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서평

교리와 신앙 요약 (5) 신조와 신앙고백의 유용성

이창무 2018. 9. 6.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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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와 신앙고백서의 유용성


신조와 신앙고백서가 교회에 미치는 유익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첫째,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는 믿고 따르는 신조와 신앙 고백서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이든 그리스도인이든 그저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본문에 대한 신학적 진술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조와 신앙고백서가 제시하는 내용과 같습니다. ‘나는 성경 자체만으로 성경을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리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성경을 읽고 있는 자신만의 틀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이 틀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틀이 성경적인 틀인지 여부를 확인하고 검증할 수 없기 때문에 더 큰 문제를 야기합니다. 문서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그 내용을 성경에 비추어 면밀히 살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조와 신앙고백서를 거부하는 사람은 교황보다 더 권위적입니다. 교황은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문서를 통해서 명확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로교는 모든 직분자들에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표현된 교리 체계에 대한 믿음을 시인하고 그 가르침을 지키도록 해야합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의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면 합당한 기관에 보고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렇게 해야 교회가 강단에서 무엇을 가르치는지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로교의 신앙고백과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면 직분을 내려놓고 사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만을 신조로 삼는 교회에서는 직분자가 가진 생각을 검증할 수단이 없습니다. 이럴 경우 그는 이론적으로 무제한의 권력을 갖게 되고 그의 결정에 따라 성경의 의미가 결정되고 맙니다. 결국 공식적인 신앙고백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 교회가 얼마나 투명한지를 판가름하게 됩니다.


둘째, 신앙고백은 교회의 권력을 제한합니다. 어떤 단체이든 기관이든 건전하게 유지되려면 기관의 존재 목적을 이해하고 그 구성원들이 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을 이해하고 교인들이 이를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고백과 신조가 바로 교회의 존재목적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에 의해 정당성이 부여될 수 있는 교회의 권위와 그렇지 못한 권력의 남용을 구별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반면 성경만 내세우면 권력 남용을 예방하는 일이 순탄치 않습니다. 정당한 권력의 사용인지를 검증할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 신조와 신앙고백서는 믿는 바를 간결하고도 철저히 요약합니다. 신조와 신앙고백은 교회로 하여금 가장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신앙고백은 영구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고 지엽적인 문제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신앙고백을 통해서 교회에서 지금 중요한 일이 무엇이고 지엽적인 일이 무엇인지를 분간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유행이나 당장 눈 앞에 보이는 문제 해결에 급급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고전적 신앙고백들이 다루고 있는 주요 주제들은 신론, 창조론, 기독론, 구속론, 그리고 종말론 등입니다.


신조와 신앙고백서가 간결하다는 것은 그저 짧다는 뜻이 아닙니다. 간결하다는 것은 불필요한 것은 없되 있어야 할 것은 빠짐없이 구비한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유의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교회는 매우 중요한 사안을 사소한 사안처럼 제시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사소한 개인적 관심사를 중요한 사안인양 부풀려서는 안 됩니다. 둘째로 교회가 바른 신학을 유지하려면 신학적 안정성을 위해 어느 정도 교리적 복잡성이 필요합니다. 간결하다고 해서 무조건 단순화시켰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교리의 불가피한 복잡성을 이해하려면 교리가 발전해 온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간결함 때문에 신앙고백서들은 교리의 핵심적인 사항을 적절한 범위 안에서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한 계획서로도 활용될 수 있습니다.


넷째, 신조와 신앙고백서는 교회 회원과 직분자의 역할을 적절히 구별합니다. 개혁교회에서는 모든 교인들에게 교회의 신앙고백에 대한 동의를 요구하는 전통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로교에서는 일반 회원과 직분자를 구분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장로교는 세례 교인의 자격이 그리 까다롭지 않습니다. 믿음에 대한 몇 가지 핵심적인 사항만을 공적 신앙고백으로 요구합니다. 그러나 직분자의 경우에는 다릅니다. 직분자에게 교리에 대한 지식과 교리적 역량을 요구합니다. 이런 교리적 역량을 어떻게 검증하거나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이 신앙고백서와 신조를 반드시 믿고 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워진 직분자들은 최소한의 교리적 이해만 가지고 있는 입문자를 잘 교육시켜서 영적인 수준을 성장시키도록 도울 책무를 가집니다.


다섯째, 신조와 신앙고백서는 교회의 목회적 권위를 반영합니다. 신조와 신앙고백은 교회의 장로들이 믿고 지키기 때문에 존중받을만 합니다. 이 시대는 자신의 판단을 가장 신뢰하는 진술을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판단은 시대와 충돌합니다. 성경은 자신의 판단보다 교회의 공식적인 판단을 더 신뢰하고 따라야 할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섯째, 신조와 신앙고백서는 교회가 회중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교리적 역량을 제시합니다. 교회에 있어서 교리의 중요한 역할이 바로 교육적인 역할입니다. 교리는 교회가 교리적 생활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무엇인지, 적절한 교리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회중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리적 수준은 현실적으로 모두가 도달 가능한 교리적 수준이 아닙니다. 신앙고백과 신조는 교회의 회원들에게 최상의 신학적 이해 수준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 고백은 성경의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는 흥미진진한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병행 선교기구는 교회를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대부분 교회병행 선교기구는 축소된 최소한의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뚜렷한 신앙고백적 차이를 사소한 상대적 차이로 축소시킬 위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교회병행 선교기구는 신자에게 도움을 주고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지만 그것이 지교회와 교단보다 더 우선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곱째, 신조와 신앙고백서는 현재를 상대화합니다. 수세기에 걸쳐 유용성이 검증된 신조와 신앙고백은 오늘의 지나가는 유행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또한 신조와 신앙고백서는 성경적인 방식에 부합하며 확실히 반문화적입니다. 여기서 반문화적이라는 말은 현 시대의 문화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현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신조와 고백서는 우리를 과거와 연결시킴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이 과거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조건 문화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고백서를 믿고 따르는 사람은 동시대의 문화와는 다른 과거와 연결된 반문화적인 문화를 구축해야 합니다.


여덞째, 신조와 신앙고백서는 교회들 간의 관계를 정의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특정 신앙고백과 신조를 따르는 것은 자기 교회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설정할 수 있도록 합니다. 뿐만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그 교회가 공표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게해 줍니다. 이것을 알아야만 새로 그 교회에 가입하려는 사람이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신조를 따르지 않는다는 교회는 자신들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교회들이 그 교회의 정체성과 성격을 판단하기 어렵게 됩니다.


아홉째, 신조와 신앙고백서는 공동체의 연합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현대 사회는 사회적인 배척에 대해 민감합니다. 기독교의 역사가 여기에 일조했다는 불명예를 안고 있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믿음보다는 연합과 소속이 먼저라는 말들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함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믿음과 소속은 대립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교리를 믿는 것이 소속을 낳습니다.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이 분열을 만들고 소속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교회에 소속되기 위한 조건은 성경이 허락하는 한에서 낮게 설정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성경이 요구하는 선에서 배타적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믿지 않는 사람은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없습니다. 신조와 신앙고백서는 소속의 경계를 그어주고 암묵적으로 배척의 경계도 그어줍니다. 교회가 공동체로서의 정체성과 연합의 의미를 가지려면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이 때문에 때로는 스스로 속해 있다고 말하지만 말과 행동은 그렇지 않은 누군가를 추방해야 하는 슬픈 현실을 감내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진정한 소속과 연합은 공동체가 함께 고백하고 예배하는 가운데 기쁨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진술한 것은 진리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면서 진리 안에서 기뻐하는 교회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신조와 신앙고백만이 건겅한 교회를 세우는 유일한 방법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시대 이후 오늘까지 가장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건강한 교회를 위해 선택한 규범입니다. 신조를 부정한 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자란 증거를 역사 속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검증되고 그 효과가 입증된 이 방법 외에 아직까지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교리와 신앙의 내용을 요약해 보았습니다. 1장과 5장은 흐름 상 중요한 내용은 아니기 때문에 제외했습니다. 대체로 번역이 무난하지만 6장의 번역이 좀 매끄럽지 못한 감이 있습니다. 내용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학문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실제적인 유익함을 좀 더 부각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6장에서 언급한 9가지 이외에도 다른 유익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이단을 예방할 수 있다, 신앙의 의문이나 고민에 답할 수 있다, 기독교 진리의 탁월성에 대한 확신을 줄 수 있다 등등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내용이 짜임새 있고 교리 교육에 관한 문제의식을 환기시키거나 교리 교육에 앞선 준비 과정으로서 좋은 입문서가 될 만한 책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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