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부활절 특강 / 이창무
부활의 복음으로 다시 세워지는 교회
말씀 / 고린도전서 15:1-58
요절 / 고린도전서 15:58 “그러므로, 사랑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굳건하게 서서 꿈쩍도 하지 말고, 주님의 일을 언제나 더 많이 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주님 안에서 여러분의 노력은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죽음 이후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런 질문, 어릴 땐 별로 안 궁금합니다. 시험에 안 나오니까요. 그런데 인생은 어느 순간 우리를 이 질문 앞에 데려다 놓습니다. 갑작스러운 사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혹은 몸의 질병과 노화 앞에서 우리는 피할 수 없이 삶의 끝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사실 현대인은 죽음을 점점 더 먼 이야기로 밀어내고 살아갑니다. 좋은 음식과 운동, 의료기술의 발달로 요즘은 ‘백세 시대’도 모자라 ‘120세 시대’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의학이 발전해도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 끝에는 반드시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과연 우리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지금 우리가 애쓰며 살아가는 이 수고와 헌신은 과연 무엇을 위해서일까요?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가장 분명한 대답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1. 부활이 해답이며 역사적 사실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다시금 꼭 붙잡아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좋은 소식으로 전했던 복음을 여러분에게 환기시켜 드립니다. 그 복음을 여러분도 전해 받았으며, 그 복음 안에 여러분도 서 계십니다”(1)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새로운 내용이 아니라 이미 전했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였고, 그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다시 복음을 강조할까요?
“그 복음을 통해서 여러분도 구원받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좋은 소식으로 전한 그 말씀을 굳게 잡고 있으면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헛되이 믿은 것이 되고 말 겁니다”(2)
복음의 말씀을 굳게 잡고 있지 않으면 헛되이 믿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헛된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복음을 믿지만 삶이 변화되지 않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는 파벌, 음행, 소송 등 여러 문제가 있었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고란도 교회는 방언, 예언, 신유와 같은 은사에 집착했지만, 바울의 문제 인식과 해답은 전혀 다릅니다. “너희 진짜 문제는 복음을 모르는 것이다. 복음으로 돌아가야 너희 삶이 회복되고 교회가 새로워질 수 있다.”
오늘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개인이나 공동체 안에 문제가 생길 때, 해결책은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복음만이 삶을 변화시키는 진짜 힘입니다. 요즘 레트로 문화가 유행입니다. 낡은 필름카메라, 찌그러진 법랑컵, 낡은 LP판—“이게 왜 멋있지?” 싶은데, 사람들은 말합니다. “진짜는 안 바뀌잖아요.” 복음도 그렇습니다. 새롭고 화려한 사상이나 기술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오래된 복음만이 우리 인생과 교회를 다시 세울 수 있는 능력입니다.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안암1부 여러분! 복음 위에 굳게 서십시오! 거기에 답이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핵심 내용을 정리한 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부활을 목격한 수많은 증인들을 제시합니다. 베드로와 열두 제자, 500명이 넘는 형제자매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그리고 바울 자신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과거 교회를 핍박하던 자신이 예수님을 만난 후 완전히 변화되었음을 증언합니다. 야고보도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열두 제자도 두려움에 떨던 이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증인의 일관된 증언이 있으며, 그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가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다”는 걸 의심 없이 믿듯,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증거가 예수님의 부활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짜로! 실제로! 역사 속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나 저들이나 우리는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은 이렇게 믿었습니다”(11)
그리고 그 부활은 오늘 우리 믿음과 삶의 가장 분명한 근거이자 소망입니다.
2. 부활은 필연이며 확실한 소망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킴받아 부활하셨다는 것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말하기를, 죽은 사람들의 부활이 없다고 하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12)
고린도 교회 안에는 예수님의 부활은 믿으면서도 몸의 부활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헬라 철학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영혼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고 여겼습니다. 구원이란 육체라는 감옥에서 영혼이 벗어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다시 몸을 입는 부활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몸의 부활이 없다면 어떤 결과가 따를까요? 첫째, 예수님도 부활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둘째, 그러면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헛소문이 됩니다. 셋째, 우리의 믿음도 공허한 자기 최면이 되고, 죄사함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넷째,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은 망한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결국 성도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억울한 인생을 사는 셈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20)
‘첫 열매’란 앞으로 따를 열매들의 보증입니다. 첫 딸기가 달고 맛있으면, 그 딸기밭은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건, 우리 부활도 이미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활 소망은 막연하거나 불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우리 또한 반드시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 안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장차 완성될 영광의 부활을 믿음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성도의 부활이 개인적 바람이나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역사 속에서 반드시 이루어질 사건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구속 역사의 첫번째 단계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지배 세력들을 없애 버리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나라를 온전히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 구속 역사의 완성 안에 성도의 부활도 반드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이야말로 사라져 없어질 마지막 원수입니다”(26)
만약 죽음에 갇힌 채 남겨진 성도가 있다면, 구속 역사가 완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부활은 필연적입니다. 우리가 부활하는 그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죽음조차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들 가운데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또한 부활 신앙은 미래 사건일 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줍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삶을 그 증거로 제시합니다. 그는 날마다 죽음을 무릅쓰는 삶을 살았습니다. 에베소에서는 맹수와 싸우듯 고난을 견뎠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의 부활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부활이 없다면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요? 바울은 당시 에베소 검투사들의 표어를 인용합니다. “먹고 마십시다! 내일이면 우리가 죽을 테니까요!” 부활이 없다면 당장 오늘만을 위해 사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죄를 짓지 마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부활이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장차 부활 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선한 습관이 무너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바울이 이토록 부활의 소망을 힘주어 호소하고 애타게 외치고 있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부활의 소망 없이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입술로는 부활을 고백하고 예배에도 참석합니다. 그러나 삶 깊은 곳에는 부활의 소망이 자리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세상적인 성공을 소망하고 세상의 쾌락을 놓치지 싶지 않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희생과 섬김의 삶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이 점점 형식적이 되고 무거워집니다. 감사보다는 의무감, 기쁨보다는 피곤함이 앞서게 됩니다. 세상의 가치와 믿음 사이에서 계속 오락가락하며 방황하게 됩니다.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이런 사람은 모든 사람들보다 더 가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바뀝니다. 왜냐하면 부활이 진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헌신은 소모가 아니라 투자이고, 눈물은 낭비가 아니라 씨앗입니다. 지금 당장은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하늘에서는 박수갈채 준비 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활의 소망 안에서 오늘을 살아갑니다. 부활의 소망은 우리를 거룩하게 살아갈 능력을 줍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자기를 낮추고 희생하며 살 수 있습니다. 부활이 있기에 눈물 흘리며 아파하면서 목자의 길을 끝까지 가려 합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신 승리로 오늘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십자가를 지되 기쁨으로 주님을 따르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3. 부활은 영광이며 최후의 승리입니다.
바울은 부활에 대한 회의적인 질문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부활합니까? 어떤 몸으로 돌아옵니까?’”(35)
이는 오늘날에도 흔히 제기되는 질문입니다. 죽은 지 오래된 몸이 어떻게 살아나겠는가 하는 의문은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말합니다. “우둔한 사람이여!” 왜 이런 생각을 우둔하다고 할까요? 부활의 원리를 우리는 이미 자연 속에서 수백 번씩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씨앗의 원리를 예로 듭니다. 씨앗 하나가 땅에 묻히는 걸 보면 이렇게 보입니다. “어휴, 얘는 이제 끝났구나…” 하지만 며칠 지나면 어떻게 됩니까? 땅을 뚫고 나와 꽃이 피고 열매 맺습니다. 부활도 똑같습니다. 지금의 몸이 묻히고, 전혀 새로운 생명체로 다시 피어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입고 있는 몸은 첫 사람 아담에게서 물려 받은 몸입니다. 그래서 부서지기 쉬운 몸이고 죄의 유혹에도 쉽게 넘어지는 몸입니다. 그러나 장차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하늘에 속한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됩니다. 이는 창조 때 아담보다 훨씬 더 완전하고 더 아름답운 종말의 몸입니다. 말하자면 부활은 리모델링 정도가 아닙니다. 도배하고 장판 새로 까는 수준이 아닙니다. 아예 뿌리부터, 설계도부터 시작해서 다시 짓는 완전한 재건축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이 점을 말씀드립니다. 살과 피는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을 수 없습니다.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물려받지 못합니다”(50)
여기서 ‘살과 피’, ‘썩을 것’은 지금 우리가 가진 육체, 곧 죽음과 부패의 지배를 받는 존재를 뜻합니다. 이런 상태로는 죄와 죽음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새로운 몸, 신령한 부활의 몸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속 역사의 필연적 결론입니다.
우리가 부활 소망 앞에서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부활을 현재 삶의 연장선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몸으로 이런 세상에서 다시 삶을 시작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전혀 다른 차원의 몸입니다. 축구를 하면 손흥민 선수도 “형, 어디서 왔어요?” 할 만큼 멋진 골을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탈모를 고민할 필요가 없이, 늘 풍성하고 윤기가 좔좔 흐르는 머리가 유지될 것입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김태희가 소를 몰고 한가인이 밭을 간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면 그들이 추남추녀로 보일 정도로 우리 모두 다 선남선녀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죄 지을 일이 없습니다. 회개 소감을 쓸 필요도 없습니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다 했더니 전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서로 더 사랑하고 더 섬기려고 경쟁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상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광스러운 현실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영광을 너무 시시하게 만들지 맙시다. 우리가 부활 이후의 삶을 뛰는 가슴으로 뜨겁게 기대하고 소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부활의 몸을 입게 될까요? 바울은 말합니다.
“잠깐 만에, 눈 깜짝할 사이에, 마지막 나팔 소리에 그렇게 될 겁니다. 나팔이 울릴 것이고, 그러면 죽은 사람들이 썩지 않을 몸으로 살아날 것이며 우리 자신들도 변화될 것이니까요”(52)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죽은 자들은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나고, 살아 있는 자들도 순식간에 변화될 것입니다. 그 몸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완전한 자유와 영광 가운데 서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 부활의 순간을 바라보며 감격스럽게 선포합니다.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55)
예수님의 부활로 이미 죽음은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장차 성도의 부활을 통해 완전히 제거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이기고 부활하셨기에, 우리도 그분 안에서 죄와 죽음에서 완전히 해방될 것입니다. 부활의 날, 우리는 정죄도 두려움도 없는 완전한 자유와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57)
바울은 부활 신앙을 논증한 후 감사의 고백을 올려드립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모든 성도들에게 죽음을 이길 승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곧 우리의 승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직막으로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굳건하게 서서 꿈쩍도 하지 말고, 주님의 일을 언제나 더 많이 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주님 안에서 여러분의 노력은 헛되지 않습니다!”(58)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산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 눈물, 이 헌신… 대체 누가 알아줄까?” 그런데요, 하나님은 아십니다.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그분은 절대 잊지 않으십니다.
지금도 개척 센터 목자님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캠퍼스로 나가서 예수님을 전합니다. 수십 년간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해온 선교사님들이 계십니다. TV에도 안 나오고, SNS 팔로워도 없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날, 하나님께서 부르실 것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세상의 수고는 스쳐 지나갑니다. 잊히고, 사라지고, 때로는 무시당합니다. 하지만 복음을 위한 수고는 다릅니다. 하늘에 저장됩니다. 영원에 기록됩니다. 그리고 그날, 우리는 고백하게 될 겁니다: “아… 진짜 헛되지 않았구나!” 우리가 복음을 더욱 사랑하게 되기를, 복음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게 되기를, 그리고 언젠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다시 만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시간 존 던이라는 영국 시긴의 ‘죽음아, 교만하지 말라’라는 제목의 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죽음아,
교만하지 말라.
사람들은 너를 두렵다 하지만,
너는 참으로 아무것도 아니니라.
네가 이긴 줄 아는 자들도
죽지 아니하였고,
나는 더욱이
네 앞에 쓰러지지 않으리라.
너는 쉼의 그림자일 뿐,
우리가 경험하는 잠과 같도다.
그렇다면 너로 인한 쉼이야말로
참된 안식일지니,
우리의 좋은 이들이
너를 따라 먼저 가되,
그들은 뼈를 쉬고,
영혼은 자유를 얻느니라.
그러나 너는 강하지 않다.
너는 종일 뿐이다.
운명과 우연,
세상의 권력과 절망한 자들의
수중에 있는 종이로다.
너는 독과 전쟁과 병고와
함께 거하며,
하찮은 양귀비와 작은 주문조차
너를 대신할 수 있도다.
그런데도
네가 어찌 자랑하느냐?
단 한 번의 짧은 잠이 지나면,
우리는 영원히 깨어나리니,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리라.
죽음아,
너는 더는 이기지 못하리라.
죽음아,
너는 죽으리라.
오늘 말씀을 통해 볼 때 부활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부활은 영원한 현실입니다. 부활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부활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우리는 허무를 향해 달려 가는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으로 향해 가는 인생입니다. 우리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으로 완성되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맙시다! 혹시 넘어지셨습니까? 부활의 소망을 붙들고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눈물을 흘리십니까? 하나님께서 그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수고하고 애쓰셨습니까? 주님이 다 아십니다! 그리고 그 날, 마지막 나팔 소리에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지켜낸 믿음, 네가 흘린 눈물, 네가 들인 헌신, 결코 헛되지 않았노라!” 우리 모두 부활의 소망 안에서 오늘을 살고, 영광의 날,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 외치게 될 그 날을 바라보며 선포합시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영원한 승리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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