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라기

내게로 돌아오라

이창무 2021. 12. 12.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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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말라기 제 3 강 / 이창무

내게로 돌아오라

말씀/ 말라기 3:6-12
요절/ 말라기 3: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오늘 본문 말씀이 아마 말라기 중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일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헌금을 독려하려고 할 때 자주 근거로 삼는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많은 설교자들이 기피하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헌금과 물질을 논하는 것이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두 쪽 다 본문의 포인트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십일조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바로 제목에 있는 대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는 지 배우고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게로 돌아오라(6,7)

우상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우상은 잘 변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잘 대접해 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대접이 시원치 않다고 여기면 언제든지 가차 없이 잘라 버립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우상의 비위를 맞추어 주기 위해서 언제나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우상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변덕스러울까요? 그 우상을 만든 인간이 변덕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6)”

사람은 변해도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수시로 언약을 깰지라도 하나님은 늘 언약에 신실하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사람이 행한 대로 되갚아 주시는 분이라면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진작에 멸망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7a)”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거역하고 언약을 지키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예배가 타락했고, 그들의 결혼이 타락했습니다. 최근에만 불순종한 것이 아니라 조상 때부터 줄기차게 하나님이 주신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와 자비를 거두어 들이지 않으십니다. 때로 징계를 내리시지만, 결코 그들을 소멸시키지 않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허물을 용서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반복해서 죄를 짓는 우리에게 여전히 소망이 있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7b)”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향해 간곡하게 호소하십니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늦은 것은 아닙니다. 죄악에 젖은 삶을 너무 오래 살아왔기 때문에 벗어날 가능성이 없다며 포기할 때가 아닙니다. 무조건 지금 당장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돌아오십니다. 하나님이 다시 오셔서 깨어졌던 관계를 회복시키십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돌아오시면 이제 더 이상 누리지 못할 줄 알았던 하늘의 복과 은혜를 다시 풍성하게 하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 가장 감격스러운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내게 돌아오셨다. 이제부터 다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누릴 수 있다”라는 소식입니다. 그런데 요즘 시대에는 이 질문에 다른 대답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내가 산 주식이 엄청나게 올랐다”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우리 집값이 두 배가 되었다” 이런 소식이 더 기쁘고 감격스러울 것이라고 말할 지 모릅니다. 지난 11월 18일 미국 여론 조사 기관 퓨 리서치 센터가 17개 경제선진국을 대상으로 한 “삶의 의미”라는 제목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17개국 중 14개국이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으로 가족을 1위로 꼽았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유일하게 물질적 풍요를 1순위로 꼽았습니다. 또 눈 여겨볼 지점은 종교 및 영적 생활을 꼽은 비율은 미국이 15%로 가장 높았던 반면, 한국은 1%로 최하위권에 머물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보다 낮은 나라는 일본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인이 20%라고 하면 적어도 19%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내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이냐는 질문에 “아니오. 돈이나 다른 것이 더 중요해요”라고 답했다는 말입니다. 참 서글프고 씁쓸한 결과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늘 말라기 본문마저 십일조를 통해 부자 되고 성공하는 비결을 가르쳐 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만저만한 오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부자 되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게로 돌아오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무엇이 진정한 복입니까?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

생명과 진리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은 얼마나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까? 온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큰 영광을 누리는 사람입니까? 최근 종로의 최사무엘 목자님, 우간다 선교사였던 정에스더 선교사님 등등 UBF 1세대 목자님들이 소천하셨다는 소식이 계속 들리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삶을 세상이 알아주지는 않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일생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살다가 가신 그분들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도 그분들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 보시기에 잘 산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8,9)

내게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호소에 백성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7c)”

이 질문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묻는 질문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말라기 시대의 맥락에서 읽는다면 이런 의미가 더 클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는데 돌아오라니 무슨 말입니까?” 달리 표현하면 이런 말입니다. “꼬박꼬박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하고 있는데 도대체 뭘 회개하라는 것입니까?”

이에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증거를 한 가지 제시하십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8)”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적이 있습니까? 내가 교회 공금을 횡령한 적은 한 번도 없고, 기껏해야 찬송가를 집에 가져왔다 깜빡한 것 밖에 없는데 도둑질이라니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와 봉헌물을 드리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소유를 훔치는 것일까요? 레위기 27장 30절에 나오는 십일조 규례에 그 이유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레27:30)”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고 농사도 짓던 그 땅은 본래 누구의 것입니까? 모두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하나님이 소유하신 땅을 잠시 빌려서 쓰는 셈입니다. 하나님은 그 땅에서 얻는 대부분의 것은 경작한 사람이 자신의 필요를 위해 쓰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그 땅에서 얻은 소득의 십 분의 일을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성물이라고 규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일조입니다. 그러므로 소득의 십 분의 일을 특별히 구별하여 드리는 것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울러 내가 얻은 물질이 내가 잘 나서 또한 오롯이 내 수고와 땀으로 얻은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도우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결과임을 알고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은 십일조는 어디에 어떻게 쓰였을까요? 세 가지 주된 용도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땅을 소유할 수 없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생활비를 충당했습니다. 덕분에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구제하는 일에 쓰였습니다. 당시에는 십일조가 사회적 안전망 역할을 한 셈입니다. 셋째로, 성전의 유지와 보수에 쓰였습니다. 이 세 가지를 종합하면 백성들이 하나님께 신실하고 동시에 서로에게 신실한 관계를 맺은 신앙 공동체를 이루는 일에 십일조 헌물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곧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 없이 자기 힘만으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교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에 포도원 농부의 비유가 나옵니다. 비유 속 악한 농부들은 주인에게 약속했던 소출의 일부를 주지 않으려고 종들을 때리고 능욕합니다. 결국 그들은 주인의 포도원을 강탈하기 위해서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맙니다. 하나님께 봉헌하는 삶의 기본기가 무너지면 결국에는 이렇게 노골적인 반역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게 되자 신앙 공동체의 균열과 붕괴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동 시대 인물인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제국의 호출을 받아 한동안 예루살렘을 비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성전을 지켜야 할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이유는 백성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아 살 길이 막막해진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생계를 위해 다 흩어져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디 있는가 찾아보았더니 택시 운전을 하거나 택배를 나르거나 야간 대리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섬길 이가 없는 성전은 날이 갈수록 쇠락해져 가고 백성들은 그런 성전을 더욱 더 찾기 않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신앙이 약해진 사람들은 더욱 더 십일조를 소홀히 하게 되는 악순환이 이어졌습니다. 이런 현상이 얼마나 광범위했을까요?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9)”

하나님은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너 나 할 것이 없이 거의 모든 사람의 헌금 생활이 엉망이었다는 말입니다. 백성들은 어차피 내 소득이 얼마인지 아무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는데 축소하거나 누락시켜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온전하지 못한 십일조를 드리는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또 하나의 비정상의 정상화 현상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이미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시대에 비정상적으로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이 여기까지 이르게 된 근본 원인이 무엇일까요? 디모데전서 6장 9절과 10절에서 바울이 한 말씀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9-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합니다.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이 늪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은 수단이고 방편일 뿐입니다. 결코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삶을 지속하는 한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도 없습니다. 선지자는 돈을 돈의 자리로 보내고,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로 모시어 들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돈을 돈의 자리로 돌려놓아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리로 돌아오십니다.

이 말이 돈을 무시하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돈을 허투루 쓰지 않도록 절약도 하고 미래를 대비해서 저축도 하고 투자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물질 그 자체를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삶에서 돈의 비중이 너무 커져서 우리의 신앙과 영성까지도 다 집어 삼키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그만큼 돈은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경영학에서 투자론 과목을 배울 때 학생들이 교수님에게 묻는 단골 질문이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주식 투자로 얼마를 버셨나요?” 이 질문이 나오는 순간 하나같이 교수님들이 표정이 어두워집니다. 큰 손해를 봤다는 말씀을 하시면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투자의 정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내 돈이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게 내 맘대로 잘 안 되더군요.” 

돈은 자주 우리를 속입니다. 너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속삭입니다. 아무 걱정 없는 편안한 인생을 살게 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뭐든지 다 가능하게 해 주겠다고 큰 소리를 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달콤한 음성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광야 같은 인생길에 우리를 지켜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의지할 대상 역시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이 황금 만능의 시대 속에서 우리가 이 신앙 고백을 붙들며 물질의 유혹을 뿌리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를 시험하여 보라(10-1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10)”

앞에서 저주를 말씀하셨다면 하나님은 이제 축복의 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라고 하십니다. 언뜻 납득이 잘 안 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신명기 6장에서 나를 시험하지 말라고 엄히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시험하지 말라고 해 놓으시고 왜 여기서는 시험해 보라고 하셨을까요? 원래는 안 되는 일이지만 하나님이 너무 절박하시기 때문에 허락하신 것입니다. 장작에 붙을 붙여 보셨습니까? 보통 신문지를 불쏘시개로 쓰는데 생각보다 잘 불이 붙지 않습니다. 게다가 젖은 장작이라면 더 어렵습니다. 이럴 때는 휘발유가 필요합니다. 위험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가 마치 젖은 장작과 같습니다. 회의와 불신이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아무리 부채질을 해도 좀처럼 신앙에 불이 붙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수모를 당하시는 것을 감수하시고 온전한 십일조로 나를 시험해 보라 하십니다. 두 눈 딱 감고 한 번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물질을 드려 보라고 하십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약속하십니까? 하늘 문을 열고 쏟아 부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일차적으로 많은 비를 내려 주시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성적인 가뭄에 시달렸던 상황에서 큰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이란 표현을 볼 때 단지 비를 주시겠다는 의미를 넘어 삶의 전 영역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게 하시겠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불신 때문에 막혔던 하늘 문이 작은 순종을 통해 열리게 되면 폭우가 내리는 것처럼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축복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리게 될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11)”

농사가 잘 되려면 비가 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병충해를 당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메뚜기 떼가 가장 무서운 병충해입니다. 메뚜기가 한 번 지나가면 푸른 색은 싹 다 사라진다고 합니다. 또한 우박이나 바람 때문에 결실하기 직전에 열매가 떨어지면 이것 역시 엄청난 피해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 모두 다 막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비도 잘 내리고 병충해도 없고 기상 이변도 없으면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12)”

이스라엘 땅이 아름다워집니다. 들녘에는 황금 물결이 일렁이고 나무마다 과실이 주렁주렁 맺힐 것입니다. 그 모습을 이방인들이 보고 복되다 할 것입니다. 전세계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고 그 비결을 배우기 위해 앞다투어 찾아올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한낮의 꿈 같은 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은 대통령 후보들의 빌 공 자 공약아 아닙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만물을 소유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보증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했다면 이제 우리는 구약의 율법 아래 있던 백성들과 달리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십일조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제사장도 없고 레위인도 없고 건물로서 성전도 없습니다. 따라서 십일조에 관한 구약의 율법을 문자적으로 신약의 성도들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 규정으로서 십일조는 더 이상 우리를 구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십일조는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의 십일조와 신약의 헌금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십일조가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활을 책임지고 구제를 실천하고 성전을 유지하는 용도로 쓰였던 것처럼, 신약의 헌금도 사역자들의 생활을 책임지고 이웃을 구제하고 선교를 지원하는 일에 그리고 교회의 인프라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일에 쓰입니다. 만약 성도들이 헌금을 소홀히 하게 되면 그만큼 교회는 약해지게 됩니다. 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전파하고 세워 나가는 일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헌상의 의무를 가집니다. 의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이며 특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헌금은 특권이고 은혜이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즐거움으로 드리라는 것이 신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고후9:7).

아울러 십일조가 담고 있는 정신은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신다는 믿음의 고백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우리 신앙 안에서 핵심이 되는 고백입니다.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말로 고백하면 되지 꼭 헌금이 뭐 중요하냐고 할 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셨습니다(마6:21). 마음이 있다면 물질도 드리게 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물질을 드림으로 마음이 함께 따라가게 할 수 있다는 뜻도 있습니다. 선교를 위해 물질을 드리면 선교에 관심이 저절로 갑니다. 구제에 물질을 드리면 이웃의 어려운 형편에 관심이 생깁니다. 교회를 위해 헌금을 하면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섬기는 교회가 되도록 참여하게 되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말씀에서 “내게로 돌아오라” 말씀하신 후 곧바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 명하십니다. 우리가 물질 생활, 헌금 생활을 통해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기회로 삼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과 은혜 안에 풍성히 거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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