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부활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창무 2015. 4. 30.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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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부활절 특강(2)


▣ 말씀 / 요한복음 11:1-44

▣ 요절 / 요한복음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여러분께서는 터틀맨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터틀맨은 '거북이'라는 혼성 인기 그룹의 리더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그가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사망하여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함께 활동해 온 두 명의 여성 싱어가 영정 사진 앞에서 대성통곡하는 모습을 TV에서 보았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죽음 앞에 무릎 꿇고 통곡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의 실존입니다. 사망이 왕 노릇해 왔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사망의 세력은 예수님에 의해 정복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생명이 왕 노릇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이 시간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묵상하므로 우리 속에 있는 죽음의 세력을 온전히 몰아내고 부활의 생명력이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Ⅰ.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1-16)


  어떤 병든 자가 있었습니다. 이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였습니다.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이렇게 세 남매는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들을 각별히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그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거기서 말씀을 나누기도 하시고 음식도 잡수셨습니다(눅 10:38-42). 부모 없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부모님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사로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쓰러졌습니다. 나사로는 즉시 베다니 종합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습니다. 병명은 심근경색이었습니다. 나사로는 의식을 잃은 채 핏기가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누이들은 사람을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급히 보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이들은 아주 간단하게 나사로가 병든 사실만을 알렸습니다. 그렇게만 해도 예수님은 즉시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오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는 말씀은 이 병은 죽지 않을 가벼운 병이라는 뜻이 아니라 죽음으로 끝나는 병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이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No, it is for God's glory" 나사로의 병은 아무 뜻도 없는 허망한 죽음으로 끝날 병이 아니었습니다. 이 병에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를 통해 부활의 주, 생명의 주로 영광을 받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도 불신자들처럼 똑같이 고난당하고, 똑같이 질병에 걸리고, 죽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전혀 똑같지 않습니다. 신자에게 질병은 질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고난은 고난 그 자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고난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반드시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때문에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당장에 달려가서 고쳐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소식을 들으시더니 녹지 운동장에 올라가 평소 잘 안 하시던 축구를 하셨습니다. 다음 날엔 봄도 오고 날씨도 좋으니 도봉산으로 등산을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틀을 더 머물렀습니다. 결국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나중에는 시체가 썩어 냄새가 나기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틀씩이나 계시던 곳에 머무르셨을까요? 여기엔 예수님의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으로부터 인간적인 사랑을 원하고 문제해결만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영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새로운 믿음, 높은 차원의 믿음을 심어주길 원하셨습니다. 만일 이들이 원하는 대로 달려가서 병을 고쳐 주셨다면 예수님은 이들의 좋은 주치의는 되실 수 있었습니다. 또 언제 어디서든지 요청만 하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해결사가 되실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할 때 예수님을 부활의 주님으로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이들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한계적인 믿음으로 다시 요동하며 어두움의 세력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믿음이 있을 때 죽음 권세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를 얻습니다. 부활의 믿음이 있을 때 어떤 문제에 부딪히든지 요동치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이들에게 영적으로 가장 귀한 선물인 부활 신앙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나사로가 괴로워하며 죽어가는 모습, 마르다와 마리아가 발을 동동 구르며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원망과 아픔과 오해를 다 참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이틀이란 시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필요하다면 이틀, 때로는 한 달, 두 달 아니면 10년, 20년도 지체하십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주겠다고 약속하시고는 25년 동안이나 지체하며 믿음 훈련을 시키신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이런 이틀이라는 시간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죽은 믿음, 한계적인 믿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하십니다. 이 이틀이란 시간은 죽은 믿음이 죽고, 한계적인 믿음이 한계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틀이 지난 후에 예수님은 반드시 찾아오십니다. 새로운 믿음, 한 차원 높은 믿음을 주시기 위해 찾아오십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께 빨리 응답해 주시기를 바라는 많은 기도제목들이 있습니다. 가정 복음화, 믿음의 가정, 물질, 취직, 장학금, 제자양성, 건강 회복 등등. 우리는 이렇게 바라는 것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지만 기도가 빨리 응답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 지체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불평하고 원망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때에 주시든지 아니면 내가 구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고 낙심치 말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이틀이 지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이들은 유대로 간다는 말이 몹시 두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유대에 계실 때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라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이 신성 모독죄로 돌로 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10:30,31). 그들에게 다시 유대지방으로 들어간다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마비시켰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깨우러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죽은 것과 잠자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비슷합니다. 잠잘 때도 죽은 것과 같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잠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고 나면 피곤이 풀리고 새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을 사모하여 틈만 나면 자고자 합니다. 심지어 예배 중에도 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자의 죽음은 잠과 같습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다가, 주님이 오실 그날까지 평안히 안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죽은 후 깨어나 눈을 떠보면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됩니다. 그곳에는 사망이나 슬픔이나 애통하는 것이 없습니다. 천군 천사들의 합창이 울려 퍼지며 은혜와 평화가 온 누리에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오히려 영광스럽고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관문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고 했을 때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나사로가 잠들어 쉬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느니라"하시며 나사로가 죽었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에게로 가자고 제자들을 재촉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갈등했습니다. 거기 가면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것이 확실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자꾸만 가자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벌써 신발 신고 나가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따라갈 수도 없고, 안 따라갈 수도 없었습니다. 이때 도마가 비장한 각오로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도마는 그 이름답게 칼질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이런 그의 신앙을 우리는 '의리 신앙, 열사 신앙, 깡다구 신앙'이라 부릅니다. 이는 부활 신앙이 없는 자들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용기요, 최고의 충성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그의 내면에는 기쁨도 없고 소망도 없었습니다. 죽을 것 같은 두려움, 못다 핀 꽃 한 송이로 져야 하는 서러움, 괴로움과 피곤함이 가득했습니다. 도마가 큰 소리 치는 바람에 다른 제자들도 마지못해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들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열두 마리의 소떼들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인류구원을 위한 사람 낚는 어부의 인생을 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뜻은 좋았지만 죽음이라는 한계상황 앞에 두려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죽음의 한계를 뛰어넘는 부활신앙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부활신앙을 선물로 줄 것을 생각하시며 기뻐하셨습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15)"


Ⅱ.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17-27)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한 때는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 되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2Km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문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급히 달려가 맞았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의 말을 살펴 볼 때 나사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에 대한 원망이 생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평소에 식사시간에는 20분 전에 오시더니, 막상 급할 때는 왜 이렇게 이틀이나 지체하셨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원망의 말을 쏟아 놓았던 마르다는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는지 예수님께 대한 막연한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 이 고백은 마르다가 머릿속에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일 뿐 실제 삶에는 전혀 적용이 되지 않는 고백이었습니다. 이미 마르다의 마음속에서는 예수님께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결론이 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르다와 같은 고백을 할 때가 많습니다. 소감에는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인생을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은 소감 발표용 고백일 때가 많습니다. 실제 마음속에는 있는 고백은 정 반대입니다. "하나님! 뭐하고 계셨어요. 제 인생은 이제 끝장났어요. 완전히 망했다고요" 우리는 마르다의 심정이 너무나 잘 이해가 됩니다. 말이라도 이렇게 해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하며 부활을 장래에 일어날 일로 기대했습니다.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하고 말함으로써 과거에 얽매였습니다. 또 이제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이라 함으로써 미래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마르다에게는 과거와 미래는 있었지만 현재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현재는 여전히 슬퍼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25,2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부활'이란 죽음 권세를 파하고 다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죄를 범한 이후로 죽음을 선고 받았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7)",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습니다. 이 법칙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인간은 유사 이래 이 운명을 극복해 보고자 몸부림쳐왔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자신의 절대 권력을 이용하여 영원히 죽지 않고자 거대한 피라미드를 세웠습니다. 이 거대한 피라미드의 크기는 죽지 않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의 크기를 상징합니다. 파라오는 스스로 미라가 되어 피라미드 속으로 들어갔지만 다시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현재는 다만 말라붙은 해골이 되어 박물관 한 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400여명의 냉동 인간들이 영하 196도의 액체 질소 속에 누워 있습니다. 이 중에는 디즈니랜드를 설립한 월트 디즈니도 있습니다. 그들은 미래에 의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면 자신들을 해동시켜 불치병을 고쳐줄 날이 오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들 중 다시 깨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죽음은 인류가 정복할 수 없는 가장 무서운 폭군이었습니다. 죽음은 살아있는 동안 우리에게 소중한 것들을 다 빼앗아가 버립니다. 제가 엘지에 근무할 때 제 옆 자리에 입사 일년 선배가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미국 파견 건이 있을 때 저와 경합을 벌이다가 그가 선발되어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 간지 일주일 만에 하이웨이에서 트럭과 충돌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제 자리에 전화벨이 울려 받고 보니 그 선배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를 대뜸 저에게 내 아들을 살려 내라 하시며 한 시간 동안이나 통곡하셨습니다.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고 답답하셨으면 저에게 아들을 살려 내라며 전화하셨겠습니까? 당시 저는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서 숨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누가 이 절망적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단 말입니까?


죽음은 죽음을 앞 둔 노인들이나 병든 사람들에게나 심각한 문제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은 이미 죽은 자들을 지배할 뿐 아니라 지금 살아 있는 모든 자들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은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 엮어져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 주위에 늘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한계를 만날 때마다 죽음을 경험합니다. 상실을 경험할 때마다 죽음과 대면합니다. 저는 어릴 때 꿈이 화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플란더스의 개'라는 동화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화가의 꿈을 꾸고 있는 주인공 네로와 제 자신을 점점 동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네로가 저였고 제가 바로 네로였습니다. 다른 동화책들처럼 당연히 네로가 미술대회에서 일등을 하고 파트라슈와 함께 행복하게 산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 일단 방문부터 걸어 잠갔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도록 울기만 했습니다. 그 착한 네로가 성당 안 루벤스의 그림 앞에서 파트라슈와 함께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 때…… 네로도 죽고 저도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죽음은 제 마음에 삶에 대한 쓰디 쓴 허무로 찾아 왔습니다. 죽음은 제자들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이로 인한 무기력으로 찾아왔습니다. 죽음은 마르다에게는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생긴 슬픔, 절망으로 찾아왔습니다. 죽음은 이생이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현재 삶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으로 찾아옵니다. 죽음의 권세는 이처럼 수시로 우리를 찾아와 우리 마음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사망 권세의 지배 받는 자의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덮여 있습니다. 기쁨이 없고 늘 무엇에 쫓기는 듯 불안해 보입니다. 하루하루 마지못해 의미 없이 살아갑니다. 장래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에 시달려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온갖 부정적인 생각, 불신과 패배적인 생각에 시달립니다. 쉽게 자포자기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생명력이 없는 인생들은 근본적으로 죽음권세 아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죽음의 세력을 이기며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바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신 부활이요 생명이 되십니다. 여기 생명은 헬라어 '조에'로서 단순히 목숨을 의미하는 '프쉬케'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조에'를 주시는 영(life-giving spirit)'으로 묘사했습니다(고전15:45). 우리는 이 부활의 주, 생명의 주를 믿는 믿음으로 죽음을 정복한 삶, 부활 생명을 가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 생명의 주를 믿는 자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끝이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부활의 시작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물으심으로 우리에게 믿음의 고백을 원하십니다. 이를 볼 때 부활 신앙은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는 것은 이론이요 믿는 것은 실제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마음으로 믿을 때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르다와 같이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언제든지 이 믿음의 고백을 할 때 우리들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접붙인바 됩니다. 이로써 예수님으로부터 부활과 생명의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기쁨과 희망,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이때 죄로 죽었던 우리 인생 가지에 새로운 싹이 트고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부활의 능력은 우리 삶에 생명의 열매를 맺히게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부활의 믿음으로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를 체험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현재적인 부활 신앙을 원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 말씀은 모두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믿음이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항상 현재입니다. '그때 과학 고등학교만 안 갔어도 내 인생이 요 모양 요 꼴은 안 되는 건데', '언젠가는 잘 할 거야. 그렇지만 지금은 안 돼. 어쩔 수가 없어' 이렇게 생각하는 자는 마르다와 같은 자입니다. 우리는 현재 예수님을 믿고 현재 능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나의 삶의 현장에서 부활이요 생명의 주님이 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스펄젼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금화를 현재 통용되는 주화로 바꿀 믿음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정말 미래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현재 우리의 삶을 반드시 변화시킵니다. 천국이 장차 임하게 될 나라이면서 동시에 지금 여기에도 임하듯이, 부활은 미래의 부활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재 우리에게 죽음의 세력을 넉넉히 이길만한 부활과 생명의 능력을 끊임없이 부어 주고 계십니다. 부활의 능력은 실패한 자를 다시 일으켜 세워 도전하게 합니다. 부활의 능력은 원대한 비전을 품고 모험을 감수하며 현실에 도전하게 합니다. 부활의 능력은 소심하고 겁 많은 졸장부를 담대한 믿음의 용사로 변화시킵니다. 고린도후서 말씀은 현재적인 부활의 믿음으로 사는 이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들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0)" 


Ⅲ.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28-44)


  마르다는 신앙고백을 한 후 마리아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너를 부르신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마을 어귀에 계신 예수님께 나아가 그 발아래 엎드려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함께 온 유대인들도 울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이요 생명의 주가 앞에 계시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죽음으로 인해 여전히 울고 있었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눈물은 그들의 불신에 대한 안타까움의 눈물이었습니다. 죽음의 권세에 굴복 당하여 우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긴 데서 나온 사랑과 동정의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물로 인내하시며 그들을 끝까지 도우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눈물 때문에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현재적인 믿음이 부족한 우리들도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무덤으로 가서 무덤을 막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방금 신앙고백을 한 마르다가 말했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는 이제는 무슨 조치를 취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오빠를 이미 포기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제 마르다의 불신을 책망했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마르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면 순종하여 믿음으로 한계상황의 돌을 옮겨 놓아야 했습니다. 우리도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마음속에 있는 불신과 의심의 돌을, 슬픔과 두려움의 돌을, 패배와 운명의 돌을, 절망과 좌절의 돌을 믿음으로 옮겨 놓아야 합니다. 돌을 옮겨 놓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우리의 몫이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친히 능력으로 역사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일들을 처음에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도중에 예상치 못한 좋지 않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믿음 대신 잔머리 굴려서 사는 친구들이 더 잘되는 것 같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내가 그들보다 더 비참해 보일 때 계속해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리석게 느껴집니다. 더 이상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면 스스로 포기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정리합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납니다. 이미 끝났습니다. 더 이상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 여기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어떤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무엇보다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도에 포기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한번 믿음으로 시작했으면 끝까지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까지 믿음으로 밀어붙여 끝장을 봐야 합니다.


무덤의 돌을 옮겨 놓자 예수님은 둘러선 무리들이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심을 믿을 수 있도록 간절히 감사 기도하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향하여 큰 소리로 나사로를 부르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러자 죽은 나사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통통 걸음으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풀어 다니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흘러 나왔습니다. "오! 죽은 사람이 살아 나오다니.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던 무덤 앞은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됨으로 부활의 빛, 생명의 빛이 충만한 축제의 장으로 변하였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이는 나사로가 죽음의 세계 밖으로 나오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어둠의 세계에서 예수님이 계신 빛의 세계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절망의 세계에서 예수님이 계신 희망의 세계로, 예수님이 없는 허무와 무기력의 세계에서 예수님이 계신 창조와 능력의 세계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되면 빛으로, 생명으로 나오게 됩니다. 요 5:25은 말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 음성은 제게도 임하였습니다. 저는 89년 거듭남을 체험하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없었습니다. 4학년 때 순진하신 아버지께서 사기를 당하시고 사업이 실패하신 사건을 만난 후 제 믿음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저는 또다시 '플란더스의 개'의 주인공 '네로'가 되었습니다. 착한 사람이 망하고 속이는 자가 잘되는 이 세상은 궁극적으로 악이 선에게 승리하는 곳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예수님도 선한 일을 많이 하셨지만 결국 악한 인간들에게 잡혀 억울하게 돌아가신 또 한 명의 불쌍한 '네로'처럼 보였습니다. 이 의미 없고 부조리한 세상, 차라리 빨리 떠나는 것이 괴로움을 덜 수 있는 길로 여겨졌습니다. 날마다 자살 충동에 시달렸습니다. 신문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죽은 사람들의 소식을 접하고 그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은 이런 저를 93년 부활절 수양회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해 수양회 전체 타이틀은 '광명의 십자가'였습니다. 저는 그 타이틀을 보자마자 망치로 머리를 한 대 강하게 얻어맞은 듯 '띵' 했습니다. 어떻게 그 참혹한 십자가가 광명의 십자가가 될 수 있는가? 저는 비로소 십자가 너머에 있는 부활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바로 조금 전까지 저를 지배하고 있던 허무의 세력이 싹 물러갔습니다. 어둡던 십자가는 제게 부활의 빛이 찬란히 빛나는 광명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 부활의 믿음으로 세계 선교를 위해 편입을 결심하였습니다. 저는 엘지 건설 인사팀 잘 나가던 이 대리에서 나이 서른에 컴퓨터학과 3학년 학부생이 되었습니다. 2년을 전공과목만으로 꽉꽉 채워서 듣는 강행군 속에서도 부활의 능력으로 4.33의 학점을 받고 3회 연속 성적 최우수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저는 졸업 후 기술력 있는 벤처에 가서 한 3년만 고생하여 성공을 거둔 후 이를 발판으로 미국에 프로그래머로 나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났지만 회사는 여전히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미국은 IT 거품이 빠지면서 해외 취업 길은 바늘구멍이 되었습니다. 이때 저는 죽음의 권세가 쏜 절망이라는 독화살을 맞고 비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제게 찾아오시어 '창무야! 그 절망의 무덤에서 나오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저를 다시 절망에서 희망의 세계로 이끌어 내었습니다. 부활의 능력은 계속해서 포기치 않고 기도할 힘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자 뉴저지 센터 John Park 선교사님과 Dr. Bill 목자님을 만나게 하시고 구체적으로 선교의 문을 열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제 저는 4월말 미국 현지에서 두 달간 업무를 인계 받기 위해 떠날 예정입니다. 미국 선교를 위해 제게 넘어야 할 장애물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현재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이 장애물들에 도전하여 승리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장차 미국 가운데 제게 임한 부활의 은혜와 능력을 증거하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마치 초상난 나사로의 집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한계에 갇혀 슬퍼하고 절망하고 있습니다. 또한 의심하고 불신하고 서로 원망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시체가 썩어 냄새가 나듯이 온갖 악취를 풍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우리가 믿을 때 우리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는 지금 살아 계십니다. 이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생명이 살아납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명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허무와 절망의 세계에서 나오라고 명하십니다. 불신과 운명주의와 무기력의 세계에서 나오라고 명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죽음의 세계에서 나와 생명력이 넘치는 힘찬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08.4.6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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