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부활절 특강 제 1 강
마른 뼈들을 큰 군대로
말씀 : 에스겔 37:1-14
요절 : 에스겔 37:10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지난 겨울은 유난히 길었습니다. 3월 내내 꽃샘추위로 인해 한동안 우리 몸과 마음도 움츠려 들었습니다. 얼마 전 때 아닌 기습적인 폭설까지 내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자세히 보면 겨우내 말랐던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움이 트고 꽃이 필 준비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산 너머 남쪽에서는 얼었던 우리의 몸과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한 따뜻한 봄바람이 북상할 채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겨울은 다가오는 봄을 막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죽음도 결코 부활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올 봄에는 물 오른 나무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영혼이 부활의 눈을 뜨고 꽃을 피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훈훈한 봄바람처럼 불어 와 죽음의 깊은 잠에 빠진 영혼들을 깨우고 되살아나게 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환상 중에 한 골짜기로 데려가셨습니다. 거기에는 죽은 사람의 뼈가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그 뼈 가운데로 두루 지나다니게 하셨습니다. 그가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라 있었습니다(2). 골짜기에는 갈비뼈, 등뼈, 해골뼈, 통뼈 등등 각종 뼈들이 뒤엉켜 있었습니다. 말라서 구멍이 숭숭 뚫리고 하얗게 변해 버린 뼈들은 그 뼈들의 원래 주인이 이미 죽은 지 오래 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해골마다 시커멓게 뚫려 있는 커다란 두 개의 눈구멍은 마치 지옥의 입구처럼 으스스해 보였습니다. 그 골짜기는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무서운 적막감만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이 골짜기는 죽음의 골짜기요, 절망과 어두움의 골짜기요, 사망권세가 깊게 드리워진 골짜기였습니다.
하나님은 왜 에스겔을 그 골짜기로 데리고 가셔서 마치 납량 특집에나 나올듯한 이런 무시무시한 장면을 보여 주셨을까요? 귀신이 산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셨을까요? 이는 현재의 이스라엘 형편이 얼마나 절망적인가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1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 뼈들이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말하기를 '우리의 뼈들은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조국 이스라엘은 멸망하였고, 자신들은 이방에 포로로 잡혀 와 절망 가운데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포로 시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망적인 심정은 시편 137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면서 울었도다. 그 강변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 두었더니, 우리를 사로잡아 온 자들이 거기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고, 우리를 억압한 자들이 저희들 흥을 돋우어 주기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저희들을 위해 불러 보라고 하는구나. 우리가 어찌 남의 나라 땅에서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표준 새번역) 그들은 바벨론 강변에 앉아 과거 시온에서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기며, 기쁨으로 찬양하던 날을 그리워하며 울었습니다. 또한 그 영광의 성읍을 훼파 당하게 만든 자신들의 죄악을 인해 울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을 지도 몰랐습니다. 바벨론이라는 이 거대한 제국은 날이 갈수록 번영하며 결코 멸망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반면 한번 망해버린 예루살렘은 다시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는 살과 힘줄이 다 썩어 버려서 죽은 송장만도 못한 마른 뼈들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런 형편을 알려주심으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지도록 하셨습니다. 의사가 암과 같은 치명적인 질병으로 죽어 가고 있는 환자의 심각한 상태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제대로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목자가 양들의 영적인 상태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으면 양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오늘날 캠퍼스의 학생들을 보십시오. 마른 뼈로 보이십니까? 아닙니다. 다들 얼마나 생기발랄합니까? 키도 크고 몸매도 좋고 잘 입고 얼마나 예쁘고 잘 생겼는지 모릅니다. 이런 양들 앞에 서면 어떨 때는 오히려 우리들이 초라하고 찌질해 보이기조차 합니다. 양들이 큰 군대 같고, 우리가 마른 뼈 같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다가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은 구원 받기 전의 인간의 상태를 "허물과 죄로 죽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Total Depravity)했고 전적으로 무능력한 상태(Total Inability)에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 몸에 엑스레이를 쏘면 뼈의 모습을 볼 수 있듯이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보면 앙상한 마른 뼈와 같은 양들의 영적인 상태가 보입니다. 얼마 전 고대 경영학과 3학년인 김 예슬 양이 후문 앞에 대자보를 붙이고 학교를 자퇴하겠다는 선언을 해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다음은 그 대자보 내용 중 일부입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나를 채찍질 해 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大學'없는 대학에서,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었다. 우정도 낭만도 사제 간의 믿음도 찾을 수 없었다. 가장 순수한 시절 불의에 대한 저항도 꿈꿀 수 없었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이 글에 대해 반대 의견들도 있었지만 훨씬 더 많은 학생들이 '나도 같은 마음'이라면서 호응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심장이 뛰지 않는다.' 즉 '나는 죽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죽음의 그림자가 대학 캠퍼스를 덮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루 다니며 오래 된 마른 뼈들이 널브러져 있는 저 캠퍼스의 현실을 직시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공대에도 있고 문과대 시계탑 건물 속에도 젊은이들의 뼈가 오랜 세월 희망을 잃고 널브러져 쌓여있습니다. 요즘 잘나간다는 경영대 골짜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김 예슬 양이 바로 그런 경영대의 대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죄로 인해 고통하고 울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죽음 권세에 사로잡힌 채 아무 희망도 없이 출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 모습이 보이십니까?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형편을 알게 된 에스겔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했을까요? 마른 뼈와 같이 되어버린 동족들로 인해 그의 심정은 가눌 길 없는 아픔과 슬픔, 안타까움으로 저미어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에스겔에게 물으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이 참담한 현실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에스겔을 향해 하나님은 물으셨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이 말씀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소망이 없게 된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될 수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 속에는 마른 뼈들을 다시 살리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소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질문을 통해 하나님은 에스겔의 마음에 마른 뼈들을 살릴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심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회복의 역사를 이루시면서 먼저 하나님의 종에게 회복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종의 마음에 회복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없으면 하나님은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불신과 절망이 가득 찬 종들을 통해서는 결코 일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소망이 다 사라지고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새 역사를 이루시는 희망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말라 비뚤어진 뼈, 멸절된 뼈들이라 할지라도 다시 생명의 역사를 이루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부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물음에 대해 에스겔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3b절을 보십시오.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말라버린 뼈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단 말입니까?“ 펄쩍 뛰면서 당치도 않는 소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에스겔이 그렇게 대답했다면 사가랴처럼 벙어리가 되거나 뼈다귀로 한 대 맞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부정적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마른 뼈와 같은 백성들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희망을 가지고 계심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시면 능히 그 일을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일을 이루실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대답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생명 구원 역사를 계획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또 그 계획대로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만 믿음만을 원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도 물으십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안암 1부의 목자들이여! 고대와 교대, 성신여대와 철도대, 이 캠퍼스가 능히 살아 나겠느냐?"
에스겔의 대답을 들으신 하나님은 그에게 무슨 명령을 하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 모든 마른 뼈들을 향해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귀도 없는 해골바가지를 앞에 두고 말씀을 전하라니요! 이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딱 미친 놈으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우리 선교사님들이 해외로 나가셔서 주일예배를 볼 때 양이 한 명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간혹 화분을 앞에 놓고 말씀을 전하기도 하십니다. 그래도 꽃이 있는 화분에 말씀을 전하는 것은 보는 즐거움이라도 있습니다. 뼈들 앞에서 말씀을 전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뼈들은 어떻습니까? 무표정, 무반응, 무감동입니다. 이메일을 보내도 문자를 보내도 씹어 버립니다. 심방을 가도 바람만 맞습니다. 아무리 침을 튀기며 열을 내며 열정적으로 메시지를 전해도 그저 썰렁할 뿐입니다. 맥이 빠지고 입만 아픕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절망적인 골짜기에서 절망적인 몸부림을 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말라 비틀어져 버린 마른 뼈라도 하나님께서 하신다 하는 것을 믿고 대언하는 자에게 마른 뼈가 살아나는 이적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희망의 역사는 그 말씀을 대언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에스겔이 대언할 여호와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5절과 6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은 마른 뼈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생기를 두어 살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을 좇아 그대로 대언했습니다. 그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수년 동안 말 한마디 없이 죽음의 침묵만을 지켜왔던 뼈들에게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뼈들이 꿈틀꿈틀거리며 기지개를 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기저기 널려있던 뼈들이 제 위치를 찾아 전후 좌우 상하로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이 뼈, 저 뼈, 갈비뼈, 골반 뼈, 척추 뼈, 해골 뼈들이 서로 연락하여 골격을 이루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신기해서 에스겔이 더욱 자세히 보니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 뼈 위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도 덮이기 시작했습니다. 마른 뼈들이 사람의 형상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을 때 마른 뼈들이 살아 나서 사람의 형상이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의 중요성을 배우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독립운동이나 무장 투쟁을 통해서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함으로서 시작되었고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말씀의 종의 역할은 어떻게 보면 언제나 미미하게 보입니다. 독립운동이나 정치 활동에 비하면 소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에스겔도 이스라엘의 참담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일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위대한 일이 일어나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에게 그 희망과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이스라엘의 회복은 어떤 독립운동가나 정치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하나님의 종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바벨론 포로 시절에 다니엘과 예레미야와 에스겔과 같은 하나님의 종들에 의해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말씀을 전파하여 잠자던 백성들을 일깨우시고 남는 자들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남은 자들인 에스라와 느헤미야와 같은 말씀의 종들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회복역사는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말라기 시대와 같이 말씀의 종들이 부패하고 타락하였을 때 이스라엘은 깊은 잠에 빠지고 다시 마른 뼈와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심으로 마른 뼈와 같았던 이스라엘이 큰 군대로 일어나 복음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교회사를 볼 때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대언하는 말씀의 종이 있었을 때 그 시대는 소망이 있었고 교회가 살아 났습니다. 18세기 미국은 초기 청교도들의 영향력이 점점 퇴조하면서 영적 안일에 깊숙이 빠져 들고 있을 때였습니다. 대륙으로부터 계몽주의 사상이 들어 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등 반 기독교 풍조가 만연해졌습니다. 종교적 무지와 함께 대학 교회들도 거의 몰락했습니다. 이때 조나단 에드워드와 조지 휫필드 같은 위대한 말씀의 종이 나와서 미국에 제 1 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고 놀라운 부흥과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인디언 선교가 본격 시작되었고 반노예제 운동도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때에 유수의 대학들이 세워졌습니다. 18세기 영국 역시 청도교주의의 경건함을 잃어버리고 사회가 급속히 타락하여 부정부패, 방탕, 술취함, 도박이 곳곳에 만연하였습니다. 이신론과 회의론에 공격을 받은 영국 교회는 믿음의 힘을 잃고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존 웨슬리가 나타나 말 위에서 잠을 자면서 전국을 다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영국은 다시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후세 역사가들은 ‘영국에서 유혈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까닭은 존 웨슬리 때문이다’라고 평가하였습니다. 그후 19세기 다시 영국이 인본주의, 진화론, 고등비평의 영향으로 신앙을 잃어 가고 때 하나님은 찰스 스펄전이라는 위대한 말씀의 종을 세우셨습니다. 초창기에 스펄전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한다는 이유로 얼마나 조롱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를 통해서 영국교회 안에 복음 신앙이 지켜질 수 있었고 20세기 마틴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와 같은 위대한 복음주의자들이 나올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우리 모임이 내년이면 창립 50주년이 됩니다. 반세기 동안 우리 모임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한국과 세계 캠퍼스를 향해 자기 생각이나 경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재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언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대언했을 때 캠퍼스마다 마른 뼈와 같이 죽었던 영혼들이 일어나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들이 목자가 되고 선교사로 나아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시대 우리가 힘써 해야 할일은 첫째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일이요 둘째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에스겔처럼 순종하여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일에 충성할 때 캠퍼스 골짜기마다 가득한 마른 뼈들이 큰 군대로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8b절을 보십시오. 마른 뼈가 사람의 형상과 골격을 갖추었으나 생기는 없었습니다. 생기가 없으므로 여전히 생명이 없는 죽은 존재에 불과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9). 하나님께서는 처음에는 마른 뼈들을 향해 대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생기에게 대언하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2:7에 보면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흙으로 빚은 사람 안에 피가 돌고, 맥박이 힘차게 고동치는 생령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생명의 원천인 이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고 하셨습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이에 에스겔은 어떻게 했습니까? 10a를 보십시오.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대언하였습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대언했을 때 생기가 불어와 마른 뼈들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그들 전신에 피가 돌고, 얼굴의 혈색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멈추었던 맥박이 고동치고, 썩은 동태 눈깔 같던 그들의 눈이 반짝 반짝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 죽은 시체처럼 누워있던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당장 세계라도 정복할만한 지극히 큰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이 생명의 역사는 오늘날로 말하면 곧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죽은 자들이 생명을 얻고 살아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무기력한 자가 권능을 받게 되고, 우둔한 자가 지혜롭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젊은이들은 비전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일은 마른 뼈를 향해 대언하는 일을 충성되게 해야할 뿐 아니라 생기를 향해 대언하는 일을 충성스럽게 해야 합니다. 생기를 향해 대언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는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해 주시도록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기도는 성령께서 역사하도록 하는 도구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간절히 합심기도 하였을 때 오순절 날에 성령이 그들 위에 불같이 임하였습니다. 하늘로부터 생기가 들어오자 제자들은 위대한 군대로 일어나 초대 교회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대언하여 가르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양들과 일대일한 후에 그에게 성령께서 역사해 주시기를 기도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간절하고 끈질기게 또한 확신과 믿음으로 생기를 향해 대언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성령님이시여, 이 죽음을 당한 캠퍼스 영혼들에게 불어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마른 뼈를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6b 절에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13b절에도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14b 절에도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희망의 역사를 이루시는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믿지 않고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며 사치와 쾌락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을 바벨론 제국을 통해 심판하셨습니다. 그 나라로 끌려가 노예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거대한 바벨론 제국의 마르둑 신상을 보며 기가 죽었습니다. 자기들이 믿던 여호와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스겔 골짜기에서 그 뼈들이 살이 붙고 영을 받아 일어나 큰 군대가 될 것을 보이셨습니다. 그들이 세계를 정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을 보이셨습니다.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도 돌리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 함부로 여겨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느니 돈을 믿고 권력을 믿겠다고 합니다.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때 당신께서 참 하나님, 권능의 여호와 하나님이신 줄을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만 하는 영광을 받고자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통해 영광을 받고자 하십니까? 마른 뼈 같은 세상과 캠퍼스 양 무리들을 살리시는 기적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큰 지를, 하나님이 얼마나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지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워 캠퍼스에 복음을 전하게 하심은 자신의 능력을 보이시고 영광을 받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알아야합니다. 그것은 캠퍼스의 양들을 위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주의 말씀을 대언하되, 나를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아니라 오직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캠퍼스 복음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충만히 나타나길 기도합니다.
에스겔이 본 이 환상은 가까이는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음의 권세를 파하시고 부활하실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죄로 인해 죽은 자가 되어 마른 뼈와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시기와 분쟁의 골짜기입니다. 미움과 살인의 골짜기, 음란과 탐심의 골짜기입니다. 탄식과 절망의 골짜기, 불신의 골짜기입니다. 예수님은 마른 뼈와 같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이 죄 많은 세상 골짜기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예수님을 몰라보고 십자가에 못 박아 피 흘리게 하고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시신을 영문 밖 골짜기 무덤에 내다 버렸습니다. 예수님도 사흘 동안은 시체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히 무덤 속에 갇혀 계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기, 즉 부활의 영이 그 안에 들어갔을 때에 예수님은 말씀대로 마침내 살아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한분의 부활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살아나게 됩니다. 로마서 8:11절은 말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마른 뼈를 하나님의 큰 군대로 만드시는 권능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마른 뼈와 같던 저도 살리셨습니다. 저는 이번에 자퇴한 경영대 후배 김 예슬 양의 사건이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가져다 주는 허무에 깊이 병들어 있던 저도 한 때 학교를 때려 치려고 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영학 공부도 헛되고 졸업장도 헛되게 느껴져 계속 학교를 다닐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제 몸무게가 53 킬로 정도로 겉보기에도 마른 뼈처럼 보였습니다. 그대로 갔으면 자살해서 저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저를 살렸습니다. 수양회 때 들은 “광명의 십자가” 말씀에서 저는 십자가 너머에 있는 부활의 빛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모든 죽음과 허무를 이기신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이 때 뜨거운 기운이 온 몸을 휘감는 듯 했습니다. 성령께서 제 안에 역사하셔서 생기를 불어 넣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후 제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학교를 때려 치려했던 제가 졸업하고 또 편입해서 2년 간 Computer Science를 더 공부했습니다. 또 경영대학원에 도전해서 MBA까지 취득했습니다.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았던 제가 이제는 직장과 찬양팀, 특송, 메시지와 말씀 인도, 육아와 요리까지 동시에 감당하는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는 오직 사람을 살리는 말씀의 권능과 성령의 능력 때문입니다. 이제 제가 캠퍼스에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을 드러내는 말씀의 종, 기도의 종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돕는 양 중에 일대일할 때 정말 마른 뼈처럼 아무 반응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 소원은 변화는 둘째치고 이 양과 말싸움이라도 한 번 해 보는 것입니다. 인생에 되고 싶은 것도 없고 얻고 싶은 것도 전혀 없는 이 사람에게 소망 두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마른 뼈 같은 그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언제가는 말씀이 역사하고 성령이 생기를 불어 넣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제가 이를 믿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도록 도와 주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의 영혼이 살아나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마른 뼈가 살아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복되는 학생 제자 양성의 실패로 인해 시시때때로 해도 안 된다는 절망감이 들곤 합니다. 그래서 혹시 점점 소망은 약해져 가고 기도는 식고 복음 전파에 대한 헌신을 주저하고 있지 않은지요?. 마른 뼈를 살리는 권능의 말씀이 먼저 우리들의 내면에 강력하게 역사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안암골에 불어 와 모든 리더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성령으로 충만해 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안암골이 위대한 하나님의 군대로 우뚝 설 수 있기를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성령의 바람이 제기동 골짜기로부터 불어 캠퍼스로 훨훨 날아 가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들어가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2010.3.28 이창무)
'설교 > 부활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년아 일어나라 (0) | 2022.04.17 |
---|---|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 (0) | 2022.04.16 |
부활의 영광 (0) | 2019.04.28 |
엠마오로 가는 길 (0) | 2015.04.30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0) | 2015.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