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미디안의 착취와 약탈 앞에 땅굴 파고 사는 두더지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사를 보내 구원하시기 앞서 왜 먼저 선지자를 보내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셨을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에 앞서 그들이 구원이 필요한 상태에 처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이해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자신들의 우상숭배의 죄가 자신들을 어디로 이끌었는지 깨닫기 원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전한 말씀을 통해 백성들이 참으로 회개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이 말은 곧 그동안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진정한 회개의 표시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옷니엘, 에훗, 드보라 등 사사들이 죽고 난 후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그들의 회개가 진심이 아니라 피상적인 회개였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백성들은 후회한 것이지 회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이 두 가지를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

후회와 회개, 둘 다 깊은 슬픔과 고통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다릅니다. 후회는 진정한 변화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반면 회개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후회는 죄의 결과에 대한 슬픔이지, 죄 그 자체에 대한 슬픔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쁜 결과가 없었다면 슬퍼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후회에는 죄가 어떻게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훼손하는지에 대한 애통함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가 빚어낸 고통이 사라지고 나면 즉시 다시 또 죄를 저지릅니다. 여전히 죄에 대해 매력을 느끼고 죄를 철저히 미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 마음 속에 박힌 죄의 뿌리가 뽑히지 않습니다.

또한 후회의 특징은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다는 데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상처를 받았는가, 내 삶이 어떻게 망가졌는가,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힘든가’ 오로지 여기에만 몰두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초점을 하나님께 맞춥니다. ‘나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셨는가, 나의 죄가 얼마나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훼손했는가, 나의 죄가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얼마나 소홀히 여기고 짓밟았는가’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말 슬퍼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누리던 즐거움과 만족의 상실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의 손상입니까? 죄의 결과입니까? 아니면 죄 그 자체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반복해서 동일한 죄의 구덩이에 계속 빠지고 있는지 아닌지 보면 됩니다. 만약 같은 죄를 반복해서 저지르고 있다면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 후회만 거듭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 시간이 지나도 영적인 성장이 없이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지 아닌지 보면 됩니다. 만약 정체 상태에 빠진 지 오래되었다면 회개한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죄와 헤어질 결심을 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진짜 문제는 내가 이런 상태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성장을 전혀 이루지 못하고 있음에도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느낍니다. 후회해 놓고서 회개했다고 강변합니다. 자기 영혼의 현주소를 직시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 말씀을 내게 전해 줄 성경 선생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듣고 배우고 나서야 비로서 우리는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내게 있어 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발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 삶을 새롭게 하시는 수단입니다.

삶의 여러 난관으로부터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기대하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죄를 드러내고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부터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회개를 하고 죄와 결연히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맴맴 제 자리 도는 삶, 영적인 정체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내 삶을 ‘새로고침’할 수 있는 길입니다. 내 마음이 먼저 새로고침을 받아야 내 삶이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환경과 조건이 바뀌어도 내가 새로고침을 받지 않으면 결국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내 삶에서 F5 새로고침 단축키는 ‘말씀 앞에서 참된 회개’입니다. 우리가 말씀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며 죄의 결과가 아닌 죄 자체에 마음 아파하는 참된 회개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죄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우리 삶에 새로고침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회개했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런 징후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우상을 불태우거나 바알의 신전을 허물지 않았습니다. 선지자가 문제의 핵심을 분명하게 지적해 주었지만 그들은 고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너희는 더 고생을 세게 해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하셨나요?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11, 12)

하나님은 기드온을 사사를 택하여 세우시고 그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임무를 부여하십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진정으로 회개했다는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행하십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에게 계속 상처를 주면서 이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도 참아주고 감당해 주는 것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일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도와주려는 마음이 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십니다. 회개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시고 곤경에 처한 자기 백성에게 먼저 구원의 손길부터 내미십니다. 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일 뿐만 아니라 그 누구보다 은혜롭고 자비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종종 거룩함과 사랑 둘 중 하나를 희생시키는 대가로 다른 하나만 강조하곤 합니다. “이런 짓을 했으니 하나님은 그들을 또는 나를 절대로 받아 주실 리가 없어. Never. Ever.” 이렇게 말하거나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누구든 상관 없이 모든 사람 또는 나를 무조건 받아 주실 거야. Everything is OK.” 이렇게 말합니다. 또 대부분은 이 둘 사이를 일관성 없이 왔다 갔다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거룩하심에 대해 전혀 타협하지 않으시는 동시에 그분의 은혜와 자비에 있어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이 영광스럽게 만나는 한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서 저주 받은 죽음을 당하게 하실 정도로 죄를 미워하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과 하나님의 끝없는 긍휼이 완벽하게 하나로 통합된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날마다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금까지 등장한 모든 사사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다 주저함 없이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아무도 토 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다릅니다.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13)

기드온은 이런저런 말이 참 많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고 선언합니다. 양식도 다 빼앗기고 토굴에 숨어 살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말할 수 있냐며 항변합니다. 더 나아가 출애굽의 기적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이 그런 기적을 행하셨을 지 몰라도 현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지 않느냐 묻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틀림 없다고 말합니다. 기드온은 주저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반박으로 있습니다. 큰 용사로의 부르심,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다 현란한 말잔치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큰 용사로서 비전과 소망을 주려고 먼 길 달려왔던 여호와의 사자는 얼마나 당혹스러웠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기드온의 말이 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출애굽 때 있었던 놀라운 일들이 이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신 것도 엄연한 팩트입니다. 그들이 토굴에 거주하면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다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 사실에 대한 해석에 있습니다. 기드온은 이 모든 사실들을 ‘더 이상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이다.’라는 증거로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 버렸습니다. 이 해석은 진실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기드온 자신의 뇌피셜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드온의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도 기드온과 같은 실수를 쉽게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실이 어려울 때 이를 하나님이 나를 떠나셨다는 증거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삶이 너무 힘들게 느껴질 때 하나님이 더 이상 나와 함께 하지 않으신다고 단정합니다. 계속 실패를 맛볼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다면 도저히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책임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처럼 몰아세웁니다. 그리고 이렇게 의문을 품습니다. “하나님, 왜 저를 도와주지 않으세요?” “주님, 왜 아직까지도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십니까?” 감히 하나님께 직접 대들지는 못하겠고 만만한 목자님에게 까칠하고 딱딱하게 굴면서 온갖 의심과 불평을 쏟아 놓곤 합니다.

그러나 오해입니다.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한번 택한 자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절대적인 사랑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어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만큼은 의심할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그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순간 우리가 물어야 할 제대로 된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은 제가 무엇을 깨닫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제게 어떤 유익을 주시려 하십니까?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빚으려 하십니까?’ 힘들 때 그런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요? 이렇게 반문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영적으로 병든 상태라는 증거입니다. 기드온도 마찬가지이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지만 영적으로 건강한 상태가 아닙니다. 새로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 하나님의 내려 주신 처방전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먼저 행동하고 직접 경험해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질문에 구구절절 이론적인 답변을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실제적으로 기드온이 해야 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14a)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가서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에 도전해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탁상공론은 그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일단 내가 명한 대로 해 보아라. 질문은 잠시 보류하고 먼저 행동에 옮겨 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기드온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일단 순종하고 경험해 보면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 하시는 지 아니면 나를 버리신 것인지 저절로 이해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어서 기드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14b)

이 말을 들은 기드온은 펄쩍 뜁니다. 이스라엘의 별 볼 일 없는 지파의 가장 약한 가문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자신이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느냐며 이의를 제기합니다(15).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서 기드온을 큰 용사로 부르셨습니다. 사실 그는 두려워서 포도주 틀 안에 쭈그리고 앉아서 밀 타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큰 용사일 수 있습니까?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기드온을 조롱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큰 용사라고 하시면 큰 용사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든, 자기가 자신을 어떻게 보든 하나님이 큰 용사라고 하시면 큰 용사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부르신 큰 용사이기 때문에 가야 합니다. 자신의 형편이 어떻든지 주위 상황이 어떻든지 가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붙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기드온 안에 감추어진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 내어 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잠재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16)

기드온이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없다고 한 말은 맞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도 맞습니다. 기드온이 이미 자신 안에 있는 힘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안다면 말입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주신 처방전을 정리하자면, ‘소명과 약속을 붙들고 도전하는 주의 백성이 되라’ 입니다. 소명과 약속과 도전, 이 세 가지가 기드온과 그의 세대에게 주신 하나님의 키워드였습니다. 오늘날 청년 세대도 기드온 세대와 닮은 구석이 참 많아 보입니다. 포도주 틀 안에서 밀 타작했던 기드온처럼 두려움이 많고 위축되어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전한 말씀을 영접하는 대신 부정적인 말을 쏟아 놓았던 기드온처럼 의심이 많고 예민합니다. 요즘 MZ 세대의 3요가 있다고 합니다. “이걸요? 제가요? 왜요?”입니다. 이 3요 앞에서 부장님은 뒷목을 잡고 대기업 임원들도 벌벌 떤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떨지 않으십니다. 기드온을 깊이 이해하시고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도와주십니다. 현실 앞에 분노하지만 막상 아무 것도 하지 못하던 기드온을 택하여 그를 큰 용사로 부르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가라’ 명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답답한 현실에 갇혀 방구석에 앉아 의심하고 불평하는 기드온 세대에게도 주님이 주시는 소명과 약속을 붙들고 현실에 도전하는 기드온 세대로 새로고침하라 말씀하십니다. 기드온 세대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소명, 약속, 도전을 동시에 누르는 단축키로 우리 삶을 새로고침 할 수 있기를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경험하며 이 시대의 우상들과 담대히 맞서 싸우는 큰 용사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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