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이사야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

이창무 2022. 4. 23.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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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기도회 / 이창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느니라(이사야 8:6)

세계적으로 큰 강들은 있습니다. 어떤 강이 있을까요?

미국의 미시시피 강은 캐나다 국경에서부터 시작하여 미국 중부를 관통하여 멕시코 만으로 빠져나가는 강입니다. 전체 길이가 3742 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큰 강이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은 아닙니다. 1등은 나일강이고 두번째가 아마존 강이, 세번째가 미시시피 강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는 한강이 있습니다. 우리 곁에 있어서 잘 못 느낄 뿐이지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이런 큰 강이 흐르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큰 강들을 좋아합니다.

반면 교회 옆을 흐르는 정릉천 같은 작은 하천은 좀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너무 무시를 받는 것이 안타까우셨는지 예전에 양마가 선교사님이 프랑스 파리를 다녀오신 후에 정릉천을 세느강이라고 부르고 그 중간에 있는 다리를 레인보우 브릿지라고 부르자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보강수양회를 가리켜 세느강변 수양회라 했던 것도 기억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오늘 본문에도 강과 하천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느니라(이사야 8:6)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설명이 조금 필요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실로아의 물은 예루살렘 성 안에 흐르는 작은 시내입니다. 이스라엘에는 큰 강이 없습니다. 기혼 샘물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 성 동편을 끼고 흐르는 작고 가느다란 시내가 실로아의 물입니다. 이 물이 성을 천천히 돌아 흐르면서 전체에 물을 공급했습니다.

르신은 아람의 왕이고 르말리야의 아들은 북이스라엘의 왕을 가리킵니다. 당시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서로 연합하여 남 유다를 치려고 했습니다. 두 나라가 힘을 합치면 남 유다 따위는 쉽게 집어삼킬 수 있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에 맞서 남 유다 왕 아하스는 앗수르와 연합하여 이 세력에 대항하려고 했습니다. 이 앗수르를 끼고 흐르는 강이 그 유명한 유프라테스 강입니다. 이 강은 엄청난 수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기에도 참 멋이 있습니다. 실로아의 시내와 앗수르의 강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유다 백성들에게 앗수르의 군대는 그들의 강과 같았습니다. 저 강이 흐르면 아람과 이스라엘을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실로아의 물은 우습게 여기고 앗수르의 강을 더 좋아했습니다. 앗수르의 강 덕분에 폼나게 승리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이 착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앗수르의 강이 자신들에게 덮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기대대로 앗수르에 의해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앗수르까지 집어삼키고 더 큰 강이 된 바벨론에 의해 유다는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승리하기 위해 힘을 숭상하고 그 힘을 의지하다 보면 그 힘에 의해 자신이 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마치 실로아 물처럼 흐릅니다. 천천히 구비구비 돌아 흐르면서 우리 삶 구석구석에 은혜로 적시며 생명을 공급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박이 나지도 않고 대단한 승리를 거두지는 않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우리 심령에 성령으로 임재하시어 말씀을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렇게 서서히 변화되어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사람,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를 한 편의 소감이나 일용할 양식을 통해서, 매주 있는 말씀 공부, 예배, 기도회 등을 통해서 얻습니다. 이런 통로를 통해서 깜짝 놀랄만한 기적이나 능력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은 거의 없는 일입니다. 같은 예배라 해도 대형 교회의 웅장함이나 화려함, 명성이 뒤따르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늘 천천히 잔잔히 흐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실로아 물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젖줄이고 생명줄입니다.

반면에 세상을 보면 거대한 강물이 요동치며 격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코인 투자로 젊은 나이에 대박이 났다고 합니다. 직장의 동료는 주식 신공을 발휘해서 월급을 10년 모아도 만지기 어려운 돈을 이미 벌었다고 합니다. 누구는 부동산 투자를 해서 몇 년 사이에 집이 다섯 채, 여섯 채로 늘렸다고 합니다. 마치 앗수르를 흐르던 유프라테스의 큰 강물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성공담을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 말을 듣다 보면 나도 그 흐름에 편승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야 나도 뭔가 보여줄 것이 생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앗수르의 강을 사모하다 보면 나타나는 현상이 실로아의 물이 하찮게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내가 인생 승리는 하는 일에 있어서 무능력한 것으로 보입니다. 캠퍼스에 부흥의 강물이 흘러 넘칠 때는 목자로 사는 것도 대박날 기회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어 보입니다. 이럴 바에 차라리 앗수르의 강물에 편승하는 편이 더 지혜로운 선택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 유다가 자신들이 의지하려 하던 앗수르의 후예인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때 나를 띄워 주었던 큰 강물이 언젠가는 나를 덮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물질주의라는 거대한 강에 자신을 맡기면 내 인생이 그 물질에 휩쓸려 갈 수 있습니다. 성공과 승리에만 목을 매다 보면 나의 영적인 생명이 질식해 죽어가고 있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앗수르의 거대한 강을 보면서 교회 옆을 흐르는 정릉천을 초라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기죽지 맙시다. 앗수르의 강물은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치명적인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앗수르의 강과 같지 않습니다. 실로아 시내와 같이 천천히 돌면서 필요한 곳으로 다가갑니다. 잔잔한 일상 가운데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작은 일에 감사하고 오늘 배운 말씀에 듣고 순종하며 사는 삶, 화려하지 않아도 양들과 동역자들과 자녀들을 섬기며 사는 삶, 이런 소박한 삶이 은혜이며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통로들을 소중하게 여기며 의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수가 우리 심령에 계속해서 잔잔히 흐르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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