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부활절 특강 / 이창무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 / 누가복음 7:11-17
요절 / 누가복음 7: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것, 없어서는 안 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위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에는 슬픈 일, 절망스러운 일, 괴로운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로 없이 어떻게 이 모든 일들을 견디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와 동시에 세상에 위로만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상대방이 위로를 받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있고, 위로를 주려다 도리어 상처를 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위로하고 싶지만 위로하기를 너무 어려워 하면서 동시에 위로 받고 싶은 우리를 향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3,4)”
오늘 우리가 듣게 될 부활절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하나님의 위로로 서로를 위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11,12)”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성의 성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 유달리 슬픔이 가득해 보이는 한 장례행렬과 마주치게 됩니다. 죽은 사람은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모든 죽음이 다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이보다 더 안타까운 죽음이 또 있을까요? 과부에게 외아들은 삶의 전부요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이런 아들을 잃은 과부의 슬픔을 누가 감히 헤아려줄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 신약학자 윌리엄 바클레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는 이 꾸밈없는 간단한 문장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세상의 슬픔이 나타나 있다.
죽음은 정말 잔인한 약탈자입니다. 죽음은 사람의 형편과 사정을 봐주지 않습니다. 남편 없이 홀로 남은 과부의 유일한 아들이라고 봐주지 않습니다. 인정사정 없이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가 버립니다. 이 사람을 꼭 그렇게 데려가야 했느냐고 아무리 악을 써보아도 죽음은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갑자기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모든 것을 앗아 갑니다. 이런 죽음의 횡포 앞에 우리 인간들은 무기력하기만 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저 목놓아 통곡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슬픔의 행렬을 맞이한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13a)”
여기서 쓰인 “불쌍히 여기다”라는 동사의 어원은 사람의 배 속에 있는 오장육부를 가리키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우리 말에 애간장이 탄다,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런 표현이야말로 현재 과부가 겪고 있는 고통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런데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도 이 과부와 똑같이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아픔, 애간장이 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고통을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죽음에 매여 종 노릇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을 동정하시고 함께 아파하시는 분이십니다.
교도소에 갇힌 중범죄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오즈”라는 미드가 있습니다. 이 드라마에 보면 엉망진창으로 살다가 교도소에 들어온 젊은 죄수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기 시작합니다. 이유를 알고 보니 밖에 있는 부인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그를 교도소 전담 신부가 여러모로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며칠이 못 되어 병으로 죽고 맙니다. 이때 죄수가 신부에게 절규하며 묻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요? 내 아들이 죽을 때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셨나요?” 이때 신부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보게, 하나님도 자신의 아들이 죽어가는 그 현장에 계셨다네.” 죽음 앞에서 우리도 ”내 이 쓰라린 슬픔과 고통을 누가 알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가?” 묻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오늘 말씀은 이런 답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곳에 계신다. 십자가에 달리신 채 우리의 고난의 현장에, 눈물의 현장에, 질병과 죽음의 현장 속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곳에서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경험하고 계시다”
둘째, 예수님은 과부에게 울지 말라 하셨습니다.
“울지 말라 하시고(13b)”
“울지 말라”니요? 누가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오히려 정반대의 말일 것입니다. “우세요. 마음껏 우세요. 응어리가 다 풀릴 때까지 울고 또 우세요.” 그러면서 나도 같이 따라 우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입니다. “울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책임지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하실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과부에게 “울지 말라” 명하실 수 있었던 근거는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메시아이시기 때문입니다. 죽음 문제의 원천은 죄 문제입니다. 만약 이 땅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질병이나 사망이 없고 장례식도 없고 상실의 고통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류는 흙에서 태어나 죽어 흙으로 돌아갈 운명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은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심으로 죄의 저주와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로 죄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죽음이 우리를 옭아맬 수 없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신 후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견딜 수 있으셨을까?’ 그 답 중에는 이날 과부가 흘렸던 눈물에 대한 기억이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내 자녀들아! 이제 더 이상 죽음으로 인해 슬피 울지 말라. 내가 너희의 죄를 대신 가져감으로 죽음을 이기었노라.”
셋째, 예수님은 죽은 청년을 일으키셨습니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14,15)”
죽은 자의 관에 손을 대는 것은 율법에 금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행렬을 멈추기 위해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청년은 한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원기가 왕성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관 위에 누워 있습니다. 전혀 청년답지 못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청년이 청년답게 살도록 그를 말씀으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러자 정말 말씀대로 죽었던 청년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난 그 청년을 어머니의 품으로 돌려주셨습니다. 죽음으로 끊어졌던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야구선수 요기 베라가 남긴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이 말을 이렇게 고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끝났어도 끝난 것이 아니다” 말이 안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의 주님, 생명의 주님이 계신 한 말이 됩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권능의 말씀이 있는 한 말이 됩니다. 우리 주님은 다 끝난 것 같은 상황에서 얼마든지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분이십니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우리를 생명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엄청난 일을 말씀 한 마디로 능히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코로나를 비롯해 암, 뇌졸증, 심근경색, 우울증 공황 장애 등 온갖 질병으로 고통 받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죽음이 우리의 소중한 사람을 데려가는 아픔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죄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속량하신 주님께서 모든 질병과 죽음에서부터 해방되는 날이 오게 하실 것입니다. 그날에 주 안에 잠자던 모든 이들에게 일어나라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했던 그들을 우리 품으로 되돌려 주실 것입니다.
이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큰 선지자를 보내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말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의 말처럼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린 자녀를 돌보던 부모는 문득 이런 질문을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그럼 나는 누가 돌봐주나?” 연로한 부모님을 돌보던 자녀는 문득 이런 질문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럼 나는 누가 돌봐주나?” 양을 돌보던 목자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럼 나는 누가 돌봐주나?” 누구이긴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돌아보지 않으신 것 같다. 사랑이 없으신 것 같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아플 때 함께 아파하시는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내가 다 책임 질테니 울지 말라 하시는 분이십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죽음을 이기시고 만유를 회복하실 분이십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보내시어 구속을 완성하시고 성령 안에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돌보고 계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매일매일 우리가 만나는 한계와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가 말씀의 권능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 있는 부활의 생명력을 누리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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