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사기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창무 2023. 3. 5.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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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사기 제 1 강 / 이창무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말씀 / 사사기 1:1-2:5
요절 / 사사기 2:2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1986년 1월 28일 일곱 명의 승무원을 태운 미국의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 후 2분도 채 지나지 않아 공중에 폭발하는 대참사가 있었습니다. 폭발 후 기체가 둘로 나누어 떨어지던 장면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추후에 사고 당일 추운 날씨로 얼어붙게 된 고무링 하나가 폭발 원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충격적인 사실은 기술자들이 이런 가능성을 미리 감지하고 발사 당일 12분전까지도 발사 연기를 요청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NASA의 고위 관계자들은 별 것 아니라며 무시했다고 합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부분으로 가면 이스라엘 공동체가 챌린저호처럼 폭발하여 거의 붕괴되는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는 그런 결과가 초래한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얼어 붙은 고무링처럼 자칫 간과하기 쉬운 작은 것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1:1)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가나안에는 아직 정복해야 할 땅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에 백성들은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이제는 누가 여호수아 대신 우리들을 앞서 가며 본을 보여주어야 할까요?” 하나님은 답을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2)

하나님은 열 두 지파 중에 실질적인 장남 역할을 해 온 유다 지파를 지명하시고 그들에게 승리를 약속하십니다. 내가 승리를 보장할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올라가 싸우라 하십니다. 유다는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여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유다는 어떻게 합니까?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3)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족속과 싸우기 위해 올라갑니다. 단, 형제 시므온과 함께 가고자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보십니까? 형제가 힘을 합쳐서 함께 싸우러 나가는 것은 좋은 일 아닐까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유다가 올라가라 하셨지 유다와 시므온이 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다가 온전히 하나님의 힘만 의지하여 승리하길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하나님이 승리 주실 것을 충분히 신뢰하지 못하고, 시므온의 힘을 빌리려 했습니다. 이렇게 믿음과 순종의 본을 보여야 할 유다가 첫 단계부터 흠집이 나기 시작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유다에게 어떤 결과를 주셨나요?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시니 그들이 베섹에서 만 명을 죽이고”(4)

비록 유다에게 흠집이 나긴 하지만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유다에게 큰 승리를 주십니다. 승리한 유다는 그곳의 왕인 아도니 베섹을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라 그가 행한 악을 그대로 갚아줍니다. 결국 아도니 베섹은 예루살렘까지 끌려와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유다가 과거 칠십인의 왕들을 죽인 적이 있는 강력한 왕인 아도니 베섹을 이기고, 그의 악행을 심판한 것은 칭찬할 일입니다. 용감하게 잘 싸웠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왜 왕을 포로로 잡아서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랐을까요? 하나님이 그것을 명령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유다는 지금 가나안 족속이 하는 일을 따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새 가나안 사람들을 흉내 내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래도 되나 싶은 불길한 느낌이 듭니다.

계속 유다가 예루살렘과 헤브론까지 정복하는 와중에 사사기 저자는 유다 지파 중 한 가문에 초점을 맞춥니다. 바로 갈렙의 가문입니다. 노년의 갈렙은 거세게 저항하고 있는 기럇 세벨을 쳐서 점령하는 자에게 자기 딸을 아내로 주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이에 갈렙의 조카인 옷니엘이 용감하게 나섭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기럇세벨을 치고 약속대로 갈렙의 딸 악사를 아내로 얻습니다. 왜 옷니엘이 나섰을까요? 악사를 무척 사모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물론 그런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청년 옷니엘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반드시 차지하고야 말겠다는 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용장 갈렙의 사위이 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인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악사 역시 자신이 갈렙의 딸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악사는 새 신랑 옷니엘에게 밭을 갈렙에게 구하라고 하고, 악사 자신도 갈렙에게 ‘샘물도 내게 주소서’라고 요청합니다. 역시 딸은 친정 아버지를 탈탈 털어가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인 갈렙은 불쾌하기는 커녕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밭과 윗샘과 아랫샘을 다 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악사가 약속의 땅을 얻고 거기에 정착하고 그 축복을 누리려는 갈망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갈렙, 옷니엘, 그리고 악사 이 세 사람은 전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구하는 사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너희는 왜 이 사람들처럼 온전한 순종을 하지 않느냐?’며 나머지 백성들을 은근히 꾸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어서 유다는 호르마, 가사, 아스글론, 에그론 등의 주요 거점 도시들을 차례차례 점령해 갑니다. 계속 승승장구합니다. 100% 온전한 순종이 아니라도 아직까지는 괜찮아 보입니다. 별 문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결국 한계를 드러내고 맙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19)

유다는 철 병거로 무장한 골짜기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정복할 수 있는데, 거기에서 멈춥니다. 더 싸울 수 있는데, 더 할 수 있는데, 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는데 더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철 병거와 맞서 싸우려면 수고스러우니까 힘이 드니까 주저앉습니다. 그냥 수준을 낮추고 안주합니다. 안타깝게도 유다의 마지막은 불순종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렇게 핑계를 댈 지 모릅니다. “저 사람들에게는 철 병거가 있잖아요!” 하나님은 뭐라고 하실까요? “저들에게는 철 병거가 있지만, 너희에게 내가 있지 않느냐?”

이렇게 유다는 온전한 순종에서 실패합니다. 그리고 유다의 실패는 전염병처럼 다른 지파들에게 퍼져 갑니다. 이어지는 말씀에는 지파들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는데 계속 반복되는 것이 있습니다.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결같이 가나안 족속을 전부 다 몰아내지 못하고 일부를 남겨 둡니다. 북쪽으로 갈수록 상황이 더 악화됩니다. 아셀, 납달리, 단 지파는 쫓아내지 못한 정도를 넘어서서 가나안 족속 사이에 끼어 들어가 살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완전 정복에 실패합니다. 지도를 보면 해안과 평지를 중심으로 약속의 땅에서 약 30% 정도를 정복하지 못하고 남겨 두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요? 남겨 둔 가나안 족속들이 군사력 면에서 이스라엘을 압도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거세 저항이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 싸우면 못 이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첫째로, 백성들이 철저하게 순종하려고 결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27)
“아모리 족속이 …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주하였더니”(35)

가나안 족속과 아모리 족속은 아무리 힘들어도 자기의 것을 지키려고 굳은 결심을 한 반면에 이스라엘은 결심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힘들겠다 생각이 들면 거기서 그냥 멈추었습니다. 끝까지 순종하려는 의지가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철저한 순종을 위해 고달픈 투쟁의 과정을 감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강력하게 저항하는 이민족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 편이 훨씬 더 지혜롭고 현명한 선택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둘째로, 백성들은 순종하기 위해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백 번 양보해서 정복 전쟁 초기에는 힘이 달려서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힘이 생긴 후에는 쫓아냈을까요?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28)

그렇지 않습니다. 강성한 후에도 다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쫓아내는 것보다 노예로 부리는 것이 훨씬 더 자신에게 유익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편하게 살기 위해 조금만 남겨 놓는 것인데 이 정도는 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드러난 것만 놓고 보면 결과가 꽤 훌륭합니다. 30% 정도가 남았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이스라엘이 약 70% 정도를 점령했다는 말입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역대 최고의 승률로 우승한 팀이 누구일까요? 1985년 삼성 라이온즈가 승률 70.6%로 우승한 것이 역대 최고의 기록입니다. 대부분 우승팀의 승률은 60% 초반 언저리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70%를 점령했다면 대단한 승리 아니겠습니까? 어찌되었든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의 넓은 지역에 정착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두 세대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할 때 그 누가 손자 손녀의 삶이 이럴 것이라고 꿈이나 꿀 수 있었겠습니까? 이 정도면 대만족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몇가지 실수와 흠결이 있지만 상식 선에서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큰 틀에서 어긋나지만 않으면 순종도 ‘유도리’ 있게 하는 게 지혜로운 것이다’라고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평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가하시는가’ 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2:1a)

하나님의 평가서를 전달하기 위해 여호와의 사자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천사가 온 경로가 의미심장합니다. 왜 천사는 길갈에서부터 올라왔을까요? 여호수아서 5장에 보면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격적인 정복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할례를 행했던 곳입니다. 할례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겠다는 것을 선포하는 의식입니다. 길갈에서 행한 할례 의식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 전쟁의 목적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 하나님께 순종하는 백성을 빚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전쟁이 여느 전쟁처럼 약탈하거나 노예를 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그때 하셨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연거푸 승리를 거두고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2)

하나님은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어떻게 불순종했습니까? 이스라엘은 언약을 맺지 말라는 말씀을 듣고도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제단을 허는 일에도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70%만 순종하고 30%는 불순종했습니다. 아직 완전히 불순종한 것은 아니라고 변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부분적 순종은 불순종이나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70% 순종이 50% 순종이 되고, 다시 30% 순종으로 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타협한 사람이 두 번 세 번 타협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처음 30% 불순종의 결과가 얼어붙은 챌린저 호의 고무링처럼 잠복해 있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의 백성의 영적인 삶에서 폭발해 모든 것을 파괴하게 될 지 모릅니다.

앞선 1장 19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쫓아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도저히 순종할 수 없었던 이유들을 제시했습니다. “철 병거로 무장한 적들을 쫓아내려면 너무 힘들어서 순종 못해요” “결심하고 끝까지 저항하는 자들을 쫓아내려면 우리 쪽 출혈도 너무 크기 때문에 순종 못해요” “쫓아내지 말고 노예로 부리면 개이득인데 너무 아까워서 순종 못해요” 하나 같이 나름 타당해 보이는 근거들입니다. 하지만 2장 2절에서는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두 다 어쭙잖은 변명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되지도 않을 일을 억지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만유의 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도저히 순종을 못하겠어요’ 라고 말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나름 이유는 있습니다. ‘그것까지 순종하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아요’ ‘다른 것은 다 순종해도 이것까지 순종하는 것은 너무 힘들어요’ ‘이것까지 순종하면 제가 너무 손해해요’ ‘아예 순종 안 하는 사람도 많은데 이 정도 했으면 할 만큼 한 것 아닌가요?’ ‘너무 철저하게 순종하면 주위에서 이상하게 봐요. 왕따 된다니까요!’ 우리는 순종할 수 없는 이유도 수십 가지도 더 댈 수 있지만 과연 순종 못 하는 것일까요? 안 하는 것일까요? 솔직히 안 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데 안 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냥 타협하고 편한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냥 상식대로 행동하고 그냥 두려워서 쉽게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그냥 대충 넘어가고 그냥 대충 세상의 흐름에 크게 거슬려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힘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일에 실패할 이스라엘은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됩니까?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3)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남겨 놓은 가나안 족속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원문의 뉘앙스를 더 정확히 표현하면 너희 등에 가시가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작은 가시라도 일단 몸에 박히면 괴로워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하필 그 가시가 등에 박히면 내 손으로 뽑을 수가 없으니 얼마나 더 답답하겠습니까? 이처럼 남은 이방 민족이 두고 두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존재가 됩니다.

또 하나님은 그들의 신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올무란 사냥꾼이 짐승을 잡기 위해 놓은 덫입니다. 빠져 나가려고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더 조여온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 올무에 걸리면 스스로의 힘으로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그들의 신이란 구체적으로 농경의 신인 바알과 다산의 신인 아스다롯을 가리킵니다. 각각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를 대표하는 신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을 숭배하면 ‘돈과 쾌락을 주겠다 그래서 너를 최고로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함정이고 속임수입니다. 우상은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 버립니다. 돈이 없으면 못 살 것 같고 쾌락이 없으면 못 살 것 같아서 우상에게 질질 끌려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아무리 벗어나고 싶어도 자기 힘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족속들을 다 내어쫓으라고 하셨겠습니까? 인종 청소를 하거나 제국주의 전쟁을 벌이려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요단 강 서편 지역 정복을 앞두고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안식하게 하신 것 같이 너희의 형제도 안식하며 그들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그 땅을 차지하기까지 하라”(수1:1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내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땅을 다 차지하라 명령하신 이유는 그들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도 남김 없이 다 몰아내지 않으면 그 남은 것들 때문에 이스라엘이 안식을 잃어버릴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 끊임 없이 괴로움을 겪고 그 땅에서 평안을 잃게 되었습니다. 잠깐 동안의 평안을 얻으려고 불순종한 결과 영구적인 평안을 잃어 버리다니! 참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는 지난 일년 동안 누가복음을 공부했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흔히들 누가복음의 제자도를 ‘청지기도’라고 부릅니다. 청지기도란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나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알고 이를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주인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에서 모든 이방 민족들과 우상들을 몰아내도록 하신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인 되길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마음 속에서 우상의 전을 깡그리 헐고 불태워 버려야 합니다. 물질주의, 쾌락주의가 발 붙일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중심성에 비롯된 죄와 싸우되 히브리서 저자의 권면처럼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죄의 잔재가 남지 않도록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서 우리 내면에 참된 안식과 평안이 임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은 자에게 임하는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이 상태가 성경이 말하는 ‘샬롬’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물질주의, 쾌락주의 우상에게 마음 한쪽 구석을 내어 주면 어떻게 됩니까? 죄와 싸우되 대충 싸우고 포기하면 어떻게 됩니까? 처음에는 눈에 띄는 변화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두고 두고 우리에게 등에 박힌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될 것입니다. 서서히 영적인 감각을 둔하게 하고 눈을 흐리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 내면에서 안식과 평안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 이대로 살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으로 우리를 내몰고 갈 것입니다. 마침내 너무 괴로운 나머지 머리를 쥐어 뜯으며 영혼의 절규를 외치게 만들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샬롬이 깨어진 상태를 ‘엔샬롬’이라고 부릅니다. 사사기의 남은 부분이 엔샬롬을 향해 점점 더 빠져들어 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구약학자는 사사기에 ‘엔샬롬 교향곡’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샬롬을 향해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엔샬롬을 향해 가시겠습니까? 우리 앞에 두 개의 갈래길이 있습니다. 당연히 샬롬을 향해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엔샬롬을 향하는 길로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사사기가 경고해 주고 있는데도 버젓이 그 길을 가려는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샬롬으로 향하는 길은 온전한 순종의 길입니다. 절반의 제자도로는 안 됩니다. 70% 순종으로도 안 됩니다. 혹시 우리 마음에 아직 남아 있는 30% 불순종의 영역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잠복하고 있다가 언제든지 폭발할 지 모르는 우상 숭배의 요소를 우리 마음 속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안식과 복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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