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이사야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이창무 2015. 4. 30.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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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여름수양회 초청특강


▣ 말씀/이사야서 55:1-13

▣ 요절/이사야서 55:1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19세기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사람이 충족이라는 단어는 쓸 수 있어도 만족이라는 단어는 쓸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족이라고 느끼는 순간은 잠시 뿐이고 곧이어 다시 목마름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족할 수 있는 딱 한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만족이라고 느끼는 그 순간에 죽어 버리면 된다고 했습니다. 당시 쇼펜하우어를 따르던 독일 젊은이들 중에 여럿이 이 말을 쫓아 실제로 자살을 시도해서 사회 문제가 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잠시 동안의 충족만을 얻을 뿐, 만족이 없다는 그의 지적은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사야서 55장을 몰랐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을 허무와 죽음으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목마른 인생들, 만족을 모르는 인생들을 물과 양식이 풍성한 메시야의 잔치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름수양회를 통해 이 메시야의 잔치를 맛보고 누릴 수 있습니다. 이번 여름수양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적인 목마름이 해소되고 만족과 기쁨이 충만한 은혜의 잔치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하나님께서 목마른 자들과 돈 없는 자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요즘에는 대부분 돈을 주고 물을 사먹습니다. 아니면 집이나 사무실에 있는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먹습니다. 어디를 가나 물이 있어서 목마를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살면서 타는 듯한 갈증을 느껴보신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입니다. 군대에서 여름에 유격 훈련을 받다 보면 얼마나 목이 마른지 모릅니다. 이런 병사들에게 부대에서는 전염병을 예방한답시고 방금 펄펄 끓인 뜨거운 물을 줍니다. 그래도 병사들은 그 뜨거운 물을 입천장을 데어 가면서 벌컥 벌컥 마십니다. 지금 이 자리에 혹시 목마른 분이 계십니까?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밖에 있는 정수기에서 물을 드시고 오셨기 때문에 아마 목마른 분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목마름이 어디 육체의 목마름만 있겠습니까? 70년대 김지하 시인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쳤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이 시에 공감하고 노래를 만들어 불렀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절실하고 근원적인 목마름이 있습니다. 아모스서 8장 11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아무리 물을 많이 마셔도 여전히 느껴지는 갈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기 느껴는 갈증입니다.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영적인 목마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과 교제하고 소통하는 영적인 존재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거스틴은 인간에게는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빈 공간이 있다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 거주할 때는 하나님과 소통하고 교제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제약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영혼은 늘 하나님으로 충만했었습니다. 그의 삶에 만족과 기쁨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이후로 모든 인류는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을 안고 사는 인생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허전해 하고 결핍을 느끼고, 무언가 부족하고 불만족스럽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사람에게 당신의 삶에 만족하느냐고 한 번 물어 보십시오. 대부분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대답을 들으면 배부른 소리 한다고 기분 나빠합니다. 그러나 당사자에게는 결코 배부른 소리가 아닙니다. 아무리 소유가 많아도 인생의 목마름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신대로 이 목마름은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했던 질문을 다시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혹시 목마른 분이 계십니까? 지금 우리 영혼은 하나님으로 충만합니까?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에서 오는 만족으로 흠뻑 젖어 계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도 역시 목마른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측면에서 보면 목마름은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마름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점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고 고백하였고,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목마름을 느낀다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큰 문제는 목마른 것 자체가 아니라, 엉뚱한 곳에서 목마름을 채워 줄 대상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2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사람들은 영적인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없는 헛된 일에 돈을 쓰고 많은 수고를 합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과 같은 우상들에게 많은 돈을 들여 제물을 바치고 공들여 제사를 지냈습니다. 심지어 몰렉 신에게는 자신의 자녀들을 제물로 바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바알과 몰렉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백성들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허깨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런 백성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뼈아픈 지적을 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2:13) 생수의 근원은 버리고 대신 터진 웅덩이라니요?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릅니다.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자신의 목마름을 채워줄 줄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남은 것은 5번의 결혼과 한 번의 동거로 망신창이가 된 삶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이렇게 구했습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4:15) 헛된 추구의 끝에 이제는 지쳐 버린 한 여인의 탄식과도 같은 간구입니다. 이 시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엉뚱한 곳에서 목마름을 채우려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다 소모하고 있습니다. 최근 청소년 사역을 하시는 한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이 말씀하시기를 요즘 학교에서 남학생과 여학생의 전체적인 학력 차이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며 걱정을 하셨습니다. 물론 여학생이 더 잘한다는 뜻입니다. 이 분은 그 원인을 남학생들의 게임 중독에서 찾았습니다. 남학생들이 밤새 게임을 하고 학교에 와서는 잠을 자는데 무슨 수로 여학생들보다 공부를 잘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게임 중독에 빠진 많은 학생들이 귀중한 시간을 헛되게 다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쇼핑 중독에 빠진 주부들, 스포츠 중독에 빠진 남자들, 술에 중독된 직장인들, 음란 동영상에 중독된 청년들, 대상은 다르더라도 무언가 하나씩에는 다 중독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이런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거기에 가짜 만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식품영양학과를 나온 배 웨슬리 선교사님은 제게 이런 말을 해 준 적이 있습니다. "혹시 먹고 싶은 과일 주스가 있니? 나한테 조금만 시간을 주면 딸기든, 수박이든, 사과든, 복숭아든 어떤 종류의 과일이든 똑같은 맛이 나도록 합성향신료를 섞어서 만들어 줄 수 있지. 여기에 설탕만 잔뜩 집어넣으면 사람들은 안 마실 수가 없게 되는 거야." 비슷한 맛이 난다고 100% 사과 주스와 사과가 1%도 안 들어간 사과맛 주스가 같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목이 마르다고 세상이 주는 가짜 생수를 덥석 덥석 받아 마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갈증은 더 심해지지만 이미 중독이 생겨서 끊을 수도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아무런 유익도 참된 만족도 줄 수 없는 허무한 일에 자신의 인생을 다 낭비해 버리고 있는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성경은 이런 목마른 인생들을 위해 긍휼과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잔치를 준비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잔치에는 무엇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1절 하반절에 보면 이 잔치에는 포도주와 젖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 2절 하반절에 보면 좋은 것과 기름진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역삼동 리츠 칼튼 호텔에서 열린 한 결혼식에 초대를 받아 갔다 온 적이 있습니다. 1부 결혼식이 끝나고 2부는 호텔 양식 풀코스가 나왔습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음식이 쉴 새 없이 제 앞에 차려졌습니다. 서울 촌놈이 호텔 요리를 맛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호텔 요리가 이 정도라면 하물며 하나님이 직접 준비하신 잔치는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상한 것 그 이상을 맛보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진수성찬들은 우리 영혼의 빈 공간을 가득 채우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쾌락이 아니라 참된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본문의 3절 하반절부터 5절까지 내용을 보면 이 잔치는 메시아에 의해 온 세상 만민들이 함께 누릴 잔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또 요한복음 7장 37,3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복음을 완성하심과 더불어 메시야의 잔치는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남은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을 잔치로 초대하는 일입니다. 1절을 보면 한글 성경에는 숨어 있어서 찾기가 쉽지 않기만 영어 성경을 보면 'Come! 오라!'는 명령이 무려 네 차례나 반복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뭐가 아쉬워서 이렇게 네 번씩이나 초청을 하시는 것일까요? 아쉬운 건 목마른 인간들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목마른 인생들을 보고 있자니 너무나 안타까우신 나머지 두 팔을 걷어 부치신 채 초청하시고 또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마치 밥 먹기 싫다고 도망 다니는 아이의 뒤를 밥그릇을 들고 쫓아다니며 먹이는 엄마와 같은 심정이 아닐까 합니다. 하나님은 '안 오면 너만 손해란 걸 알랑가몰라' 이렇게 하시면 팔짱만 끼고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보내서 '오라. 오라. 오라. 오라.' 간절하고도 끈질기게 그리스도의 잔치, 복음의 잔치로 모든 목마른 인생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를 이 생명의 잔치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잔치에 올 때 값없이, 돈 없이 오라고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리츠 칼튼 호텔에서 호텔 요리를 먹을 때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정도 수준인 줄 알았으면 축의금을 좀 더 넣었어야 하는데 나중에 혼주가 보고 크게 손해 봤다고 할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최상의 것, 최고의 것을 주시겠다고 하시면서도 그저 빈손으로 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좋은 것을 왜 공짜로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우리가 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일점일획도 빈틈없이 다 지킨 사람이라면 당당히 이 연회에 입장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해 타락하고 부패한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를 대신해서 메시야가 이미 값을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이사야서 53장이 바로 이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4절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최고의 음식이 무한으로 제공되는 메시아의 잔치에 공짜 쿠폰과 함께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 곧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여름 수양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여름 수양회는 목마른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복음의 잔치입니다. 여름 수양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로 인해 목마른 인생들을 위해 준비된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합니다. 말씀 강사님들은 이 더운 여름에 땀을 흘리며 말씀을 준비하느라 수고하고 계십니다. 보건대 형제들이 듀엣 드라마의 부활을 꿈꾸며 예년에 없던 특별한 드라마를 합심하여 보여 드릴 예정입니다. 찬양, 특송, 오케스트라, 페스티발 등등 최고의 잔치를 향해 하나씩 준비되어 가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항상 여름 수양회 때마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듯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해 왔습니다. 특별히 이번 수양회는 기도를 많이 하는 수양회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더욱 더 풍성한 은혜로 채워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지금까지 헛된 것에 중독되어 인생을 낭비하던 사람도 수양회에 오면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메마르고 딱딱한 신앙생활을 해 오던 사람도 수양회에 오면 은혜의 강물에 온 몸을 풍덩 담그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안 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는 말씀을 들고 사람들을 초청하는 일에 힘써야겠습니다. 요절 말씀에 '오라'가 네 번 나왔는데 우리도 적어도 네 번은 초청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초청에 응답할지 거부할지는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목마른 인생들을 초청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가 되었느냐 여부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본받아 끝까지 여름 수양회 초청 역사를 힘써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목마른 인생들에게 오라 하시는 하나님의 초청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첫째로 지금 당장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찾고 불러야 합니다. 그러면 그 때가 언제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곁으로 가까이 오셔서 부르고 계신 바로 지금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은 말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 때에 하나님을 찾지 않고 뒤로 미루면 어떻게 됩니까?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때 늦은 후회를 해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12:1) 여름수양회에 초청을 하다보면 꼭 뒤로 미루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제 양 중 한 명은 7년 동안 사법 시험 공부한다고 수양회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이번에 사시를 접는다고 해서 드디어 가는 줄 알았더니 로스쿨 준비해야 해서 못 간다고 합니다. 늘 이런 식입니다. 다음에는 꼭 가겠다고 하지만 정말로 다음에 오는 사람 별로 못 봤습니다. 왜냐하면 다음이 되면 그 때 또 할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뒤로 미룰 일이 아닙니다. 특히 청년의 때, 대학생 시절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나중에 결혼하고 사회 생활하면서 정신없이 살다보면 지금처럼 좋은 기회를 다시 만나기 어렵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이 좋은 기회를 지금 당장 꽉 붙들어서 이번 수양회에 30명 이상의 학생들이 참석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로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히브리어는 반복을 통해서 강조를 표현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듣고 들으라는 말씀은 반드시 들으라. 꼭 들으라. 하는 뜻입니다. 또 3절에서는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서 할 일은 귀를 기울여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평소에도 말씀을 듣는 것이 필요하지만 때로는 여름수양회처럼 말씀을 집중적으로 듣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번 수양회에는 모두 11편의 메시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11편의 메시지를 듣고 또 듣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어떻게 피곤하게 그 많은 메시지를 다 듣느냐? 하실지 모릅니다. 네, 좀 피곤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과거에 좀 피곤하더라도 메시지를 듣고 나서 괜히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일단 말씀을 들으면 천국 잔치의 맛을 보기 때문에 후회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번 수양회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많은 말씀을 들으며 한 말씀 한 말씀을 집중해서 귀 기울여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회개하고 복음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악인의 길은 행동으로 나타난 죄를 말하고, 불의한 자의 생각은 생각과 마음으로 저지른 죄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떠나 자기 뜻대로 살아 왔던 삶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와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믿고 영접해야 합니다. 8절과 9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고차원의 영역에 속해 있는가를 말해 줍니다. 또한 10절과 11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라도 헛되이 사라지는 법이 없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야 만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하신 그대로 믿고 영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수양회에서는 이와 같이 복음 앞에서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하는 특별한 전통이 있는데 바로 소감쓰기입니다. 그런데 이번 수양회에서는 딱 한번만 소감을 씁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딱 한번 쓰는 대신 깊이 있게 써야 합니다. 저는 우리가 소감을 쓰는 시간을 지성소로 들어가는 시간이라고 비유하고 싶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입니다. 이번 수양회 한편의 소감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깊은 영적 체험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초청에 바르게 응답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한 자들이 받게 될 축복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영혼이 소생하게 됩니다. 3절에 보면 하나님은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시면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납니다. 이미 거듭난 영혼이라 할지라도 스피릿이 없으면 죽은 생선처럼 축 늘어진 생기 없는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메시야의 잔치에서 성령으로 충만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나면 스피릿이 생깁니다. 생기와 활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둘째로 죄사함을 누리게 됩니다.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돌아 온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어떤 잔치에든지 절정의 순간이 있습니다. 결혼식에서는 신랑 신부의 퇴장 순간이고 생일잔치에서는 케이크를 자르는 순간입니다. 메시야의 잔치에서 절정의 순간은 하나님의 긍휼과 죄사함을 체험하는 순간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여름 수양회에서는 참석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고 죄 용서함을 누리는 역사가 늘 풍성하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진실하게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수양회에서도 전체 타이틀처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는 용서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변화된 새 인생을 살게 됩니다. 13절에 보면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가시나무와 찔레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대표합니다. 반면에 잣나무는 기름지고 고소한 열매를 맺는 유용한 나무입니다. 화석류는 뿌리부터 줄기, 이파리, 꽃까지 매혹적인 향기를 발하는 나무입니다.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쓸모없던 사람이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주변 사람들을 가시처럼 찌르고 상처 주던 사람이 수양회를 갔다 오더니 성령의 열매를 맺고 시작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여기에 계신 모든 목자님들이 이와 같은 변화의 증인들이십니다.


학창시절에 저와 같이 훈련을 받던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졸업 후에 모임을 떠나서 연락이 끊어졌다가 20년 만에 페이스북에서 연결이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모 대기업의 영국 지사장으로 근무하며 골프에 빠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연결이 된지 얼마 후에 영국에서 그 친구로부터 국제 전화가 왔습니다. 서로 안부를 묻고 근황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전화 말미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사실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이 바로 지금 너의 삶이다. 니가 너무 부럽다.” 이 말을 하는 친구의 목소리에서 알 수 없는 공허함과 목마름이 느껴졌습니다. 그 친구는 제 페이스북을 보고 또 저화 대화를 하면서 자기에게는 없는 제 속에 있는 내적 충만을 감지했던 것 같습니다. 내로라하는 대기업의 간부로부터 제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다니 목자 생활도 오래하고 볼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청년의 때에 세상 철학에서 헛된 우물을 파다가 지쳐버린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진리의 샘을 파고 기쁨의 생수를 마시게 하셨습니다.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죄사함을 누리며 변화된 새 인생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저를 메시야의 잔치에 초청하시고 목마름을 채우시며 은혜로 제 삶을 온갖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이번 여름 수양회가 목마른 영혼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복음의 잔치, 구원의 잔치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3.7.7.,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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