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 기도회
어찌 스스로 자랑하겠느냐
이사야 10:15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나무를 찍을 때 필요한 도구가 있으니 바로 도끼입니다. 하지만 도끼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날을 예리하게 벼린 도끼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누군가 도끼를 잡고 힘차게 내리쳐야 나무를 찍을 수 있습니다. 또 나무를 자를 때 톱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마찬가지 톱 역시 톱을 들고 켜는 사람이 있어야만 나무를 자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도끼가 자기를 들고 있는 주인에게 자랑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이 큰 나무를 찍어 넘어뜨렸어. 어때? 나 정말 대단하지 않아?” 만약 톱이 자기 주인에 대해 스스로 큰 체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이 강하고 정교한 톱날을 보라. 어떤 나무이든 다 자를 수 있는 나의 이 능력을 보라” 이런 모습을 보고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그거 참, 어이가 없네.”라는 말이 절로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도끼와 톱은 이사야 당시 앗수르를 지칭합니다. 나무는 북이스라엘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앗수르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들의 칼은 도끼처럼 묵직하고 날카로웠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칼을 맞고 나라가 두 동강이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공격은 톱처럼 집요하고 강력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조각조각 부서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앗수르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의 힘과 업적을 크게 자랑했습니다. 고고학 발굴에 의해 앗수르의 왕궁과 신전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곳 벽면에 부조가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혹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전투에서 패한 상대방 병사들을 쇠꼬챙이에 꽂아 둔 모습, 잘라낸 머리를 산더미처럼 쌓아 둔 모습, 사람의 가죽을 벗겨 성 위에 널어 놓은 모습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런 끔찍하고 야만적인 일들을 저질러 놓고 자랑이랍시고 조각해 놓은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에 취해서 어느새 살육과 파괴를 즐기는 괴물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당시에 그들이 얼마나 거만했을 지 상상이 갑니다.
이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어이가 없으셨을까? 사람에 비유하자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절로 나올 상황입니다. 앗수르는 도끼이며 톱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잡고 쓰시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들 스스로는 사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온 세상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잠시 필요에 의해서 사용하셨을 뿐인데 마치 자기가 모든 일을 다 한 것처럼 으스대는 것은 착각도 이만저만한 착각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15절 하반절에 보면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사람을 들려 함과 같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막대기와 몽둥이는 앗수르는 자기를 드는 사람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앗수르는 이제는 한술 더 떠서 자기 주인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을 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는 것입니다. 애교로 봐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앗수르를 심판하십니다. 실제로 앗수르는 바벨론에게 패관을 빼앗기고 몰락합니다. 심판의 도구가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마치 주인이라도 되는 양 착각에 빠지는 순간 나락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 앗수르는 누구일까요? 앗수르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자기를 보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조금만 잘한 일이 있으면 자기 자랑을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하나님이 마치 자기를 위하여 존재하시는 분인 것처럼 여깁니다. 하나님을 자신을 위한 도구로 삼고 자기가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자기 중심성이 바로 죄로 타락한 인간의 부패한 본성입니다. 바로 이 자기 중심성 때문에 사람은 심판과 파멸을 자초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무엇입니까? 이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전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자기 포기가 필요합니다. 모든 것의 중심에 내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깨끗이 내려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자기 부인이라고 표현하셨고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또는 자아의 죽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기 포기를 하지 않으면 기껏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고 나서 존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대상이 되는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납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달렸기 때문에 염려와 걱정에서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만 일이 잘못되면 불안해 하고 초조해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다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모든 일의 배후에서 일하는 하나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도끼요 톱에 불과하다는 것을 압니다. 주목할 대상은 내가 아니라 나를 붙들고 사용하고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압니다.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나를 사용하시도록 다 맡겨 드립니다. 큰 나무가 쓰러지는 큰 역사가 나를 통해 일어난다 하더라도 나는 그저 도끼와 톱일 뿐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해서 기특한 일을 한 것이 전혀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스스로 신자라고 하면서,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닙니다. 자칫 믿음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하나님을 자기의 욕망과 꿈을 이루는 도구로 삼기 쉽습니다. 이것은 앗수르가 갔던 길과 거의 다를 바 없습니다. 기복 신앙, 번영 복음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포기가 없으면 종교인은 될 수 있을지 언정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일용할 양식 말씀인 마가복음 8장 34절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던 베드로야말로 오늘 말씀에서 나온 대로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했던 막대기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도끼 주인도 아니고 톱질하는 목수도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도끼이고 톱일 뿐입니다.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나무가 어떤 모양을 나올 것인지는 오직 목수이신 주님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배후에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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