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십자가에 버림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이창무 2024. 12. 15.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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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29강 / 이창무

십자가에 버림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말씀/ 마가복음 15:1-47
요절/ 마가복음 15: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기독교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세워진 종교입니다. 교회의 첨탑에 십자가가 세워지고,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목걸이와 귀걸이를 착용할 만큼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원래 십자가는 흉악한 죄인을 죽이는 처형 도구였습니다. 저주와 수치의 상징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고전 1:23).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에 의해 저주가 용서로, 수치가 영광으로, 패배가 승리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의 역사를 AD와 BC로 나누었고, 우리의 삶과 영원의 운명을 결정짓는 기준이 됩니다. 이 시간, 골고다 언덕으로 나아가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1.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1절부터 15절까지 예수님의 재판 장면이 나옵니다. 재판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예수님의 무죄함이 점점 더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오죽했으면 재판장인 빌라도가 예수님의 구명을 위해 온갖 몸부림을 쳤겠습니까? 그러나 재판의 결과는 유죄, 사형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어날 수 있습니까? 누가 진짜 죄인입니까? 이 재판에서 형식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종교 지도자들,  군중들, 빌라도입니다.

첫째,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가르침과 영향력이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백성들로부터 진심 어린 사랑과 인정을 받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나에게 전혀 없는 그 진정성을 가진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없애기 위해 거짓 증인들을 동원하고 무리를 매수하고 선동하는 온갖 지저분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평소 고상한 척, 깨끗한 척 하면서 온갖 폼을 다 잡았지만 그 내면은 이토록 부패하고 타락해서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무리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았다 해서 예수님을 못박으려 했습니다.

원래 무리들은 예수님께 적대적이지 않았습니다. 환영하고 추종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로마로부터 독립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었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이라면 경제 문제는 걱정할 일이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리들의 기대와는 다른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자 무리들은 돌변했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고 실망은 곧 미움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몇몇이 가짜 뉴스를 퍼트리고 선동을 하자 무리들은 거기에 너무나 쉽게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그들의 외침은 군중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어리석고 잔인해질 수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셋째, 빌라도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아무런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번 고발이 종교지도자들의 시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도 정확하게 파악을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에게 당장 무죄를 선고하고 석방을 했어야 옳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결국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무리들이 소요 사태를 일으킬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로마 황제로부터 찍혀서 앞으로 승진 길이 막힐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다 알면서도 진리를 외면하고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노력했다고 변명을 해 봐도 자신이 불의에 가담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세 부류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서로 달라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 자기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실종 상태입니다. 자기 기득권, 자기 욕망, 자기 이익, 지독한 자기 사랑만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 세 부류의 사람에게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몬 대역죄인들이라고 손가락질할 자격이 있습니까? 그들은 우리 인간 군상들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고 나의 자화상입니다.

우리 역시 종교지도자들처럼 나에게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을 보고 시기하고 질투하곤 합니다. 이미 내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지도 모릅니다. 무리들처럼 진실을 보지 못하고 선전 선동에 휘둘릴 정도로 어리석을 때가 있습니다. 나의 욕망을 추종하고 그 욕망이 좌절될 때는 이성을 잃고 분노하기도 합니다. 빌라도처럼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갈등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비겁하게 책임을 회피하곤 합니다. 우리 역시 본성으로는 지독한 자기 사랑에 빠져 있는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만든 공범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불편한 진실 앞에 우리를 서게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가 얼마나 무서운 지,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이 얼마나 깊은 지, 우리의 껍데기 뒤에 숨어 있는 더럽고 추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똑바로 쳐다보기 참 힘듭니다.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보아야 합니다. 더 이상 죄를 회피하거나 정당화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내가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보여야 할 첫번째 응답입니다.

2.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그 놀라운 사랑에 감사하게 됩니다. 

사형 판결을 받으신 예수님은 이제 죽음의 길을 가셔야 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이 어떠했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처절한 육체적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명령에 따라 로마 군병들에게 끔찍한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사용한 채찍은 끝에 날카로운 쇳조각과 뼛조각이 붙어 있어, 한 번 맞을 때마다 살점이 찢겨 나가고 피가 튀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려 120대의 채찍을 맞으셨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셨습니다. 그 상태에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비틀거리며 여러 번 넘어지셨고, 마침내 기력이 다해 구레네 사람 시몬이 그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군병들은 예수님의 양 손과 두 발에 굵고 긴 대못을 박았습니다. 이 대못이 예수님의 손목과 발을 관통할 때, 혈관이 터지고 신경이 찢어져 온몸이 전율하였습니다. 피와 물이 몸에서 빠져나가며 극심한 갈증에 시달리셨습니다. 십자가형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형벌 중 하나로, 예수님께서는 온몸의 피를 다 쏟으며 서서히 죽음을 맞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모욕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며 자색 옷을 입히고, 날카로운 가시로 만든 관을 예수님의 머리에 씌웠습니다. 날카로운 가시가 예수님의 이마를 찔렀고, 얼굴에는 피가 흘렀습니다. 군병들은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며 희롱하고, 머리를 치며 침을 뱉었습니다. 예수님은 벌거벗겨진 채로 십자가 위에 달려 지나가는 자들의 조롱과 대제사장들의 모욕을 받으셨습니다. 대제사장들은 "그가 남을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며 비웃었습니다. 심지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조차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토록 처절한 멸시와 조롱을 받으셨습니다."으깨지고 짓이겨진 피투성이 벌레"와 같은 존재가 되셨습니다(시 22:6).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으신 영적 고통이었습니다. 여섯 시간 동안 말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을 겪으신 후, 예수님께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셨습니다. 단 일 분 일 초도 그 관계가 끊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철저하게 버림받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부르짖음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단절로 인한 말할 수 없는 깊은 고통의 표현이었습니다. 이 고통은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 모진 고통을 겪으셔야 했습니까? 왜 예수님은 이런 고통을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참으셨습니까? 왜 하나님은 아들이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느냐 절규하는데도 불구하고 외면하셨습니까?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당해야 할 수치와 저주와 형벌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구원을 받을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죄는 반드시 대가를 치뤄야 합니다. 그것이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고 영원한 버림 받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가 당해야 할 죄의 형벌을 아들에게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맞아야 할 채찍을 예수님이 대신 맞으셨습니다. 내가 못 박혀야 할 십자가에 예수님이 대신 못 박히셨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조롱과 멸시를 예수님이 대신 다 받으셨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버림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나 대신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죄를 범한 것은 나인데 죄의 대가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다 치뤄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의 죄가 용서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의 사슬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생을 얻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을 받고 사랑 받는 자녀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모든 고난은 다 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찢기신 주님의 살과 흘리신 피는 모두 다 나를 위한 희생의 제사였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왜 이렇게까지 하셨습니까? 굳이 그 이유를 말하라 한다면 그냥 ‘사랑’이라고 말 밖에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이 십자가를 처음 만난 스무살 때부터 지금까지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왜 날 사랑하나?”입니다. 왜 예수님은 왜 그 고통과 조롱을 끝까지 참으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실까요? 왜 아버지께 버림 받는 일까지 감수하시며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실까요?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입니다. 이 사랑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놀라운 사랑,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강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은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감당하신 고난과 그로 인해 주어진 구원은 세상의 어떤 선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응답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와 순종의 삶을 통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기를 원합니다. 매 순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그 능력으로 새롭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단순한 죽음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온 인류를 위해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첫째, 은혜의 새 시대가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시던 순간,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38). 성전 휘장은 죄인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던 상징으로, 율법 아래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제사장의 중재와 제사의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 휘장이 찢어짐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죄인인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더 이상 인간의 행위나 제사로는 불가능했던 일이, 예수님의 완전한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둘째, 구원이 온 인류에게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한 로마 백부장은 “참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라고 고백합니다(39). 이방인의 입에서 나온 이 고백은 십자가의 구원이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온 인류를 위한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는 예수님의 구원이 특정 민족이나 계층을 넘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음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인류를 하나로 묶는 구원의 다리입니다.

셋째,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마가복음은 여인들과 아리마대 요셉의 헌신을 기록합니다(40-47). 이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에도 그분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 부활의 소망을 간직하며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 갑니다. 십자가 사건은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을 모아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하며 그분께 헌신했고,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하며 자신의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단순히 고난의 상징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를 해결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새로운 삶의 길을 여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휘장이 찢어짐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얻었고, 백부장의 고백은 구원이 온 인류를 위한 것임을 선포하며, 새로운 공동체는 부활의 소망 속에서 이어졌습니다.

오늘 저는 십자가 현장 속에서 그 동안 스치듯 지난 갔던 두 명의 인물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번째 인물은 바라바입니다.

바라바는 본래 반역자이자 살인자로 낙인찍힌 죄인이었습니다(7).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해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마땅히 사형에 처해져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코 앞에까지 다가온 순간, 그의 운명은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로 결정되셨고, 바라바는 그 대가로 석방되었습니다.

바라바의 석방은 단지 그의 개인적 운명이 바뀐 사건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을 예고하는 놀라운 그림자입니다. 그는 아무런 공로나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스스로의 노력이나 의로움으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자리를 대신하셨습니다. 그분은 죄 없으신 분으로서 우리의 짐을 모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으로 인해 우리는 값없이 은혜를 입어 자유와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덕분에 자유의 몸이 된 '바라바'의 뒷 이야기는 성경에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새사람이 되었는지, 아니면 여전히 또 다른 민란을 도모하며 이전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바라바 이후의 삶의 선택은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는, 죽을 운명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건지심을 받은 또 다른 '바라바들'입니다. 이제 이후의 삶은 우리가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여 '거듭난 바라바'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자기가 주인되어 자기 혈기로 살아가는 '인간 바라바'로 살아갈 것인지를 말입니다. 

두번째 인물은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시몬은 본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로마 군병들에게 의해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야 했습니다. 상황만 놓고 보면 전혀 자기 의도와 상관 없이 억지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하게 된 셈입니다.

그런데 바라바와 달리 이후 시몬의 행적에 대해서는 성경의 기록이 있습니다. 시몬의 아들 루포의 이름이 로마서에서 ‘주의 택하심을 받은 루포’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시몬과 그의 가족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 주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는 평생 그 기억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처음에 그는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나중에는 기꺼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라바이면서 동시에 구레네 사람 시몬이기도 합니다. 때로 우리는 억지로 할 수 없이 자기 십자가를 지곤 합니다. 내가 왜 이 고난을 져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변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 당시에는 그저 어쩌다 우연히 만난 고난인 줄만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내 삶에 열매를 맺으실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의 일부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이 놀라운 전환을 이루는 키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고발장인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러브레터이며,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바라바처럼 우리는 은혜로 살게 되었고, 시몬처럼 억지로 진 십자가도 결국 은혜의 도구가 됩니다. 십자가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 삶에 역사합니다. 죄를 직면하게 하고, 사랑에 감사하며, 새롭게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의 사랑을 기억합시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그 사랑을 세상에 증거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죄 위해 죽으신 주>

우리 죄 위해 죽으신 주
십자가 그 사랑 감사하네

날마다 주의 형상대로 변화되리라
십자가 우릴 새롭게 하리

우리 죄 위해 죽으신 주
십자가 그 사랑 감사하네

날마다 주의 형상대로 변화되리라
십자가 우릴 새롭게 하리

놀라운 사랑 찬양하리라
우리를 위해 생명주셨네

놀라운 사랑 찬양하리라
십자가의 그 능력, 십자가의 그 능력

우리 죄 위해 죽으신 주
십자가 그 사랑 감사하네

날마다 주의 형상대로 변화되리라
십자가 우릴 새롭게 하리

우리 죄 위해 죽으신 주
십자가 그 사랑 감사하네

날마다 주의 형상대로 변화되리라
십자가 우릴 새롭게 하리

놀라운 사랑 찬양하리라
우리를 위해 생명주셨네

놀라운 사랑 찬양하리라
십자가의 그 능력, 십자가의 그 능력

놀라운 사랑 찬양하리라
우리를 위해 생명주셨네

놀라운 사랑 찬양하리라
십자가의 그 능력, 십자가의 그 능력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며,
그 사랑에 감사하며 순종의 삶으로 응답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삶 속에서 매일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시고,
그 사랑을 힘입어 우리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입술과 삶을 통해 십자가의 사랑이 온 세상에 증거되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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