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서평

교리와 신앙 요약 (3) 초대 교회

이창무 2018. 9. 6.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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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회


성경 시대에서 속사도 시대로 넘어갈 무렵부터 신조와 같은 형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신조들에는 신앙의 내용을 담고 있는 교리적 측면과 구속력 있는 교회의 표준으로서 교회론적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 신앙 규범. 사도들의 죽음으로 교회의 직분의 중요성이 커졌고 아울러 교리에 대한 도전을 방어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이 시대에 대표적인 도전은 가현설, 영지주의, 마르키온주의 등등이었습니다. 이런 도전 앞에서 이그나티우스, 터툴리안, 이레나이우스 같은 교부들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신앙규범을 다양한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아직 형식화된 신조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교회가 믿는 바를 정의하는 교리를 분명하게 요약하고 제시하였습니다. 또한 세례를 받기에 앞서 세례 문답 교육을 통해 믿는 내용을 전수하도록 했습니다. 여기에 신앙 규범이 표준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둘째, 사도신경. 4세기 교회가 동의하고 교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신조의 필요성이 점차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형식화된 신앙 규범을 대표하는 것이 사도 신경입니다. 사도신경은 기독교 신앙 전체의 기본적인 뼈대를 제공해 줍니다. 그 이후로 사도신경은 오늘날까지 기독교 전반에서 예배나 교육 등에서 보편적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셋째, 7대 공의회. 동서방 교회의 분열 이전에 있었던 7대 공의회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개신교에서는 처음 네 개의 회의만을 인정합니다. 이 공의회의 산출물이 ‘니케아 신조’와 ‘칼케돈 신조’라는 중요한 교리 체계입니다. 제 1 차 니케아 공의회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논의 곧 아리우스 논쟁으로 촉발되었습니다. 결국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동일 본질로 결론내리게 되었고 이후의 신학적 논의들의 궁극적인 틀을 설정했습니다. 또한 이 공의회는 교리 진술에 사용하는 용어를 정의해야 할 필요를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회의였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니케아 신조를 채택하였습니다. 니케아 신조에는 하나님께서 세 위격으로 계신다는 점과 성령이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공식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제 1 차 에베소 공의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성과 어떻게 연결되는가가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앞선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간이 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아폴리나리스의 신학을 거부했습니다. 에베소 공회의에서는 인성과 신성의 연합을 약화시키려 했던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정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칼케돈 공의회가 있습니다. 이 회의에서 채택된 칼케돈 신조는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점,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의 연합을 지나치게 강조해 한 본성에 다른 본성을 흡수하거나 혼합해 세 번째 본성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점, 두 본성의 구별을 지나치게 강조해 한 위격 안에서의 연합을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넷째, 아타나시우스 신조. 이름과 달리 이 신조는 아타나시우스를 중심으로 작성된 신조는 아닙니다. 이 신조는 공의회에서 작성된 신조는 아니지만 삼위일체와 기독론의 표준을 잘 다루고 있어 후대에도 중요한 문서로 취급되었습니다. 이 신조는 보편 신앙을 준수하지 않는 자들에게 대한 저주가 담겨 있어 논란이 되어 왔습니다. 이 표현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내용을 보존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 본 고대 신조에서 두드러지는 사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초대 교회에서 신조가 가장 먼저 발달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초대 교회의 신조들이 믿음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곧 모든 신조는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대답이 없이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신조의 가치를 부정하고 성경만 엄수하겠다는 목회자가 있다면 저자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은 것 같습니다. ‘수 세기에 걸쳐 수많은 검증을 거친 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정확하지 않은 답을 스스로 찾으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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