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및 나눔/단상

잘 보이십니까?

이창무 2017. 12. 19.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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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건강검진을 하러 갔는데 시력검사를 했습니다. 다행히 시력은 아직까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주변 제 또래 분들은 대부분 노안이 왔는데 저에겐 아직 안 왔습니다. 하지만 정말 제 눈은 다 괜찮은 것일까요?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눈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들의 얼굴에 달려 있는 육신의 눈입니다. 이 눈으로 외부 세계를 관찰하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과 결정을 내립니다. 그런데 이 육신의 눈은 크기에 아주 민감합니다. 큰 것을 보면 기가 죽고 작은 것을 보면 업신여깁니다. 이것은 거의 본능적인 반응입니다. 그래서 어떤 동물들은 적을 만나면 최대한 자기 몸을 부풀려서 위협을 가하는 행동을 한다고 합니다.


사탄은 바로 이런 인간의 심리를 이용합니다. 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세상을 상징하는 바벨론이라는 성읍이 등장하는데 항상 그 앞에 '큰 성'이라는 말을 덧붙여 '큰 성 바벨론'으로 표현합니다. 이는 세상이 본질적으로 크기에서 나오는 힘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사탄은 골리앗처럼 크기로 위협하고 우리 마음에 두려움을 심습니다. 두려움의 종이 되게 하여서 도전의 의지를 꺾어버립니다. 이렇게 두려움에 빠진 사람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면 얼마나 큰 것들이 많이 볼 수 있습니까? 사장님은 책상도 크고 방도 크고 차도 큽니다. 안 가봤지만 틀림없이 집도 엄청 클 것입니다. 반면 나는 집도 작고 차도 작고 방도 작고 책상도 작고 키도 작습니다. 참 초라해 보입니다. 마음이 위축되어 감히 세상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하기 쉽습니다. 세상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런 크기에 민감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육신의 눈만으로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의 눈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영적인 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영의 렌즈로 시력 교정을 해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눈이 있는 사람은 자기 앞에 놓인 현실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풀어내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보시는 것을 나도 크게 볼 수 있는 눈, 하나님께서 작게 보시는 것을 나도 작게 볼 수 있는 눈. 사무엘상 17장의 다윗에게는 그런 눈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군대는 크게 보이고 골리앗은 작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영적인 눈을 뜰 수 있을까요?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남이 있을 때 영적인 눈을 뜰 수 있습니다. 죽은 하나님을 명목상 붙들고 있는 사람에게는 영적인 현실이 전혀 감지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분노도 없고 세상에 대한 도전도 없습니다. 껍데기만 남은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고 또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사람은 영적인 현실이 생생하게 보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보이기 때문에 도저히 이를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 받는 세상에 대한 부대낌이 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영적인 분노가 일어납니다. 잠잠하게 있으려 해도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모험을 하고 세상에 도전을 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이 그렇습니다. 70여명의 당대 최고 권력자들이 모인 공회 앞에서 그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죽였다. 당장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라.” 사도들이 이렇게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도 예수 그리스도는 크게 보이고 세상 권력자들이 작게 보이는 영적인 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마다 시간차는 있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눈이 침침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시야까지 흐려져서는 정말 곤란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추해집니다. 하지만 영적인 시각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기만 한다면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잘 보일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제 열흘 남짓만 지나면 저도 오십 줄에 들어서게 됩니다. 눈의 건강도 지켜야하겠지만 무엇보다 영적인 시야만큼은 오히려 더 밝아질 수 있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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