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라기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리라

이창무 2021. 12. 27.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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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말라기 제 4 강 / 이창무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리라

말씀 / 말라기 3:13-4:6
요절 / 말라기 3: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정치인이나 연예인 같은 유명인들이 망언이나 실언 때문에 큰 곤욕을 치르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 사람들이 또 다시 말로 물의를 일으키곤 한다는 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말은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바뀌지 않았는데 어떻게 말이 변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언어 생활에 주목하십니다. 그들의 마음에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말이 나옵니다. 올바른 말을 하려면 우리에는 어떤 믿음이 필요할까요?

I.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 vs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13)”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말에 대해서 지적하십니다. 그들이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완악하다는 말은 원어로 보면 ‘강하게 압박하다’ 곧 ‘스트레스를 주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계십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민족이 그랬다면 스트레스를 덜 받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백성이 험한 말로 자신을 대적하고 있으니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으시겠습니까? 이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가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뻔뻔스럽게 오리발을 내놓는 백성들로 인해 하나님은 마음이 더 상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이 도대체 어떤 말로 하나님을 대적했을까요?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14,15)”

첫째,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말합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왔고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십일조도 드리고 안식일도 지켰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님 섬기는 것이 다 헛되다. 매주 성경공부하고 예배하고 목자로 살아봐야 인생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기 시작했습니다. 섬기는 것이 헛되다는 것은 성경에서 우상 숭배를 가리킬 때 자주 쓰는 표현입니다. 그 표현을 하나님께 적용하다니 이 얼마나 불경한 일입니까? 게다가 이 말은 사실 관계도 어긋난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왜 헛된 일입니까? 일개 피조물로서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 드리는 그 자체가 영광이고 특권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쁨이고 큰 은혜입니다.

둘째,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익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슬프게 행하는 것은 금식이나 머리에 재를 뿌리고 옷을 찢으며 드리는 회개 기도를 가리킵니다. 백성들은 이 정도로 절실하다는 것을 보여 드리면,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 획기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허탈감을 느끼고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항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들의 슬픔이 죄를 뉘우치는 것에서 오는 진정한 슬픔이 아니라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한 가식적인 슬픔이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들은 교만한 자가 복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 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심판을 받으며 하나님을 시험하면 화를 입는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정확하게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치관이 완전히 뒤집어져 있습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습니다.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는 가치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새 내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 성경과 다르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교만한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있고 버젓이 악을 행하는 자가 부자가 되어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 분명한데 하는 일마다 대박이 터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말씀과 현실 사이에 괴리를 느끼고 갈등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진짜 믿음의 세계로 들어갈 것인가? 불신과 냉소주의에 빠질 것인가? 갈림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백성들은 후자를 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 무책임한 분으로 만들고 있는 셈입니다.

혹시 우리도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과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나요? “하나님을 믿어봐야 도움이 되는 게 없어. 순종도 해 봤고 성경도 읽고 눈물로 기도도 해 봤는데 그렇다고 이루어진 건 하나도 없더라구. 차라리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더 마음 편하게 사는 것 같아. 게다가 그런 사람들이 훨씬 더 잘 먹고 잘 살더라.” 왜 이런 말이 나오는지 그 심정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도 못하나?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런 말까지 할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속에 있는 생각과 감정을 다 말로 표현하며 살지는 않습니다. 불만이 있어도 할 말과 못할 말을 가려서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할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습니다. 선을 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위에서 다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욥기 2장에 보면 욥의 고난을 보다 못한 아내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이에 대해 욥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욥2:10)”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과 영생의 복을 받은 사람으로서 현실이 좀 힘들다고 해서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내뱉은 말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해명해야 할 날이 반드시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들다고 아무 말이나 너무 쉽게 막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의 언어 생활에 주의를 기울여 우리가 하나님께 입술로 범죄하지 않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을 완악한 말로 대적하는 자들만 있을까요?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16)”

동시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서로 교제하면서 어떤 말을 했을까요? 14, 15절과 정확히 반대되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으로 더할 나위 없는 은혜다. 하나님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킨 것만 남는다. 교만한 자는 망하고 악을 행하면 심판을 받고 하나님을 함부로 여기는 자는 결코 화를 면할 수 없으리라.” 이들은 아무리 현실이 힘들어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 선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이 믿음에 나오는 말로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 말을 들으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기쁘고 흐뭇하시겠습니까? 불신적인 말, 대적하는 말 때문에 받으셨던 스트레스가 단숨에 확 날아가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전부 기념책에 기록해 두십니다. 제 둘째 딸이 다섯 살 때 저에게 이렇게 쓴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 하지만 아빠를 더 더 더 사랑해요.” 이것 뿐만 아니라 딸들이 어릴 때 쓴 편지나 카드를 저는 다 보관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씩 다시 꺼내 보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행복해집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성도가 한 사랑 고백, 신앙 고백을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심지어는 내가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을 못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고 계십니다. 포인트를 쌓듯이 믿음의 말들을 차곡차곡 모아 두셨다가 보상해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보상을 주시고자 하실까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17)”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십니다. 특별한 소유를 직역하면 “금고에 넣어두는 물건” 곧 보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사람을 보물과 같이 여기십니다. 그런데 보물보다 더 소중한 것도 있습니다. 부모에게 자녀가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인스타그램에 셀프 사진만 올리던 사람이 자식이 태어나면 확 달라집니다. 자기 사진 대신 거의 매일같이 아들 딸 사진만 올립니다. 이은 자매님은 바라보는 이믿음 목자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는 여러 사람의 증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성도들을 이렇게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신다는 것이 지금 당장에는 외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믿는 사람이라고 피해갑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남들보다 빨리 승진하고 높은 자리에 오릅니까? 그런 경우도 간혹 있긴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금 여기의 현실을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이리저리 뒤섞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눈에 확 띄는 차이점이 별로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한 날이 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어떻게 달라질까요?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18)”

그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실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도 그랬습니다. 정한 기한이 차자 하나님은 믿음으로 산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나머지 인류를 구별하셨습니다. 지금은 다 뒤섞여 있지만 장차 알곡과 가라지가 나누어지고, 양과 염소가 분리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모든 사람이 객관적으로 가시적으로 “저 사람은 하나님이 특별하게 아끼고 사랑시는 사람이 분명하구나. 정말 하나님의 보물이었고 아들 딸이었구나”라고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가 믿음으로 사느라고 손해 보았던 모든 것을 충분히 보상을 받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 추수 감사절에 우리는 “한줄 감사” 이벤트를 했습니다. 무려 614개의 감사 제목이 모였습니다. 이번에 소식지 “크로스”에 실기 위해 정리하면서 다시 한번 봤습니다. 다시 봐도 또 감동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의 본성을 확연히 발견케 하시고 그 가운데 조금씩 인내하며 성장을 도우시는 은혜에 오늘 아침도 본성대로 행하지 않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 bless u” “내 소유의 집은 없지만 주님 예비하신 하늘 거처가 있고 또 집 이상의 안정감을 주는 남편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 하늘소망” “요즘 하루하루가 말씀안에서 너무 기쁘고 은혜롭습니다 하나님 생각할 때 가장 행복하고 제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런 삶을 제게 허락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예배자” 이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믿음의 말들이 가득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 이 말을 다 들으셨고 또 빠짐없이 책에 다 기록해 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메모를 해 놓으셨을 것 같습니다. “역시 내 아들들이고 내 딸들이구나. 너희가 바로 내 보물이다. 악한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살고 나를 섬기느라 고생이 참 많다. 내가 다 안다. 그렇지만 조금 더 참고 기다려 보아라. 내가 준비한 상급을 너희에게 선물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어제 성탄절 예배 때 들은 말씀에 나오는 시므온과 안나는 믿음으로 오랜 세월 한결 같이 기다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말, 덕이 되는 말을 하려면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고 하나님이 정한 때를 기다릴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너무 조급해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조급하면 말이 나도 모르게 거칠게 나올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하나님 섬기는 우리를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 때가 되면 이를 누구나 알 수 있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날까지 우리가 믿음의 말, 영적인 말로 서로를 북돋아 주고 격려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 용광로 불 vs 치료하는 광선

그러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첫째, 교만하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 용광로 불과 같은 심판이 임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1)”

용광로는 당시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뜨거운 불입니다. 불은 심판과 분노를 상징합니다. 이 날은 오래 동안 참으신 하나님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가 일시에 쏟아져 나오는 날입니다. 그날에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지푸라기처럼 순식간에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다 타서 뿌리부터 가지까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힘 깨나 쓰고 떵떵거리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치료하는 광선이 임합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2)”

그 날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춥니다. 태양광 안에는 살균 효과를 낼 수 있는 자외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소독을 할 때도 쓰이고 건선, 백반증, 아토피 등을 치료하는 효능이 있습니다. 또한 파장이 긴 적외선도 나오는데 이것 역시 치료 효능이 있습니다. 통증 완화, 혈액 순환 증진, 근육 이완, 신진대사 증진에 탁월하다고 합니다. 의인에게 왜 이런 치료하는 광선이 임하는 것일까요? 이는 그만큼 의인에게는 상처가 많다는 반증입니다. 의인들은 불의한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살면서 온 몸에 크고 작은 상처들을 입습니다. 우리만큼 코로나 예방에 주의를 기울인 곳도 없는 것 같은데 마치 신자들이 코로나 확산의 주범인양 도매급으로 취급을 당하면 상처를 받습니다. 묵묵히 성실히 일만 했는데 로비하고 아부하고 줄서기한 사람들에게 밀려나면 상처를 받습니다. 남들은 주식이다 부동산이다 하면서 큰 돈 버는데 너는 맨날 말씀과 기도 밖에 모르냐며 시어머니에게 핀잔을 들으면 상처를 받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오랫동안 섬겨 온 양이 굿 바이를 선언하고 떠나버리면 상처를 받습니다. 전도를 나갔다가 캠퍼스 폴리스를 만나 쫓겨나면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날이 되면 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을 발함으로 이 모든 상처들을 아물게 하고 치유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상처 났던 자리에 새 살이 돋게 하시고 깨끗하게 회복케 하실 것입니다.

그날에 성도의 모습은 마치 외양간에 나온 송아지와 같을 것입니다. 외양간 송아지는 좁은 우리 속에 밤새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아침 해가 떠오르면 외양간의 문이 열립니다. 그때 송아지는 용수철처럼 뛰쳐나와 이리저리 방방 뛰면서 자유를 만끽합니다. 이것이 치유함을 받은 의인들이 누리게 될 자유와 기쁨입니다. 그 동안 의인들은 어두운 세상 가운데 교만한 자들, 악인들의 등쌀에 눌려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고 웅크리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살이가 참 답답하고 어쩔 수 없이 눈치 보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이 되면 마음껏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껑충 껑충 뛰는 송아지처럼 생명력이 충만하고 역동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셋째, 의인이 악인에 대한 최후 승리를 거둡니다.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3)”

누군가의 머리를 밟는다는 것은 완전하고 철저한 승리를 상징하는 행위입니다. 그날에 의인의 승리가 확정됩니다. 악인들의 말로는 비참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기에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질 그날이 도대체 언제일까요? 바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오실 때는 세상을 구원할 사랑의 복음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다시 오실 때는 공의로운 해로 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만하게 행한 악인들은 그 태양의 뜨거운 열기 앞에 모두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한 의인들을 치료하시고 그들에게 최후 승리를 선사해 주실 것입니다. 

암살이라는 영화에서 배우 이정재가 분한 염석진에게 한때 독립투쟁을 함께 했던 동료가 이렇게 묻습니다. “왜 동지를 팔았나?” 그러자 염석진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몰랐으니까.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그 날이 오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면 우리도 염석진처럼 세상에 투항하려는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내일이 될지 먼 미래가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오늘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현실이 답답하더라도 묵묵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가 마지막에 웃는 자가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날에 믿음으로 살다가 받은 모든 상처를 다 치유해 주시고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뛰게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III. 말라기의 결론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4-6)”

4절부터 6절까지 말라기 전체의 결론이자 구약 전체의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주시고 이를 지키며 살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잊어버리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을 갖춘 최강 선지자 세례 요한을 보내어 주님께 돌이키도록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경고하신 대로 그들은 A.D. 70년 로마군의 침공을 받고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전세계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선지자 말라기의 외침이 무색하게 회복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철저히 실패했습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복음의 빛 아래에서 말라기 말씀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말라기는 무너진 예배의 회복, 결혼과 가정 생활의 회복, 물질과 헌금 생활의 회복, 언어 생활의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우리도 이 점에서 회복이 절실히 필요해 보입니다. 어떻게 회복을 이룰 수 있습니까? 율법으로 안 됩니다. 잔소리로 안 됩니다. 사람의 힘과 의지만으로 안 됩니다. 진정한 회복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습니다. 내년 1월과 2월에 갈라디아서를 공부하고자 합니다. 새해 우리가 갈라디아서 말씀을 통해 복음의 세계에 온 몸을 풍덩 담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진정한 예배의 회복, 관계의 회복, 삶의 회복, 말의 회복이 일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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