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사기

사사를 세우신 하나님

이창무 2023. 3. 1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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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사기 제 3 강 / 이창무

사사를 세우신 하나님

말씀 / 사사기 3:7-31
요절 / 사사기 3: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최근 넷플릭스에 올라 온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가 세간에 큰 화제입니다. 이 다큐 안에는 JMS 정명석, 오대양, 아가동산 김기순,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등 여러 이단들의 충격적인 실체가 담겨져 있습니다. 다큐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의아해 합니다. “왜 저런 말도 안 되는 이단 세력으로부터 당장 빠져나오지 않고 거기 머무는 사람들이 있는가?” ‘왜’는 ‘왜’겠습니까? 그 세력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벗어날 힘이 없는 것입니다. 죄와 죽음과 사탄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실존이 사실상 이들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진정한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완전한 구원자, 영원한 사사가 누구일까요?

사사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징계-회개-구원’이라는 네 단계의 과정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기본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가진 이 이야기들의 첫 번째 이야기가 바로 옷니엘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7)

옷니엘 시대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서 지켜보는 앞에서 악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아내가 남편이 보는 앞에서 내연남을 집으로 데려와 불륜을 저지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얼마나 뻔뻔한 짓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일이 바로 그런 악한 일입니다. 그들은 언약을 맺은 남편인 하나님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대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끌어들여 하나님이 지켜보는 앞에서 질펀한 우상숭배 의식을 버젓이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바람난 백성들을 어떻게 하십니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겼더니”(8)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십니다.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서 팔 년 동안 고통을 받게 하십니다. 여기서 구산 리사다임이란 ‘두 배나 더 악한 구산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이 본명은 아닐 것입니다. “내 살다 살다 저렇게 악독한 놈은 처음 보네. 웬만한 악당보다 두 배는 더 악한 놈일세.” 구산 왕의 혹독한 학정에 시달린 백성들이 치를 떨면서 이렇게 붙여준 별명이 틀림 없습니다. 이스라엘 청년들은 강제 징용으로, 여자들은 종군 위안부로 끌려가고, 농부들이 피땀 흘려 지은 농사를 모조리 수탈을 당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더니 기껏 돌아온 결과는 이방 왕을 섬기는 노예 생활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9a)

사사기 사이클의 세 번째 단계는 부르짖음입니다. 8년 간 압제를 받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이 부르짖음은 역전을 알리는 전주곡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고 계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외침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9b)

하나님께서 드디어 한 구원자를 일으키십니다. 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첫 위기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인물은 사사 옷니엘입니다. 1장에서 드빌의 거민을 치는 용기를 보여 갈렙의 딸 악사를 상으로 얻은 바로 그 옷니엘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가 용기 있는 사람이고 싸움을 잘 했기 때문에 구원 역사를 이룰 수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10)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기 때문에 옷니엘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 싸울 수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옷니엘을 메소보다미아 왕이 아무리 배나 악독하더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혹독한 이방 왕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물리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만으로 끝나는 일은 아닙니다. 애초에 물리적 억압을 초래했던 근본원인인 우상숭배라는 영적인 억압으로부터 해방이 뒤따라와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마침내 엔 샬롬의 시대를 끝내고 샬롬의 새 시대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11)

이스라엘은 그제서야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과 아세라 섬겼던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이었는가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사 옷니엘의 지도 아래 그들은 우상의 신전을 허물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백성으로 부흥과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40년 간 지속된 안식은 그들에게 꿈 같은 행복이었을 것입니다.

옷니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역시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물질과 쾌락이라는 이 시대의 우상을 쫓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자유를 상실하고 두 배나 악한 자를 만나 그의 압제 하에서 종노롯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시대의 자화상임을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2015년 전국에서 만 명의 청소년에서 설문한 결과 10억이 생긴다면 1년 동안 감옥에 가도 괜찮다고 응답한 고등학생이 56%나 되었습니다. 중학생은 39%였습니다. 청소년이 이 정도이니 어른들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한때 영혼까지 끌어 모아 부동산에 올인했던 청년들이 갑자기 치솟은 이자율을 짓눌려 신음하고 있다는 뉴스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점점 멀리하고 세상 것이 진정 행복해 줄 것이라 믿고 마음을 쏟고 수고하지만, 그 결과는 배나 악한 세상으로부터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이때문에 정신적으로 쇠약해진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평안과 행복은 고사하고 악한 영의 세력에 이리 저리 이끌려 다니며 됩니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것은 부르짖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하나님! 구원해 주십시오.”

이럴 때 우리의 구원은 어디에서부터 옵니까? 오직 하나님이 택하시고 세우신 구원자로부터 옵니다. 이 구원자의 특징은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자는 성령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과 회복을 이룹니다. 사사 옷니엘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옷니엘은 흠 잡을 데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의 신앙 면에서나 인격이나 리더십 면에서나 딱히 결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옷니엘은 명백한 한계를 지닌 사사였습니다. 옷니엘의 이야기는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다’는 말로 끝이 납니다. 평화가 아니라 죽음으로 끝맺음을 합니다. 옷니엘이 죽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평화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구원을 얻고 영원한 평화를 누리려면 누가 필요합니까? 죽음을 이긴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옷니엘보다 더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게 거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실 수 있습니다. 또한 옷니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한 인격과 성품을 가지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모범적인 사사 옷니엘의 완성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옷니엘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옷니엘은 죽었지만,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토록 살아계신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나는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노라”(계1:18) 우리에게 영원한 평화를 가져오시는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고단한 인생길 가운데 우리의 눈을 들어 죽음까지 이기신 완전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12a)

옷니엘의 죽음과 함께 사사기의 사이클이 다시 시작됩니다. 이 구절이 7절과 다른 점은 딱 한 부분이 무엇일까요? 바로 ‘또’ 입니다. ‘그렇게 고생을 해 놓고 또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다니!’ ‘또’라는 이 한 음절의 단어가 우리를 매우 안타깝게 합니다. 어쩌면 인간의 최대 비극은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데 있는 것일 아닐까요?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징계의 도구로 삼으십니다. 에글론을 강성하게 만들어 암몬과 아말렉과 더불어 이스라엘을 대적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에글론과 전투에서 패배하여 가나안 정복의 상징과도 같은 종려나무 성읍(여리고)을 잃고 맙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옷니엘 때 구산 리사다임을 섬겼던 8년의 두 배가 넘는 18년의 긴 기간 동안 모압 왕 에글론을 섬기게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15a)

이스라엘이 고통 가운데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세우십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위기 때 명문 가문 출신의 탁월한 용사요 믿음의 사람인 옷니엘을 택하여 세우셨던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인물을 구원자로 세우실까요? 그런데 이번에 하나님께서 선택한 인물은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인 왼손잡이 에훗입니다.

오늘날에는 왼손잡이를 장애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포츠에서는 왼손잡이가 더 귀한 대우를 받습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왼손잡이는 이상한 사람, 문제 있는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에훗이 속한 지파인 베냐민은 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오른손의 아들들 가운데 왼손잡이였으니 얼마나 구박을 받았을까요? 에훗이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치는 일을 자발적으로 맡게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서로 하기 싫어 하는 일이이라 밀리고 밀려 결국 만만한 에훗에게 반강제적으로 떠맡겨진 것이 틀림 없습니다. 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기에 에훗은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학폭을 겪었던 문동은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이래저래 그는 어딜 가나 천덕꾸러기 신세를 벗어날 수 없는 고독한 왼손잡이였습니다. 하나님은 하필이면 왜 이런 에훗을 사사로 택하셨을까요? 이어지는 에훗의 모습 속에서 답이 나옵니다.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치러 가기 전 먼저 에훗은 40 센티미터 가량의 칼을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숨깁니다. 왜 하필 오른쪽 허벅지인가 하면 그가 왼손잡이이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에글론 왕의 경호원들에게 칼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오른손잡이가 대부분이었기에 경호원들이 습관적으로 왼쪽 허벅지만 집중적으로 수색했던 것입니다.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친 에훗은 다른 일행은 돌려 보내고 혼자서 다시 에글론에게 돌아옵니다. 그리고 왕에게 은밀한 일을 아뢰려 한다고 말합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신하들을 다 나가도록 합니다. 집무실이 아니라 본문에 서늘한 다락방으로 표현된 개인 공간으로 에훗을 데리고 들어갑니다. 에훗은 왜 이렇게 경계심이 없는 것입니까? 왕 치고는 너무 조심성이 없는 것 아닐까요?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에훗을 이미 여러 번 보고 친해진 사이라 딱히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왕 역시 왼손잡이 에훗을 얕잡아 보았기 때문에 더 그러했을 것입니다. 또 에훗이 가져온 선물 보따리가 무엇인지 너무 궁금해서 그저 빨리 풀어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급했습니다. 원체 탐욕에 눈이 먼 사람이다 보니 위험 요소를 간과하고 만 것입니다.

이처럼 에훗은 왼손잡이인 데다가 남들이 다 하기 싫어하는 공물을 바치는 일을 했기에 도리어 왕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쉽게 잡을 수 있었습니다. 에훗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준비한 칼로 왕을 찔렀습니다. 얼마나 세게 찔렀는지 칼이 비둔한 왕의 몸을 관통했습니다. 에훗은 다락문들을 잠그고 유유히 현관문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이를 본 에글론의 부하들이 다시 왕이 있는 다락방으로 왔다가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에 신하들은 ‘왕이 분명히 다락방에서 발을 가리우신다.’라고 말하고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발을 가린다는 말은 대변을 본다는 말의 완곡한 어법입니다. 신하들이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단순히 문이 잠겨 있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칼에 찔린 에글론의 몸에서 대변이 나왔고 그 냄새가 났기 때문입니다. 에글론 부하들의 오해와 착각 덕분에 에훗은 안전한 지역으로 도망칠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후 에훗은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압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일으키신 거룩한 전쟁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는 나팔 소리였습니다. 그러자 무리들이 에훗을 따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왼손잡이라고 무시하던 에훗이 단번에 에글론을 죽인 것을 보고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에훗이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요단 나루터를 장악하고 모압 사람 일 만 명을 죽였습니다. 이로서 지난 18년 간 이스라엘을 박해하던 모압 세력을 일시에 섬멸되고 말았습니다. 덕분에 이스라엘에 무려 팔십 년 동안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에훗 이야기를 시작할 때 했던 처음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왼손잡이 에훗을 사사로 택하셨을까요? 하나님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약점과 핸디캡을 얼마든지 강점과 장점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보여주시기 위해 택하신 사사가 바로 에훗입니다. 그는 왼손잡이라서 슬픈 인생을 살았습니다. 낮은 자존감에 시달려 고개를 들 수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가 왼손잡이라는 점을 이용하셔서 에글론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잡게 하셨고 완벽한 성공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 일은 왼손 쓰는 에훗이 아니었다면 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에훗은 오른손을 쓰지 못하는 약점이 있었지만, 결국 하나님이 그의 오른손이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사 에훗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할리우드 영화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일반적이고 당연한 방법으로만 역사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예상치 못한 사람과 예측하지 못한 수단을 통해서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비주류 인물로부터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이 강함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서, 세상이 승리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서, 세상이 지혜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세상이 연약함, 패배, 우매함이라는 부르는 것을 통해서 나올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 역시 에훗처럼 핸디캡이 많은 분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마구간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또한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같은 동네 사람들로부터 많은 무시를 당하셨습니다. 심지어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절벽에서 밀어 죽이려는 시도까지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나사렛 출신이라는 이유로 평가절하된 때가 많았습니다. 오죽하면 때 묻지 않은 청년 나다나엘의 입에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이 외에도 ‘정규 랍비 코스를 밟지 않았다. 가방 끈이 짧다’는 무시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외모는 어떻습니까? 이사야서 53장은 그는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꽃미남 스타일은 아니고 풍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예수님은 왜 하나같이 잘 생겼는지 고증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이런 예수님이 온 인류의 구세주요 만왕의 왕이 되실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예상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실상 전혀 구원자처럼 보이지 않으셨던 그분이 바로 우리의 구원자이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자라고 세상이 믿을 수 없었던 그분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는데 혈혈단신으로 맞서 마귀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사탄 마귀에 사로 잡혀 있던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에훗과 달리 속임수를 쓰거나 잔인한 방법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항상 정정당당하셨고,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한 없는 인내와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사사들의 한계를 극복하신 모든 면에서 흠이 없는 완전한 구원자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어떤 면에서 보면 에훗처럼 또는 예수님처럼 핸디캡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막상 속을 들여다 보면 핸디캡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저도 한때 피부가 까무잡잡하다는 핸디캡 때문에 인생이 괴롭고 힘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속으로 나를 이상하게 보고 조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대인기피증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나에게 이런 피부를 물려 준 어머니를 원망하고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이 교회에 와서도 메시지 중에 종종 ‘시커먼 얼굴로 돌아다닌다’는 말이 나와서 마음이 무척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믿고 영접하면서 달라졌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멜라닌 색소가 조금 더 많거나 적은 것이 예수님 안에서 누리고 있는 나의 행복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심지어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대한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4학년 여름수양회 때 메신저로 앞에 서서 이렇게 당당히 자기 소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안암골의 흑진주입니다. 흑진주가 백진주보다 더 귀하고 값 비싸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약점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약점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지도 않습니다. 약점 때문에 실패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 약점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시고 능력을 나타내 주십니다. 그 약점 때문에 도리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약점과 핸디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에훗 같은 한 사람은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보석 같은 존재입니다. 이 원리를 깨달았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후12:9)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합니다. 내가 남들과 비교해서 더 잘 난 사람인지 더 못난 사람인지 계속 생각합니다. 이런 현상이 SNS가 보편화된 이후 더 심해졌습니다. 인스타그램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의 사진을 보면서 우울감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다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을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범생 옷니엘이든 왼손잡이 에훗이든 하나님의 도구가 되면 하나님이 그를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하고 남들과 비교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느라 우리게 주어진 귀한 인생을 낭비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 인생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도우심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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