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 학교 때 한 영어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그 영어 선생님의 성은 특히하게도 피씨였습니다.
피씨라면 '인연'이라는 수필을 쓴 피천득이라는 수필가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실제로 그런 성을 가진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우리들은 그 분의 본래 이름을 부르는 적은 좀체로 없었습니다.
주로 우리는 그분을 '피돼지' 또는 '피바다'라고 불렀습니다.
'피돼지'는 그분이 뚱뚱했기 때문이고, '피바다'는 그분이 한 번 몽둥이를 들었다가는 그 반은 곧 피바다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분의 수업 방식은 매우 독특했습니다.
그분은 일단 수업 시간에 들어오면 매우 정성스럽게 그리고 멋있는 필치로 오늘 배울 단원의 제목을 썼습니다. 그리고 테이프를 카셋트에 넣고는 플레이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리고 교탁 옆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것이 수업의 전부였습니다.
저는 일년 내내 그분에게서 문법이나 독해를 배워 본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테이프만 듣고 또 들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시험에는 문법이나 독해 문제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아주 미칠 노릇이었습니다.
그분은 간혹 테이프를 갈아 끼우다가 엉뚱한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었습니다.
"시바스 리걸이란 좋은 술이 있거든...
근데 그 술을 어떤 병에 담는지 니들은 아냐..?"
저와 가장 친했던 친구가 이 질문에 조그만 소리로 '크리스탈인데'라고 말했습니다. 혼잣말이었는데 그 선생님이 이 말을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분은 갑자기 버럭 화를 내시면 시바스 리걸은 도자기에 담지 크리스탈에 안 담는다면서 제 친구더러 종 칠 때까지 엎드려 뻐쳐를 하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그분은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분의 특이한 행동은 소풍 가기 전날에도 목격될 수 있었습니다. 소풍 전날 종례 시간에 자기 반 학생들 번호를 부르며 내일 선생님을 위해 싸올 음식의 이름을 불러 주었습니다.
"1번 통닭" "2번 깁밥" "3번 과일....."
그분은 매번 소풍 때만 되면 상다리 부러지는 큰 상을 받아서 게걸스럽게 드시곤 했었죠.
한 번은 제가 걸린 적도 있었습니다. 어느날 하교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선생님도 퇴근하다가 저를 발견했습니다. 저를 불러 세우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야... 내가. 지금 닭도리탕이 먹고 싶은데.. 말이야.."
"저.. 지금 돈이 없는데요..."
"알았어.. 임마.. 가 봐라..."
"..............네........휴우"
졸업 후 들은 이야기로는
학부모에게 민원이 들어서 한 번 큰 말썽이 났었고,
그래서 학교에서 이 선생님에게 더 이상 담임을 주지 않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암튼 제 인생에 이분보다 더 뻔뻔한 선생님은 이전에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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