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마가복음 28강 / 이창무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말씀/ 마가복음 14:27-72
요절/ 마가복음 14: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우리가 식당에서 종종 보게 되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의 반대는 “네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네 나중은 미약하리라” 입니다. 이 둘 중에 한 쪽을 택하라고 하면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나오는 제자들은 후자에 해당합니다. 시작은 자신감 뿜뿜이었으나 나중에는 배신하고 도망가고 부인합니다. 예수님은 전자에 해당합니다. 시작은 연약해 보였으나 나중에는 담대하게 진리를 증언하십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요? 우리는 오늘 그 답을 찾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보려고 합니다.
1.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자신의 연약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충격적인 예언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27)
지난 3년 동안 사랑으로 가르치고 인도하신 제자들이 떠날 것을 내다보시는 예수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 일을 단순한 배신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기 위해 통과해야 과정으로 보셨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베드로는 강한 어조로 반발했습니다. “야고보, 요한 이런 애들은 주님을 버릴지도 모르죠. 내가 봐도 그래요. 하지만 나는 절대 아닙니다. 나를 그렇게 보셨다니 상처 받았어요.”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진심을 몰라 줘서 미안하다. 역시 우리 베드로 밖에 없네. 내가 너 때문에 산다.” 하셨나요? 예수님은 더 정확하고 세밀한 예언으로 베드로의 배신를 기정사실로 만드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0)
하지만 베드로는 이에 굴하지 않고 더 강하게 다짐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다른 제자들도 이구동성으로 같은 결심을 드러냅니다. 이들의 다짐이 거짓이나 허풍이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분명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한 의도와 마음이 있다고 전부는 아닙니다. 문제는 제자들은 자신을 너무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자신만만해 하지만, 막상 위험이 코 앞에 닥치면 제자들이 산산이 흩어질 것은 예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의 충성을 폄하하거나 그들의 과도한 자신감을 조롱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이런 메시지를 제자들에게 주고 싶으셨습니다. “너희는 실패하고 넘어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결코 너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가 반드시 너희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회복하리라.”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 자신의 한계를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요? 대부분 우리는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라고 자신만만해 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요? 시험의 때, 영적인 전투가 치열해 질 때 스스로 서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겸허한 마음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만큼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더욱 간절히 소망하고 의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연약한 우리를 강하게 하는 것은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라는 곳으로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이동하셨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속내를 제자들에게 솔직히 드러내셨습니다.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34)
예수님은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을 지경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앞에는 심히 놀라시고 슬퍼하셨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여기에 나와 함께 깨어 있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본 적이 없습니다.
제자들 역시 아마 저처럼 이 예수님이 낯설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동시에 저는 묘한 안도감 같은 것이 들었습니다. “예수님도 나와 같은 사람이셨구나, 그분도 인간의 연약함과 씨름하셨던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에 비하면 내가 져야 할 십자가는 성냥개비 십자가이긴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내가 슬퍼하고 고민하고 눌리는 그 심정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만으로 우리에게 주는 위로가 있습니다.
그런데 위로만으로 끝날 일은 아닙니다. 위로를 넘어 우리가 어떻게 이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이어지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 있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35)
예수님은 조금 나아가사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연약하다고 해서 그 자리에 멈추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계속해서 자기 자리에 머물러 머리만 굴리면 부정적인 생각,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 금방 사로 잡혀 버립니다. 그러다가 결국 사탄의 시험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문제들이 아무리 크고 어렵더라도 하나님께 조금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나가서 기도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나아가서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우리는 이 예수님의 기도에서 기도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기도는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36a)
예수님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수식어도 없이 그냥 “아빠”하고 부르셨습니다. 이번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셨을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아프고 괴로울 때 무슨 예의를 갖추고 웁니까? 그냥 소리소리 지르면서 엄마아빠에게 아픔을 호소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내면의 고통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있는 그대로 드러내셨습니다.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 십자가의 쓴 잔을 피하게 해 달라 구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문제가 있어도 전혀 문제가 없는 척 포장을 합니다. 자신의 내면의 슬픔, 고뇌와 절망을 표출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해도 온갖 미사여구를 써 가며 고상하고 의식적인 기도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조차도 내면의 고통과 아픔을 다 드러내고 토로하셨다면 하물며 우리는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는 나의 연약함과 슬픔과 두려움의 감정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의 민낯을 드러내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나의 심정을 토로하며 기도해야만 합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야만 합니다. 고민스러우면 고민이 된다고 말해야 합니다. 슬프면 참지 말고 울어야 합니다. 너무 괴로우면 소리도 질러야 합니다. 지극히 건강한 것이요, 진실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둘째, 기도는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36b)
예수님은 단지 자기의 고민과 고뇌를 토로하는 단계에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더 높은 곳을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소원 너머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자신이 이 땅에 오셨는가를 생각하셨습니다.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의 길을 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입에서는 위대한 자기부인의 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더 나아가 적극적인 순종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바로 이 지점이 겟세마네 기도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온 마음으로 껴안으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기도를 가만히 살펴보면, 대부분 "내 소원을 들어주시옵소서" "내 뜻을 이루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좋습니다. 이것도 기도입니다.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바람직합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칠 때가 많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주님께 원하는 것을 고집만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기 원하시는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보다 주님이 생각하고 계획하시는 것을 품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크고 원대한 뜻을 발견했을 때는 과감하게 자기의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것을 영접할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기도는 투쟁이고 씨름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단 한 번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39절에 보면 예수님은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를 하셨습니다. 41절에 보면 세 번째 오사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은 동일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기도하신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기도의 몸부림을 통해서 예수님은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영접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결단하셨습니다.
본성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우리의 악한 자아를 주님의 뜻에 복종시키고 주님의 소원이 나의 소원이 되기까지 투쟁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과 영혼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탐심과 욕심, 이기심의 기름덩이들을 짜내는 것이 어떻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쉽지 않기 때문에 기도는 투쟁입니다. 기도는 씨름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기도는 노동이라고도 했습니다. 기도가 이렇게 힘들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다가 중도에 포기합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다가 말다가 하기 때문에 기도의 맛을 잘 모릅니다. 기도의 깊은 세계를 경험해보질 못합니다. 기도가 피상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합니다. 언제가 끝입니까? 마음에 주저함이나 망설임, 두려움이나 불안이 없어질 때까지 입니다. 그 대신 기도하는 사람의 입에서 찬송이 흘러나오고 감사가 터질 때까지입니다. 우리는 이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까지 기도의 씨름을 계속 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나를 짓누르던 것들이 사라지고, 영혼이 새털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기도를 통해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37)
제자들은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을 함께 하면서 앞으로 닥칠 일들을 비로소 예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사람이 스트레스가 심하면 감정 노동 때문에 지쳐서 잠이 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잠을 잔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조차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기도는 커녕 잠만 자다니 이래도 되는 것일까요? 아니나 다를까 정말 제자들에게 위기가 닥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말씀하시고 있는데 야간투시경을 쓰고 중무장한 부대가 가룟 유다를 앞세우고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가까이 아서 입맞춤으로 신호를 하고자 했습니다. 친밀함의 표현인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이끌어 하다니 참으로 가증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가 이제는 사탄의 앞잡이가 되어 나타나다니 참으로 기가 막힌 일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제자 중 하나는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감정적이 되어서 즉흥적으로 판단했습니다. 이런 식의 반응은 예수님께 도움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짐만 될 뿐이었습니다. 정작 예수님이 체포되시자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님은 때가 되었음을 아시고 담담히 그들의 체포에 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달리 담대하고 차분하고 의연하셨습니다. 이후로 사실상 예수님의 마음에서 주저함이나 망설임, 모든 번민이 없어졌습니다. 남은 일들은 그저 되어야만 할 일들이 되어가는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똑같은 상황 앞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반응이 이토록 차이가 나는 것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셨으나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골고다언덕에 앞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로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깨워도 계속 잠만 잤습니다.
평상 시에는 기도했는지 잠을 잤는지 별 티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시련과 고난이 닥쳐왔을 때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기도를 하지 않은 사람은 감정적, 즉흥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면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한 사람은 쉽게 흥분하거나 충동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차분하고 의연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로 내면을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언제 찾아올 지 모를 인생의 위기를 대비하기 위해 우리가 준비할 것은 칼이 아니라 기도입니다.
3. 우리의 연약함보다 더 큰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형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 거짓 증언으로 겁박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조금 자기를 변호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네가 그리스도냐 라고 물어 보았을 때는 당당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62)
이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갔습니다. 밤이 깊어 추위가 찾아오자 사람들은 뜰 가운데서 불을 피우고 앉았습니다. 베드로도 몸을 녹이기 위해 불 곁으로 가서 함께 앉았습니다. 이때 한 여종이 그를 자세히 보고 있다가 말했습니다.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당황한 베드로는 손을 내저으며 이를 완강히 부인했습니다.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그런데 조금 후 여종이 그를 자세히 보고 있다가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베드로는 전보다 더 강하게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의 강한 갈릴리 사투리 때문에 더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베드로는 점점 더 궁지에 몰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정말 예수를 알면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하면서 끝까지 이를 부인했습니다.
이 때에 닭이 울었습니다. 그제야 베드로는 오늘 닭 울기 전에 내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밤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이날 밤 베드로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이 밤은 배신의 밤, 절망의 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복음서가 쓰여질 당시 로마 교회의 지도자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고도 굉장히 수치스러운 과거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자가 이것을 상세하게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복음서가 쓰여지던 시기의 로마 교회는 극심한 박해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위협받으며 예수님을 부인할 유혹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 이야기는 이러한 상황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던 베드로조차 예수님을 부인했던 과거가 있다는 사실은, 박해 가운데 넘어질 수 있는 신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었습니다. 베드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시고 교회의 기둥으로 세우셨다는 사실은,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절망하는 신자들에게 큰 위로를 주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은 단순히 그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드러내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자신감에 차서 “나는 결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했지만, 현실 속에서 두려움과 연약함에 무릎 꿇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부활 후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그를 회복시키시고, 교회의 사명자로 세우셨습니다. 이 은혜는 실패를 경험한 모든 신자들에게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넘어 우리를 다시 세우신다”는 확신을 줍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연약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가 끝이 아님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사명을 주시며, 실패를 통해 더 깊은 신앙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도 위로와 도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조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신을 과신했던 제자들은 위기의 순간에 무너졌지만, 예수님은 모든 두려움과 번민을 이기시고 십자가를 향해 담대히 나아가셨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습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갑시다. 기도를 통해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실패 속에서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모든 것 주께 드립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 아버지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 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모든 것 주께 드립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 아버지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 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게 사랑을 가르치소서
당신의 마음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주의 성령 내게 채우사
주의 길 가게 하소서
주님 당신 마음 주소서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 아버지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 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아버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실패와 두려움을 넘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심을 믿습니다.
우리의 교만과 자신감을 내려놓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을 찾고, 우리의 계획이 아닌 당신의 원대한 뜻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붙들어 주옵소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당신의 뜻에 순종하며 기도로 씨름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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