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말라기 제 2 강 / 이창무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말씀 / 말라기 2:10-3:5
요절 / 말라기 2:10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여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얼마 전 “하브루타”라고 하는 학습법이 큰 주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브루타란 짝을 이뤄 서로 질문을 주고받으며 유대인의 전통적인 토론 교육 방법을 말합니다. 하버드 대에서 하브루타의 학습 효과가 기존 주입식 교육보다 14배의 더 높다는 결론을 도출했다고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브루타의 전통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선지서가 바로 말라기가 아닌가 합니다. 말라기에는 총 여섯 개의 논쟁이 있는데 오늘은 그 중에서 세번째와 네번째 논쟁을 함께 살펴 보고자 합니다.
세번째 논쟁 : 결혼과 이혼에 대한 논쟁(2:10-16)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10a)”
선지자는 먼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특별한 관계를 상기시킵니다.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않았느냐 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유일한 영적 아버지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같은 나라의 국민을 넘어 하나님 안에서 모두 다 형제이며 자매입니다. 그러므로 한 아버지를 둔 형제 자매로서 마땅히 서로에게 진실하고 우애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여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유다는 거짓을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10b,11a)”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했습니다.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성결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형제에게 잘못한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심대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을까요?
첫째로 이방 여인과의 결혼입니다.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11b)”
이방 신의 딸이란 하나님이 아닌 우상들을 자신의 아버지로 여기고 숭배하는 여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혈통이 이스라엘이 아닌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십보라, 라합, 룻, 아비가일 등등 타 민족 출신이었으나 하나님을 섬기게 된 여인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문제는 아예 다른 종교를 가진 이방 여인들과 결혼입니다. 말라기와 거의 동시대에 쓰여진 에스라나 느헤미야를 보면 보면 당시 이방 여인과의 결혼이 심각한 사회문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이방 여인들과 결혼했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결혼을 통해서 경제적인 안정을 얻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하기 전에 가나안 땅에 자리 잡은 이방인들이 꽤 있었습니다. 귀환 후 생활이 궁핍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 유력 가문과 사돈 관계를 맺는 것이 경제적인 안정을 가져올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요즘 신조어 중에 “혼테크”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자산을 바탕으로 수익을 얻는 재테크에서 파생된 표현으로 결혼을 통해서 수익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 중에 혼테크 열풍이 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까요? 과거 사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 왕은 주변 이방 나라의 많은 여인들과 정략 결혼을 했습니다. 그 결과 갖가지 종류의 우상 숭배가 이스라엘에 직수입되었습니다. 이것이 후대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바울을 숭배하는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선지자를 학살하여 자칫 씨가 마를 뻔했습니다. 이렇게 이방 여인과의 결혼하는 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를 깨트리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점점 타종교에 물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순수성이 더럽혀지고 혼합주의가 생겨날 것입니다. 공동체의 연합과 일치도 파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이방 신의 딸이 결혼을 하게 되면 하나님과 이방 신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서로 사돈 관계가 됩니다. 여호와께서 바알이나 아세라와 사돈이 되다니 이것이 말이 되는 일입니까?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에서 끊어 버리시리라(12)”
여기서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아마도 권하는 사람과 권함을 받아서 그런 일을 수동적으로 한 사람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들이 이방 여인과 결혼에 적극적이었는지 소극적이었는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설령 그들이 꼬박꼬박 제사를 드리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서 끊어내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요즘 시대 결혼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무엇일까요? 경제력과 외모, 딱 이 두 가지로 보는 것 같습니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결혼 정보 회사의 등급표입니다. 사람이 소고기도 아닌데 등급을 매긴다는 것 자체가 씁쓸합니다. 한 회사의 등급표에 따르면 남성 회원의 만점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재산이 100억원 이상이어야 하고 학교는 S대나 미국 명문대를 졸업해야 하며 키는 185 Cm 이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머리인 경우는 10점을 감점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 믿는 사람도 세상과 똑 같은 결혼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영적 아버지로 섬기며 사는 사람인지 여부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조건이 좋고 외모만 마음에 들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깁니다. 이렇게 결혼하고 나서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다가 결국 신앙을 잃어버리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후6:14)”
당시 수레는 소 두 마리를 하나의 멍에에 매여 끌도록 했습니다. 만약 소들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가는 길이 순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신자와 결혼이 이와 같습니다. 눈 앞에 이익을 쫓다가 스스로 불행을 자초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앞으로 결혼을 해야 할 분들도 있고 또는 자녀들을 결혼시켜야 할 분들도 있습니다. 결혼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세상의 기준을 따를 것이 아니라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가? 함께 멍에를 맬 수 있는가?”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이혼과 학대입니다.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제단을 가리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봉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13)”
선지자는 너희가 이방 여인과의 결혼만 아니라 심지어 이런 일까지도 행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란 그들이 저지른 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제단을 가리게 한 일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비통했으면 눈물로 여호와의 단을 덮어 버렸을까요? 그런데 얼마 후 가해자들은 봉헌물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제단 앞에 바쳤습니다. 남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해 놓고 참 뻔뻔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물을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은 그들의 제물을 거절하십니다.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14)”
이에 그들은 “어찌 됨이니이까” 라고 반문합니다. 도대체 제물에 무슨 문제가 있냐는 반응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제물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짝이요 그들과 서약한 아내에게 행한 거짓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거짓이란 서약을 깨트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혼인 서약을 할 때 주례는 신랑과 신부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변함없이 사랑하고 살펴주고 함께 동역하고 섬겨주겠습니까?” 이때 신랑 신부는 “아멘”이라고 주저없이 대답을 합니다. 결혼식을 축하하러 온 수많은 하객들이 이 서약의 증인들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보이지 않는 증인이 한 분 더 계십니다. 부부가 하나님 앞에서 서약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증인이십니다. 고대 시대에 증인은 사실 관계를 진술하는 역할만 한 것이 아닙니다. 서약의 쌍방 당사자들이 서약을 끝까지 잘 지켜지는지 감시하고 관리 감독하는 역할까지 감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결혼의 증인이시기 때문에 젊을 때 맺은 부부의 서약이 늙어 죽을 때까지 신실하게 이행되고 있는지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16절에 나타난 두 가지 행위로 배우자와 맺은 결혼 서약을 깨트렸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16)”
하나는 이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학대하는 것입니다. 말라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중 어떤 이는 처가의 재산이 변변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조강지처를 버리고 부유한 이방 여인의 딸과 재혼했습니다. 아내가 병들었다는 이유로, 못 생겼다는 이유로, 심지어는 싫증이 났다는 이유로 이혼을 했습니다. 당시 이렇게 이혼을 당한 여인은 곧바로 극빈층으로 전락했습니다. 아이들과 생이별을 하고 나서 원통하고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여호와의 제단 앞에 쉴 새 없이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들의 탄식 소리, 울음 소리를 하나님은 날마다 들으셨습니다.
설령 이혼을 당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남편에게 지속적으로 학대를 당하는 아내들이 있었습니다. 언어 폭력은 기본이요 신체에 폭력을 가하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힘 없는 아내는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내의 몸에 상처가 나거나 멍이 들면 남편은 옷으로 그 부위를 가리게 했습니다. 그래 놓고 선 밖에 나가서는 세상에 둘도 없는 남편인 양 연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모습이 얼마나 가증스럽게 보이겠습니까?
이스라엘 가운데 이렇게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이혼과 학대가 만연하게 된 근본 원인이 무엇일까요? 이는 그들에게 결혼이 무엇인지 개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설령 머리로는 알고 있었을지라도 이를 마음으로 깊이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결혼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15)”
하나님은 영이 충만하신 분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가능한 경우의 수를 빠짐없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지혜를 가지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가능한 모든 형태의 결혼 중에서 “이것이다”라고 정하신 것은 딱 하나입니다. 한 사람의 남자와 한 사람의 여자가 만나서 한 몸을 이루어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충실한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것입니다. 결혼식 때 서약한 대로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변함없이 사랑하고 살펴주고 함께 동역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부는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남편이 아내를 위하고, 아내가 남편을 위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위하는 길입니다. 이런 가정에서 태어나고 양육을 받은 자녀가 경건한 자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이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함부로 이혼하면 어떻게 됩니까? 한 몸을 찢어 놓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접착제로 붙여 놓은 것을 억지로 떼면 양쪽 모두가 너덜너덜해지듯이 둘 다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또 만약 배우자를 학대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는 한 몸의 일부를 스스로 괴롭히는 자해 행위입니다. 부모의 이혼이나 학대를 보고 자란 자녀들은 일생 씻기 어려운 큰 상처를 입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선지자는 15절과 16절에서 반복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마음 속으로 이혼할 생각이나 배우자를 괴롭힐 생각은 털끝만큼도 품지 마라. 결혼의 서약을 깰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남겨두지 마라”
작년에 우리 나라의 이혼율은 OECD 회원국 중 전세계에서 9위, 아시아에서 1위를 했습니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 눈에 띄는 점이 황혼이혼이 크게 늘었다는 점입니다. 혼인 지속 기간이 20년이 넘는 이혼이 전체에서 37.2%나 됩니다. 이는 가정 내에서 장기간에 걸친 학대가 있었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비단 부부의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청소년 문제 뒤에는 대부분 붕괴된 가정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우리는 비교적 선방을 잘 해온 것 같습니다. 성서적 결혼관에 기초해서 결혼 서약을 신실하게 지키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부모님의 사랑과 신앙 교육 속에서 경건한 다음 세대가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혼과 학대는 아직까지 거리가 먼 단어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안심할 수만은 없습니다. 워낙 세상 풍조가 거세게 몰아치고 있기 때문에 교회와 성도들도 여기에 영향을 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경각심을 가지고 우리 마음을 삼가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삶의 준칙이 세상의 법이나 관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사회가 아무리 용인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을 결코 해서는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짝을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여기고 사랑하고 아끼며 존중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가정이 견고하시고 세워지며 우리의 신앙 또한 바르게 세워질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이 세상에 본이 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네번째 논쟁 :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논쟁(2:17-3:5)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17)”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말로 하나님을 괴롭게 한다고 선언합니다. 이에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괴롭게 했냐고 반문합니다. 하지만 증거가 있습니다. 녹음 재생 버튼을 눌러 보니 이런 말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말이야 암만 봐도 악인을 좋게 보시고 그들을 더 사랑하시는 분인 것 같아.” “맞아. 도대체 정의의 하나님이 계시기는 한 거야?” 하나같이 하나님에게 모욕감을 주는 발언들입니다. 이방 민족도 아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말들을 주고받고 있으니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그들이 왜 이런 말을 하게 되었을까요? 현실에 대한 실망과 삶의 고통이 그들의 마음을 멍들게 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이나 페르시아 제국은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들입니다. 약한 자들을 착취하고 잔인하고 악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망하기는커녕 해가 갈수록 더욱 더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고달픈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가까스로 성전을 재건했지만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모습에 그들은 처음에는 섭섭했고 다음에는 원망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독설에 가까운 막말도 서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3:1)”
이 구절 속에는 두 사자가 나옵니다. 상반절에 여호와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사자는 세례 요한을 가리킵니다. 하반절에 나오는 사모하는 언약의 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는 백성들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째서 예수님이 답이 되십니까?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2)”
선지자는 예수님을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에 비유합니다. 뜨거운 불은 금과 찌꺼기를 분리합니다. 잿물은 옷에서 때를 분리합니다. 지금은 선과 악이 뒤섞인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이 승승장구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핍박을 받습니다. 얼핏 보면 하나님의 공의가 실종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알곡과 쭉정이를, 양과 염소를 분리하실 것입니다.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고 참고 선을 행한 사람에게 상급과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그날에 하나님의 공의가 물이 바다 덮음과 같이 온 세상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온 세상을 깨끗하게 하기에 앞서 먼저 하실 일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을 깨끗하게 하여 온전한 예배를 드리게 하십니다.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3,4)”
언약의 사자는 레위 자손부터 깨끗하게 하십니다. 금과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십니다. 깨끗하게 된 그들은 공의로운 제물을 하나님께 바칠 것입니다. 그 때에 백성들도 새로워져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봉헌물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여 거룩하고 신실한 예배자가 되게 하십니다.
둘째로 공동체 안에 여러 불의와 부조리를 심판하십니다.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5)”
언약의 사자가 오시면 형제들과 수평적 관계에서 일어나는 죄를 심판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온갖 미신적인 행위들, 간음, 거짓말과 사기치는 것, 일을 시켜 놓고 임금을 떼어먹는 것, 고아, 과부, 나그네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고 그들의 인권을 무시하는 것 등등입니다.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형제들 간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들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이런 일들을 행한 자들을 향해 책망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실 것입니다. 진실되게 회개하고 돌이키면 용서를 받겠지만 끝까지 죄악의 길을 고집하는 자에게는 징계와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들 우리 시대의 화두가 공정과 정의라고 합니다. 대선주자들도 여야를 가리지 않고 공정과 정의를 목청껏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목소리들이 정말 공정과 정의를 이룰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외치는 공정과 정의는 주로 타인을 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공정과 정의까지 의심하고 논평합니다. 그러나 내 자신은 과연 얼마나 공정하고 정의롭습니까? 내 안에도 똑 같은 불공정과 불의가 자리 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앞서 먼저 우리를 깨끗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뜨거운 불에 넣어서라도 불순물을 제거하고자 하십니다. 우리 삶의 크고 작은 시련들은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아서도 아니고 우리에게 무관심해서 일어난 일들이 아닙니다. 죄로 오염된 우리를 깨끗하게 하여 정금과 같이 나오게 하시는 연단의 과정입니다. 주님께서 금과 은처럼 우리를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가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 복음의 능력을 형제 사랑을 뜨겁게 사랑하고 섬기는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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