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라기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이창무 2021. 11. 28.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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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말라기 제 1 강 / 이창무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말씀 / 말라기 1:1-2:9
요절 / 말라기 1: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오늘부터 말라기 말씀을 시작합니다. 말라기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많은 분들이 십일조를 먼저 떠올립니다. 하지만 십일조는 일부분일 뿐이지 말라기 전체의 주제가 아닙니다. 또한 말라기를 말라가 쓴 책으로 알고 있는 분도 계신데 선지자의 이름이 말라기입니다. 저는 말라기 시대의 특징을 한 마디로 애매모호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애매모호함이란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정점도 아니고 바닥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를 말합니다. 아예 바닥이라면 경각심을 가지고 정신을 차릴 텐데,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무엇이 잘못되어가는 지도 잘 느끼지 못하기 쉽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의 모습도 이와 매우 흡사한 것 같습니다. 우리라고 해서 예외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말라기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진단하고 하나님의 백성 다운 모습으로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다(1:1-5)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1)”

말라기서는 하나님께서 주전 460년 경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주전 538년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습니다. 주전 516년에 제2성전이 완공되었고 제사가 다시 드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5~60년 정도가 흐른 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신 말씀이 말라기입니다. 그들에게 엘로우 카드로 주신 것입니다. 만약 이번 경고를 무시한다면 다음은 레드 카드입니다. 그들의 상태가 어떠하길래 엘로우 카드를 받았을까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2a)”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였노라고 고백하십니다. 이런 사랑 고백을 받으면 “감사합니다”라고 반응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질문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우리를 사랑한다는 그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며 반박한 것입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현실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돌아와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고 무너졌던 성전을 다시 세우고자 노력했습니다. 성전이 재건되기만 하면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강조했던 하나님의 영광이 이곳 가운데 다시 나타나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성전 재건 이후에도 위대한 왕국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넘치는 복으로 자신의 임재를 증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전히 이스라엘은 페르시아의 속국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지속적인 가뭄과 기근으로 계속고통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가난의 굴레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자 그들이 보기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현실에 무관심하신 분 같았습니다. 그들은 화난 얼굴로 대꾸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맞는다면 우리는 왜 여전히 이 모양 이 꼴인가요?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요? 고작 이것이 당신의 사랑이라면 우리는 그런 사랑 다 필요 없어요.” 하나님은 사랑한다 하시지만 왜 그들은 그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에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확실한 증거를 두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조건 없이 택하신 자를 조건 없이 사랑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2b)”

이스라엘은 아시다시피 야곱의 후손입니다. 에서와 야곱을 비교해 볼 때 야곱이 그 형 에서보다 더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닙니다. 제 눈에는 둘 다 비호감입니다. 그래도 굳이 한 사람을 택하라면 형인 에서를 택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이 태중에 있었을 때, 그들이 선악을 분별하기도 전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조건을 따지지 않고 에서가 아닌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 역시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고 계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정말 이스라엘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에서 제외시키셨을 것입니다. 더 이상 언약 가운데 두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수많은 허물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백성 삼으시고 그들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가장 확실한 증거 아닙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내가 잘 되는 것에서 찾으려 합니다. 내가 부유해지고 성공하는 것, 내가 승진하고 인정받고 출세하는 일에서 찾고자 합니다. 내가 안 되면 내 자녀라도 잘 되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증거로 여깁니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한 부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에서 사랑의 증거를 찾으려 하면 실망하게 되는 때가 옵니다. 우리의 현실은 팍팍하고 어렵습니다. 직장 생활, 가정 생활 모두 다 고됩니다. 딱히 달라질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을 보니 나보다 더 잘 나가는 것 같습니다. “열심히 하면 복 받을 줄 알았는데 왜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살게 그냥 두시는가” 하면서 회의와 불신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함을 실종되고 가슴이 차갑게 식어버립니다. 어떤 말씀을 들어도 냉소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몸만 왔다 갔다 하는 영혼 없는 신앙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한 결과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부릅니다. 이를 대개 언약적 사랑이라고 번역합니다. 하나님 사랑의 기초는 조건 없는 선택과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인 은혜로 아무 조건을 따지지 않고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로 구속하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수많은 허물이 있을지라도 영원히 버리지 않고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조건 없는 선택과 언약에 기초해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독생자 예수님이라는 너무나 확실한 하나님 사랑의 증거가 있습니다. 무엇을 더 바라십니까? 이보다 더 큰 사랑의 증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우리가 구속의 언약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확신하고, 우리도 또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때가 되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드러납니다.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3,4)”

에서의 자손들이 세운 나라 에돔 역시 유다와 비슷하게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 당해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그들은 이미 유다가 했던 것처럼 스스로 일어나려고 몸부림을 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쌓을지라도 허무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무시면 그들은 다시 일어설 수 없습니다. 이후 역사를 보면 실제로 에돔은 국가를 재건하려고 시도를 합니다. 그러나 사막의 유목민들에게 침입을 당해 주된 거점들을 잃어버립니다. 결국 갈 곳이 없어져서 유대의 일부로 흡수되고 맙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이 모습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요?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5)”

그 날이 되면 이스라엘은 이렇게 행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할 것입니다. 똑같이 재건을 시도했는데 이스라엘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재건한 반면 에돔은 왜 실패할까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크신 하나님이 에서보다 야곱을, 에돔보다 이스라엘을 특별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이렇게 눈에 보이는 사랑의 증거를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조급한 것이 그들의 문제였습니다.

우리도 너무 조급한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 당장 내 눈 앞에 사랑의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고 난리를 칩니다. 사랑은 열정이 필수입니다. 하지만 열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급증은 사랑의 관계성을 맺는데 치명적입니다.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특별하게 사랑하시는 지 눈에 보이는 증거가 나타나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현순 사모님의 소감에 나온 것처럼 우주의 지성이 역사할 때까지 더 기다려 보아야 합니다. 결국 때가 되면 하나님은 불의한 자, 악한 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높이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조금만 더 인내하고 기다려 봅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온 세상 모든 일들을 다 다스리고 계시고, 우리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시는 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1:6-14)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6a)”

다음으로 하나님은 제사장을 향해 내 이름을 멸시하는 자들이라고 질타하십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종은 주인을 공경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물며 전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공경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그들은 항변합니다.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6b)” 

힘든 상황에서 나름 열심히 하고 있다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한 명백한 두 가지 증거를 제시하십니다.

첫번째 증거는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제단에 더러운 떡을 드린 것입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7)”

소제로 드리는 떡은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듭니다. 그들이 대충 거칠게 빻은 가루에 쓰다 남은 식용유를 적당히 섞어 떡을 만들었습니다. 떡을 드리기는 했지만 전혀 정성이 들어가 있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12)”

그들은 이미 더러워진 여호와의 식탁에 더러운 떡을 올리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말합니다. 다들 이렇게 하는데, 어차피 제대로 된 떡을 드리는 사람 못 봤는데 새삼스럽게 왜 그러시냐는 식의 태도입니다. 비정상이 정상이 되어 버린 이상한 상황입니다.

두번째 증거는 제사장들이 눈 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을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8)”

눈 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은 시장에 가져다 팔 수도 없고, 심지어는 거저 줄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페르시아 총독에게 이런 것으로 예물을 바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뼈도 못 추릴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총독에게는 온갖 정성을 다해 최고의 예물을 준비해 바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이런 제물을 서슴지 않고 드렸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일개 페르시아 총독보다 훨씬 못하게 여긴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13,14)”

더욱 가관은 이런 엉터리 제물을 바치면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나님께 송구스러운 마음은 일도 없고, 제물 드리는 일이 얼마나 귀찮은 일인가만 토로합니다. 사랑하는 마음 없이 섬기는 것만큼 괴롭고 피곤한 일이 없습니다. 이런 그들이 어떤 제물을 드릴 지 뻔합니다.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 흠 있는 것만 골라서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제물을 도저히 받으실 수 없습니다. 온 세상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 어떻게 이런 제물을 드릴 수 있습니까? 큰 임금이신 하나님은 이런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저주를 선포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9,10)”

마침내 하나님이 폭탄 선언을 하십니다.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백성들이 헛되이 제물을 불사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사가 헛된 이유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받지도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씀대로 성전 문이 닫히면 그나마 형식적인 예배라도 드리던 자들마저 다 사라져 예배 자체가 소멸되는 것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11)”

하나님은 참된 예배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의 땅 밖에서 드려지는 시대가 올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저 산에서도 말고 너희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메시아의 시대에는 이방인이 깨끗한 제물을 드리고 하나님을 높이는 시대가 옵니다. 이 말씀은 이방인에게는 희망의 소식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서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너희가 나를 계속 멸시한다면 나를 참되게 예배할 다른 이들을 내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식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사라졌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배의 타락으로 나타납니다. 마이클 리브스라는 분이 최근에 발간한 “떨며 즐거워하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 예배의 핵심을 꿰뚫고 있습니다. 예배는 떨림입니다. 일개 피조물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리가 어떻게 떨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죄와 허물로 얼룩진 모습으로 나아가야 하니 더욱 더 떨립니다. 동시에 예배는 즐거움입니다. 이 모습 그대로를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즐거움,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 드리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가 타락하면 떨림도 즐거움도 사라집니다. 알맹이는 어디 가고 껍데기만 남습니다. 이때 예배는 드리는 것이 아니라 때우는 것이 됩니다. 예배 시간은 견디는 시간이 됩니다. 메신저의 유머가 코드가 통하면 조금 나은 예배이고, 제일 좋은 예배는 무조건 짧은 예배입니다. 이럴 때 누군가 제대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한 마디 하면 “예배 오는 것만 해도 어디인데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세요” 쏘아붙입니다. 이런 사람은 코로나 기간 비대면 예배를 드리게 된 것에 대해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 지 모릅니다. “오히려 좋아” 예배의 질이 점점 저하되고 나면 바른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튀는 사람, 이상한 사람이 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정성이 없는 예배, 영혼이 없는 예배가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잡고 맙니다. 그 정도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지도 모릅니다. “그만 이 교회 문을 닫자.”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경고하실 때,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다운 예배를 회복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예배를 회복하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우리 마음 속에 살아서 꿈틀거릴 때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어디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입니다. 아들을 십자가에까지 내어 주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우리 영혼에 부은 바 되었을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 드리고자 하는 열정이 샘솟게 됩니다. 복음이 곧 예배의 엔진이고 심장입니다. 예배가 바로 서야 우리 삶이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첫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를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이 모두를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늘 거하게 하옵소서”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트렸느니라(2:1-9)

2장 1절부터 9절까지는 제사장의 책무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의 책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고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으며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여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말씀의 지식은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하고 적용까지 해 주는 하나님의 메신저입니다. 얼마나 존귀하고 중요한 직무입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이 모든 내용이 담긴 레위 언약을 다 깨트렸습니다. 자기만 옳은 길을 떠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임한 복이 도리어 저주가 되리라 하십니다. 얼굴에 똥칠을 하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할 것이라 하십니다.

제물을 가져오는 것은 백성들인데, 하나님은 왜 제사장들을 이처럼 혹독하게 질책하시는 것입니까? 백성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제사장들에게 더 큰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를 회복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보다는 부모에게, 양보다는 목자에게 더 큰 책임이 있습니다. 더 큰 책임을 묻는 것은 더 큰 특권과 영향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말씀을 늘 입에 두고 가르치고 잘 적용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에 기초해서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말만 앞세우지 말고 내가 먼저 본이 되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공동체,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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