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사기

보리떡과 칼

이창무 2015. 12. 2.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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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떡과 칼


말씀 : 사사기 7:13-14

“기드온이 그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 그의 친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더라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시면 성경은 기드온에 대해 두 개의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떡입니다. “기드온이 그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 그리고 또 하나의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칼입니다. “그의 친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더라” 한 사람을 표현하고 상징하는 말이 두 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말들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떡은 물렁하지만 칼은 쨍쨍합니다. 떡은 뭉툭하지만 칼은 날카롭습니다. 우리가 보통 떡이라고 하면 실패를 상징합니다. 보리떡은 더욱 그러합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보리떡은 우리들의 개떡과 같습니다. 흔히 ‘오늘 기분 개떡 같네.’ ‘오늘 날씨가 개떡 같네’ 이런 식으로 쓰입니다. 그러나 칼은 다릅니다. 칼은 예리함을 의미합니다. 칼은 떡을 자르는 매서움, 단호한 결심을 의미합니다. 칼 같은 성격, 칼날 같은 기상, 날선 진리 이런 식으로 쓰입니다. 이 두 말이 하나의 대상을 지시할 수 없습니다. 도저히 한 사람에 대해서 같이 쓸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을 향해 “너는 떡이다. 그런데 동시에 너는 칼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드온은 정말 떡과 같은 사람입니다. 기드온을 보면 빨리 빨리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느립니다. 이것이 다른 사사들과의 차이점입니다. 옷니엘이나 에훗 같은 사사는 하나님이 부르시면 바로 바로 즉각 반응을 했습니다. 바락과 같은 사사도 조금 망설이기는 있지만 딱 한 절만 망설이고 곧바로 나섰습니다. 하나님께서 6장에서 기드온을 ‘큰 용사여’하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6 장이 다 지나가도록 기드온은 도무지 나서질 않습니다. 7장에서도 계속 머뭇머뭇합니다. 게다가 기드온은 얼마나 말이 많은지 모릅니다. 양털 가지고 이랬다저랬다 합니다. 개떡 같은 인생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드온과 함께 있는 병사들을 보십시오. 겨우 삼백 명입니다. 그들도 역시 보리떡, 개떡 같습니다.


사사기를 연극의 무대 조명에 비유한다면 사사기는 한 장  한 장 더 진행할수록 조명이 어두워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과 점점 더 비슷해져 갑니다. 사사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의 대표자 역할이기도 합니다. 너무 느린 기드온, 너무 고집 센 기드온, 너무 생각이 복잡하고 핑계가 많은 기드온! 이것은 세상과 비슷해져 가던 당시 하나님 백성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왜 기드온은 이렇게 느릴까요? 왜 이렇게 못나고 변명이 많을까요? 그것은 기드온 속에 곧 하나님 백성 속에 걷어 내야 하는 장애물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입니다. 세대가 흐를수록 세상과 점점 비슷해져 갔기 때문에 점점 더 고집스럽고 강퍅해졌습니다. 장애물들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 들어오기가 점점 더 오래 걸릴수록 세상에 깊숙이 물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은혜는 한 번만으로 안 됩니다. 말씀 공부 한 번으로 안 됩니다. 여름수양회 한 번으로 변화되질 않습니다. 몸이 아프거나 진로가 막히거나 실연을 당해 봐야 겨우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려고 합니다. 이것은 그만큼 우리가 세상과 비슷해져 있다는 반증입니다. 이것이 기드온의 모습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현주소였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에게는 더 많은 단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 사람 기드온이 드디어 여호와의 전쟁에 나섭니다. 기드온이 어떻게 전쟁에 나설 수 있게 되었을까요? 바로 떡과 칼에 관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 속에 있던 마지막 장벽을 무너뜨려 주십니다.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기적으로도 일으켜 세울 수 없었던 이 보리떡 인생을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십니다. 무엇으로 일으켜 세우셨습니까? 그것은 기드온 자신에게 나온 신앙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한 가운데서 미디안 군사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떡과 칼의 이야기입니다. 둥근 떡이 굴러오는데 그것이 칼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기드온은 자기 이야기인줄 알았습니다. 미디안 병사들이 보리떡을 이야기하자 바로 자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보리떡이 칼로 변신하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 .......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보리떡! 저건 나 기드온인데 그런데 어떻게 칼날로 바뀌어 버리네.” 떡인데 칼이 되는 것입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두 물건, 떡이 칼로 변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이 고집 센 사람이 드디어 일어나서 여호와의 전쟁을 수행합니다.


이어서 기드온과 삼백 군사가 싸우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들이 들고 싸우는 무기를 보십시오. 칼과 창과 총이 아닙니다.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입니다.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이르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 전쟁에 나섰다면 당연히 들어야 하는 무기가 무엇입니까? 당연히 칼입니다. 그런데 칼은 한 자루도 없고 나팔이나 불고 항아리나 부수고 있습니다. 축구 경기 응원하러 왔습니까?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칼 한 자루 없는데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라고 외칩니다. 보리떡 같은 무기, 개떡 같은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뭐라고 외치는데 칼이라고 외칩니다. 칼로 변한 보리떡이 이렇게 믿음으로 일어서니까 미디안 군사들이 서로 칼로 치면서 떡처럼 망가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의 전쟁에 나서기 위해서는 용감하게 무너뜨려야 하는 장벽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나안 즉 세상과 비슷해져 있을수록 그 장벽들은 더 많아질 것이며 더 강력할 것입니다. 그 장벽들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자아의 장벽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도다.’라고 말씀하셔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볼 때 큰 용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복된 실패, 낙심, 자기 연민, 피해 의식에 빠져 있어서 ‘큰 용사는 난 모르겠다.’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자아의 장벽을 먼저 무너뜨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해 부끄럽고 소심한 순종이라도 쓰십니다. 밤에 우상을 부수는 그 부끄러운 순종이라도 억지로 하게 하심으로 기드온의 자아의 장벽을 부수셨습니다. 두 번째 장벽은 불신의 장벽입니다. 불신의 장벽이란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잘 믿겨지질 않고 경험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봐도 그렇고 세상을 보아도 그렇고 도무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처럼 보이질 않습니다. 기드온은 이 장벽이 거대해서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전쟁터로 바로 나가지 못합니다. ‘양털 뭉치에만 이슬이 젖게 해 달라.’ ‘양털 빼고 다 젖게 해 달라’ 이런 요구를 하나님께 했습니다. 하나님을 내 손으로 만져 보지 않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을 것 같아 그렇게 했습니다. “당신을 믿게 해 주십니다. 당신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또 하나님께 실망할까봐 제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는 이 장벽을 무너뜨려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드온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두 번째 장벽을 무너뜨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마지막 한 가지 장벽이 더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떡과 칼의 장벽입니다. 자아와 불신의 장벽이 무너져 전쟁터에 왔는데 기드온은 내려가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전쟁터 같은 세상 한 가운데 와보니까 미디안 군사들의 강력한 군사들의 모습이 다 보이는 곳에 와 보이니까 나는 보리떡입니다. 세상은 칼날입니다. 목자 학교를 졸업할 때만 해도 얼마든지 세상에 승리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세상에 나가보니 내 속에 있는 두려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보리떡이고 세상은 날카로운 칼날이었습니다. 이 장벽이 무너져야 합니다. 이 장벽이 우리 영혼 속에서 와르르 무너져야 주님과 함께 믿음의 싸움을 싸울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에서는 믿음의 장수인 바울이 다음 세대에 믿음의 싸움을 수행할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은혜 속에서 강하고” 이 말은 너무나 이상한 말입니다. 과연 은혜 안에서 강할 수 있습니까? 강하기 위해서는 은혜 안에 있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강하기 위해서는 미디안처럼 힘을 길러야 하고 메뚜기 같은 중다한 수를 모아야 하고 칼과 창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은혜 안에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은혜는 무능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날마다 자신의 가난함을 고백하고 주님만이 나의 의가 되심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은혜인데 어떻게 은혜 안에서 강해질 수 있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권면합니다. “은혜 속에서 강하라.” 기드온 속에 있는 장벽을 끝까지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마지막 펀치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나는 보리떡입니다. 그런데 이 보리떡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고 살아갈 때 그때 보리떡이 칼날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다 핸디캡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다 약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허락하십니다. 신체적인 약점, 정서적인 약점, 성격적인 약점, 가정적인 약점일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 조건, 인간관계의 약점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정품이 아닙니다. 다 원 플러스 원입니다. 보리떡이고 개떡 같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이 보리떡이 믿음으로 살아갈 때 이 세상을 향해 돌진할 때 이 보리떡이 칼날이 됩니다. 보리떡과 칼날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목자의 사명을 감당하고 믿음으로 직장 생활하고 믿음으로 자녀를 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다 보리떡 인생입니다.. 겉으로 볼 때 화려하고 당당해 보이는 사람도 다 보리떡입니다. 다 마음에 아픔이 있고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보리떡은 보리떡의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보리떡은 미디안 군사처럼 살면 안 됩니다. 보리떡은 보리떡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보리떡은 이 세상 속에서 칼날이 됩니다. 이것이 기드온의 영혼에 결정적인 자유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나는 보리떡이다. 그런데 보리떡이 엉금엉금 굴러가면 여호와의 칼날이 된다.” 부족하고 콤플렉스 투성이에 느려터진 보리떡 같은 인생이 칼날 같은 인생이 됩니다. 반면에 칼날처럼 보였던 미디안이 보리떡, 개떡이 됩니다.


저는 기드온을 보면 남 같지가 않습니다. 꼭 제 자신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제가 88학번 마태 타이거입니다. 그런데 제 동기들은 다 옷니엘 같고 에훗 같은 믿음의 용사들이었습니다. 젊을 때 선교사로 세계 곳곳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느렸습니다. 느려도 너무 느렸습니다. 말이 많고 복잡하고 두려움도 많았습니다. 보리떡 개떡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저를 오래 참으셨습니다. 제 안에 있는 자아의 장벽, 불신의 장벽, 두려움의 장벽을 하나씩 하나씩 부수어 주셨습니다. 저에게 이 보리떡 개떡 같은 인생이 여호와의 칼날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지난 주 바이블 아카데미를 하고 나서 실망이 컸습니다. 양들이 별로 안 온 것은 둘째 치고 학생 리더들도 많이 빠졌습니다. 저는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이런 보리떡 개떡 같은 친구들이 있나?’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을 붙들게 도와주셨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 친구들 안에 있는 장벽을 부수고 계시다. 그리고 이들은 장차 여호와의 칼날이 될 것이다’


보리떡 정신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강해지는 것입니다. 미디안의 칼날 정신에 세뇌당하지 않고 보리떡 정신 곧 ‘나는 하나님의 복이 아니면 안 받는다’는 각오로 고집스럽게 감사와 소망을 품고 최선을 다해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바보 같아 보였는데 나중에 보니 속이 꽉 찬 인생이 됩니다. 겉으로 보면 허접해 보였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을 향한 경건이 있고 멋있는 헌신과 사랑이 있는 인생이 됩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충성과 헌신이 있는 인생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여호와의 칼날입니다. 우리 모두 멋진 보리떡의 인생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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