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부활절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

이창무 2022. 4. 16.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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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성금요일 예배 / 이창무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

말씀 / 고린도전서 1:18-25
요절 /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했을 때 그를 따르던 이들이 얼마나 당혹스럽고 충격을 받았을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라고 확신했던 그 분이 십자가에 처형당한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에 받은 제자들은 충격은 초대 교회 역사에서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바울도 그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23)”

여기에서는 세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이고 다음은 이방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거리끼는 것이라는 단어의 헬라어가 스캔달로스입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스캔들이라는 말이 여기서 왔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스캔들 곧 추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이 보기에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의 시체로 인해서 땅이 더렵혀지지 않도록 일정 시간 나무 위에 달아 놓도록 한 신명기 율법이 그 근거였습니다.

반면 이방인의 눈에 십자가에 처형당한다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바보 같은 짓이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는 로마가 제국에 저항한 반국가 사범을 본보기로 잔혹하게 죽이는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로마의 군사력은 주변의 여러 나라를 초토화시킬 정도로 강력했습니다. 로마를 대항해서 승리할 가능성은 제로였습니다. 게다가 로마는 당대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국가였습니다. 이런 로마 체제에 도전하다가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하는 것은 정말 미련한 일, 바보 같은 짓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그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24)”

놀라운 발언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주받은 인생 실패의 본보기인 십자가의 예수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라고 외치는 바울을 지지할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바울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바울은 먼저 세상이 말하는 지혜의 본질을 설명합니다. 유대인들도 지혜를 말하고 헬라인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헬라인에게서 출발한 철학이라는 말 자체를 지혜를 사랑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지혜가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 미련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과연 그 지혜가 옳으냐 따져 물은 뒤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이런 평가를 내립니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19)”

20절에서는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으며 선비가 어디 있으며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여기에 열거된 사람들은 그 사회를 대표하는, 요즘 말로 하면 오피니언 리더들입니다. 교수, 변호사, 평론가, 인터넷 논객, 인플루언서 등등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그들은 참 좋은 말을 많이 합니다. 세상을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도 있고 공감과 수긍이 가는 제안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 의해서 우리 삶이 얼마나 새로워졌습니까? 분명 나아진 부분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제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사람들의 지혜가 우리 삶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이것이 사람이 가진 실존적인 한계입니다. 선의를 가지고 한 일도 그것이 어떤 결과를 맺을지 예상 못합니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서 광부들의 고된 노동과 위험을 줄여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다이너마이트 때문에 엄청난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례들을 찾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지혜를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헬라인과 달리 종교적인 성향이 강한 유대인은 지혜 대신 표적을 추구했습니다. 많은 표적이 구약에 나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만나와 메추라기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런 기적들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것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의 능력과 지혜에 한계가 있지만 하늘이 도와주시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꿈이 현실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눈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너무나 무기력한 것입니다. 패배의 상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향해 아니다 라고 단언합니다. 구원받을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십자가만이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늘 시달려 온 고질적인 문제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전쟁, 기아, 살인, 폭력, 학대, 가난, 압제 등등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보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습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문제의 근본 원인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혜로 기술을 발전하면 미움과 욕심이라는 죄에 사로잡힌 인간은 그 발전된 기술로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들어 수많은 생명을 죽입니다. 인류는 이미 전 세계인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농업 생산력을 갖추고 있지만 탐욕이라는 죄 때문에 여전히 지구촌 곳곳에서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혜나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죄가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는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수도사 시절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는 인정을 받기 위해 수많은 고행을 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로마에 있는 빌라도의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었습니다. 루터의 무릎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고행으로도 그는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연구를 통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을 발견한 후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게 된 후에야 비로서 그는 지긋지긋한 죄의식과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 죄로 인해 파괴된 삶을 회복할 수 있는 능력, 죄를 이기고 선을 행할 수 있게 하는 능력,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플레밍 러틀리지라는 미국의 저명한 설교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스텔스 폭격기이다” 스텔스 폭격기는 적의 레이다에 잡히지 않고 은밀하게 침투해서 무차별 폭격을 가할 수 있습니다. 이 스텔스 폭격기처럼 십자가는 세상의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미련한 것이거나 거치는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세상 속으로 은밀히 잠입해서 가는 곳마다 용서의 폭탄, 은혜의 폭탄, 사랑의 폭탄을 쾅쾅 터트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폭탄에 맞아 용서를 맛보고, 은혜에 녹았고, 사랑에 항복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21)”

다만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전할 뿐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다고 여기는 세상에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 역시 미련한 짓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미련한 전도가 구원의 방편이라는 것 역시 십자가의 신비 중 하나입니다. 우리에게는 전도가 우리가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번 봄학기부터 매주 꾸준히 전도를 나가고 있습니다. 냉랭한 캠퍼스 분위기를 보면 참 미련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파하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십자가라는 스텔스 폭격기에서 세상에 떨구는 용서와 은혜와 사랑을 실어 나르는 도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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