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부활절

엠마오로 가는 길

이창무 2015. 4. 30.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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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부활절 특강


엠마오로 가는 길


말씀 / 누가복음 24:13-35

요절 / 누가복음 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스티븐 킹이라는 유명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미스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는 미국의 롱레이크라는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합니다. 마을 근처에 주둔하던 군부대가 비밀실험을 하다가 실수로 그만 다른 차원에 있는 괴물들이 불러내는 대참사가 일어납니다. 마을에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자욱한 안개(미스트)가 끼고 안개 속에서 정체불명의 괴생물체들이 튀어나와 사람들을 마구 공격하고 죽입니다. 주인공 데이빗은 가까스로 아들과 함께 차에 올라 타 탈출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차에 기름이 떨어지고 맙니다. 절망한 주인공은 권총으로 아들을 먼저 죽인 후 자신도 동반자살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안개가 걷히면서 엄청나게 많은 해병대 병력이 장갑차와 함께 마을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때의 망연자실한 아버지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아버지는 왜 아들을 잃게 되었습니까? 그가 안개 속에서 믿음과 희망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불신이란 안개 속에서 믿음과 희망을 잃고 방황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안개를 뚫고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부활절 날에 마음 속 불신의 안개가 걷히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3절과 14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 날은 안식 후 첫 날이었습니다. 이 날은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이었습니다. 이 날은 승리의 날이요 위대한 영광의 날이요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사람들은 부활절이 되면 부활절 달걀을 먹기도 하고 카드를 주고받기도 하고 대포를 쏘기도 하며 요란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합니다. 그런데 일 년에 한 번인 부활절 외에 일주일에 한 번씩 작은 부활절이 있다는 사실도 아십니까? 주일이 바로 그날입니다. 주일은 초대 교회 때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매 주일 예배 때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감사와 기쁨의 축제를 벌이는 것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여 춤추고 찬양해야 하는 이날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짐을 챙겨 센터를 빠져 나온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채 슬픔과 절망과 낙심 속에 엠마오로 낙향하던 글로바와 또 다른 한 제자였습니다. 두 제자는 엠마오를 향해 길을 걸으며 최근 예루살렘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토론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까? 예수님은 정말 부활하셨을까?' 이런 주제를 가지고 열 띤 토론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토론을 해 봐도 결론은 없고 제자리만 맴돌 뿐이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두 제자 곁으로 다가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과연 누구일까요? 1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두 제자 곁으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느새 엠마오로 가는 길 위의 두 제자 곁으로 와 계셨습니다. 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 둘을 찾아 오셨겠습니까? 부활 신앙이 없는 제자들을 도와주시고 붙들어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사실 이 두 제자는 그렇게 유명한 제자는 아닙니다. 열두 제자 그룹에 끼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똑같이 소중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들은 믿음이 없어 낙향했으니 이제 더 이상 제자 자격이 없어' 하시면서 잘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낙향하던 엠마오행 기차 옆 좌석을 끊고 심방 오셔서 내내 함께 가시며 회복을 도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까지 40일 동안 무엇을 하셨는가 하면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심방 가셔서 인격적 대화를 통해 부활 신앙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렇게 회복된 제자들이 하나둘씩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을 받고 초대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저도 그동안 믿음이 없어서 엠마오에 갔다가 예수님께 붙들려 온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저만 갔다 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믿음의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낙향하고 드러누울 때도 종종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서라면 이럴 때 가차 없이 잘라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찾아오시고 대화하시고 믿음의 한계를 극복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얼마 전 선교 보고하신 안요셉 선교사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현재 관악5부의 정아브라함 목자님이 이 분의 양이었을 때 힘들어져서 고향인 광주로 낙향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안요셉 선교사님이 아브라함 목자님 집이 무등산 근처에서 수박밭을 한다는 사실만 알고 심방을 가셨습니다. 무등산에는 수박밭이 한두군데가 아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집을 찾아 내 함께 올라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 목자님이 아버지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님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님이 아들에게 어서 목자님과 함께 올라가라고 흔쾌히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얼마나 너를 아끼는 사람이면 여기까지 너를 찾아왔겠느냐 하시며 허락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목자의 심정이 불교 신자인 아버지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방으로 회복되고 살아난 우리들도 이제 어떤 삶을 살아야겠습니까? 우리도 심방을 열심히 다녀야 되겠습니다. 우리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찾아가서 함께 하며 믿음을 심는 목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이다음에 어떤 장면을 기대하십니까? 두 제자가 예수님을 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그 즉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회복이란 것이 그렇게 쉽고 간단히 이루어지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제자가 자기 스승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예수님이 선글라스를 끼시고 변장이라도 하신 것일까요? 성경은 그 원인이 그들의 눈이 가리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에 의해 가리어졌을까요? 바로 제자의 불신이었습니다. 비상금은 눈에 잘 띄는 곳에 넣어두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내들이 '설마 이런 곳에 비상금을 숨겼겠어?' 하면서 잘 뒤지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들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믿는 대로 보는 법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보면서도 보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 나셔서 지금 자기 곁에 계실 리가 없다는 불신의 눈으로 보니까 예수님을 코앞에 두고도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은 "나야 나! 예수란 말이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어떻게 나를 몰라보느냐?" 하시며 꿀밤을 한 대씩 먹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시치미를 뚝 떼시고 예수님이 아닌 척하셨습니다. 십자가 사건도 전혀 모르는 척하셨습니다. 알고 보니 예수님은 연기의 달인이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곧바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셨을까요? 이는 제자들 마음속에 과연 어떤 장애물이 부활 신앙에 이르는 길을 가로 막고 있는지 들어 보시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조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문제를 깊이 이해하시고 차근차근 해결해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종종 목자들이 너무 성급할 때가 있습니다. 양이 문제를 가지고 찾아오면 무조건 정답부터 주려고 합니다. "너는 주권 신앙이 없는 것이 문제야. 말씀 읽고 기도해 봐" 물론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말이 될 때가 많습니다. 노련한 목자는 답을 알아도 답부터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양들의 말을 듣고자 합니다. 그리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가끔 신기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목자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양이 자기가 말을 하다가 스스로 깨닫고 문제가 해결되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아! 제 문제는 주권 신앙이 없는 것이 문제였군요. 기도실 가서 기도부터 해야겠어요." 목자가 인내심을 가지고 잘 듣다가 결정적으로 한 말씀을 심을 때 오히려 그 한 말씀이 역사합니다.


제자들도 스스로 자신들의 속내를 다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17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아직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제자들은 벌써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얼어붙어 버렸습니다. 우울증과 마비 증상입니다. 멘탈이 붕괴되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들입니다. 왜 그들이 이런 멘붕 상태에 빠지게 된 것입니까? 19절부터 24절까지 제자들의 말을 통해 그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역사 상 정말 오래 만에 나타나신 말씀과 사역 모든 면에서 탁월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을 속량한다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독립과 해방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600년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 가슴 속에 맺힌 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한을 풀어 줄 유일한 대상으로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그만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에게 사형 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기대와 소망이 연기처럼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 버리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마저 저렇게 가셨으니 이제 이스라엘의 해방은 다 물 건너가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은 울고 또 울어도 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밥맛도 잃고 삶의 의욕도 잃고 희망도 잃고 꿈도 잃어버렸습니다. 남은 것은 엠마오에 있는 고향집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이 말씀의 원문은 '오'라는 감탄사로 시작합니다. '오! 불쌍하구나. 오! 안타깝구나.' 하는 탄식의 의미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미련하다는 말은 잘 깨닫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교육학자인 피아제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스키마라고 부르는 생각의 틀이 없으면 잘 깨닫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담을 수 있는 생각의 틀 자체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은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절망할 때는 별 것도 아닌 일 가지고서 빛의 속도로 절망 모드로 들어가면서도, 믿음을 가져야 할 때는 별 짓을 다 해도 달팽이 기는 속도로 믿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부활을 믿을 수 있을까요? 26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메시야관을 바로 잡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바른 메시야관, 성경적 메시야관은 무엇입니까?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가졌던 메시야관은 무엇일까요? 영광에서 시작해서 영광으로 끝나는 오직 영광의 그리스도였습니다. 고난당하는 메시야는 생각하기조차 싫은 주제였습니다. 이런 메시야관을 가진 제자들에게 십자가 사건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여기서 딱 걸려 멈추어 버린 제자들은 다음 주제인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로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김건아 목자님은 모태신앙에다가 나름 교회에 다닌지 20년이 넘습니다. 그런데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에 관한 말씀은 UBF 와서 처음 들어 봤다고 하였습니다. 충격적입니다. 교인이고 신자라고 하면서도 오직 영광의 그리스도만 바랄 뿐이지 고난의 그리스도에는 아예 눈을 감아 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자 되고 성공하고 출세하고자 하는 자신들의 욕망이 투사된 그리스도를 믿지 성경 속의 그리스도를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그리스도는 고난 받고 영광에 들어가시는 그리스도,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0절과 1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먼저 고난에 참여해야 합니다. 영광스럽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먼저 죽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의 비뚤어진 메시야관을 바로 잡기 위해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 공부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성경은 물론 구약 성경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구약 성경을 자기에 관한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메시야가 고난을 받고 그 후에 영광에 들어가실 것이 예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경을 자세히 풀어 설명하시면서 그들이 말씀에 눈을 뜨도록 도와주셨습니다. 32절에 보면 이때 제자들 속에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말씀과 함께 믿음의 씨가 뿌려져 싹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성경 공부를 해야겠습니다. 2012년 11월 28일에 UBF의 성경 공부가 국민일보가 만든 제 1 회 교육 브랜드 대상을 받은 사실은 아마 들어서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제가 UBF 목자인 줄 알게 된 한 신학 대학원생이 저에게 성경 공부를 해 달라고 계속 조르고 있습니다. 우리 모임의 성경 공부가 얼마나 좋은지는 이제는 밖에서도 알아주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익숙해서 그런지 시큰둥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성경 공부에 사활을 걸고 있는데 성경 공부가 죽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원래 성경 공부를 하면 마음이 뜨거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뒤집어 지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만약 성경 공부를 했는데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제대로 성경 공부를 안 했다는 뜻입니다. 그냥 했다는데 의의를 두고 대충했거나, 삼천포로 빠져서 성경과 관계없는 이야기만 잔뜩 했거나, 소감 쓰기를 통한 말씀 묵상과 적용을 게을리 했을 경우입니다. 성경 공부는 반드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야 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기도와 함께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뜨거워질 때까지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두 겹 세 겹으로 가리어진 우리 영적 눈이 떠지지 않습니다. 부활과 영생의 세계를 맛보고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매주 하는 성경 공부가 마음에 불이 타오르는 성경 공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성경 공부를 하면서 길을 걷다 보니 일행은 어느새 목적했던 엠마오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예수님은 엠마오 마을을 지나쳐 더 가시려는 듯 제자들에게 작별을 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자들의 마음을 떠보려 하시는 예수님의 페인트 모션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강권하여 붙들었습니다. 겉으로는 날이 저물었다는 핑계를 대지만 진짜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의 성경 공부를 통해 말씀의 맛을 보고 나니 말씀에 대한 강렬한 소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못 이기시는 척 하시며 제자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엇을 하셨습니까? 30절을 보십시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이 장면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을 때 또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베푸실 때 같은 장면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소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실 때에도 항상 이렇게 제자들을 섬겨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애정을 그득 담은 눈길로 바라보시며 빵을 찢어 한 사람 한 사람 제자들의 입에 직접 넣어주셨었습니다. 제자들에겐 다른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었던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인자하시고 자비로운 모습은 그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결코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이제는 그 모습을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습니다. 한 때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묻어 두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그 모습이 제자들의 눈앞에서 똑같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어제의 그 모습과 오늘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제자들의 마음속에 강한 스파크가 일어났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제야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드디어 불신의 장막이 걷혔습니다. 제자들을 홀로 남겨 두시고 떠나신 줄 알았던 예수님이 거기 계셨습니다. 죽음에 의해 빼앗겨 버린 줄 알았던 예수님이 거기 계셨습니다. 악의 권세에 의해 패배하신 줄 알았던 예수님이 당당한 승리자의 모습으로 거기 계셨습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도 하늘의 어떤 권세도 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관계를 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모습으로 제자들과 친밀하고도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시길 원하고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우리와도 인격적이고 친밀한 교제를 누리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 동안 부활절하면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의 믿음과 스피릿을 중점적으로 배웠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그래서 이런 투쟁 일변도의 비장감이 흐르는 부활절을 맞이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부활절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 그 따뜻하심과 온유하심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계시록은 부활하신 주님이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전해 줍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물론 예수님은 승천하셨기 때문에 부활하신 육체의 몸으로 지금 우리와 교제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여전히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믿음을 잃고 낙심하고 지쳐 있던 우리를 도우시고 새롭게 해 주십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교제는 어떤 식으로 누릴 수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방편들 즉 예배와 기도와 찬양과 성찬식을 통해 누릴 수 있습니다. 성경 공부도 하고 또 수요 찬양 기도회 같은 모임에 나와서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님과 교제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책망하시고 위로하시고 도와주시는 분이심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두 제자에게 일어났던 것과 동일한 은혜가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33절을 보면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몇 시간을 걸어 방금 엠마오에 도착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제자들 말대로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왔던 길을 되돌아 밤길을 걸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의 목격자이자 산 증인으로서 이를 전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너무나 놀라운 소식이라서 누구든지 이를 믿으면 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가장 복된 소식인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반드시 주님의 명령이라서 부활의 증인이 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부활이 너무나 감격적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부활의 증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의 두 제자는 처음에는 슬픔과 절망과 혼돈 속에서 사명도 공동체도 다 버리고 엠마오로 낙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두 제자는 기쁨과 희망과 확신 속에서 사명과 공동체를 회복하였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복음이 임하는 곳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이며 축복입니다. 이제 우리도 사망 권세에 사로 잡혀 슬퍼하고 절망하고 혼란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들이 섬기는 캠퍼스에 우리들의 증거를 통해서 기쁨과 희망과 확신이 가득 찬 봄과 같은 그리스도의 계절이 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많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을 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이후 예수님은 이상하게 큰 이적들을 별로 보여주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제자들과 대화하시고 떡을 떼시고 교제를 나누시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셨습니다. 이번 부활절이 우리에게도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있는 부활절, 상한 심령이 회복되는 부활절, 그런 부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찾아 오셨던 그 주님께서 이제 우리를 찾아 오셔서 우리 인생길에 동행하시며 우리의 믿음 없음을 도우십니다. 두 제자에게 성경을 자세히 풀어 설명해 주셨던 그 주님께서 이제 우리에게도 진리의 성령을 보내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마음을 뜨겁게 하십니다. 두 제자에게 떡을 떼어 나누어 주셨던 그 주님께서 이제 우리에게도 들어 오셔서 친밀한 교제를 나누길 원하십니다. 어제께나 오늘이나 영원 무궁히 한결같이 우리를 섬겨주시고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와 경배와 찬송을 올려 드립니다. 아멘. 


(2013.3.31.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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